잎이 다 진 감나무. 마른 가지에 미처 다 따지 못한 감이 얼었다 녹았다 빨갛게 홍시가 되었어. 시리도록 새파란 겨울 하늘이 붉은 홍시 뒤로 더욱 푸르네. 마른 행주를 들고 동무가 따 주는 홍시를 닦아. 독에 모두 넣고 감식초를 담을 거야. 감식초 담글 때를 놓치긴 했지만, 아까운 감을 버릴 수는 없지.
“이 감나무, 우리한테 주는 게 참 많지? 우리는 도적 같이 빼먹기만 하는 것 같아.”
동무가 빨간 홍시를 매달고 있는 감나무를 올려다보며 웃어.
“그러고 보니 감은 꽃부터 잎까지. 어느 것 하나 안 주는 게 없어.”
그렇지, 감나무가 주는 게 어디 한 둘이야?
살구꽃이야 복숭아꽃이야 다 지고 난 뒤, 한발 늦게 조용히 찾아오는 꽃. 감꽃이야.
“야야, 감꽃 안 주울 끼가? 마당이 보오얗다”
일어나기 싫어 이불자락 끌어안고 뭉개고 있으면 어찌나 불러대는지.
“마당 씰어야 되는데. 안 주울라카머 고마 씰어낸대이.”
눈 비비면서 나가면 감나무 아래 아버지가 긴 마당비를 들고 서 계셔.
마당에 툭툭 떨어진 감꽃이 발에 밟히도록 보얗게 깔렸어. 짚꽤기 한 오라기 뽑아들고 감꽃을 끼우는데 아직 잠이 덜 깨어서 스적스적 끼우니 꽃잎이 자꾸 찢어져. 꿰어지지 않는 꽃은 입으로 들어가고 온전한 것은 짚꽤기에 끼우고.
“동아는 벌씨로 사춘때기 집으로 가던데.”
야야는 고모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쏜살같이 달려 나가. 사춘댁 감꽃은 아주 작은 방울같이 생긴 꽃이 볕에 말리지 않아도 달달하거든.
사춘댁 감나무 아래엔 아이들이 벌써 예닐곱이나 모여 옹그리고 앉았어. 감나무가 어찌나 큰지 감꽃도 마당을 하얗게 덮을 만큼 떨어졌어. 야야도 윗옷자락을 펼쳐서 날름날름 주워 담아. 나중에 상그람에 둘러 앉아 천천히 끼울 생각이야. 사춘댁 감꽃은 많이 떨어지는 대신 꼭지 끝에 꽃받침까지 달고 떨어져서 바로 끼울 수가 없어.
봄꽃들 다 지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 뒤늦게 조용히 피는 감꽃은 아이들이 아주 반겨. 바쁜 어른들이야 그깟 감꽃 빗자루로 쓸어버리지만, 고걸 꾸덕꾸덕 말려놓으면 곶감처럼 달달한 게 제법 맛난 주전부리가 되거든. 길게 꿰어 꽃목걸이 목에 척 걸면 괜시리 코끝이 간질간질 실없이 웃음이 자꾸 나와.
엄마는 짬을 내서 감잎을 따. 만지기만해도 뭉개지지 않을까 싶던 연두빛 여린 잎들이 단오 무렵이 되면 제법 색도 짙어지고 손바닥 만하게 자라거든.
“다 때가 있는 일이라 늦출 수도 엄꼬.”
엄마는 밭일에 논일에 밀린 일이 많지만 감잎 따는 일도 빠뜨리지 않아. 점심 먹고 햇살이 제일 좋을 때를 기다렸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감잎을 따. 깨끗이 씻어 물이 가시면 감잎을 여러 장 겹쳐 놓고 좁다랗게 채를 썰어. 뜨거운 김이 오르는 채반에 베보자기를 깔고 채 썬 감잎을 올려. 뜨거운 김을 쐬었다가 부채질해 식혔다가 삼베보자기 위에 놓고 손바닥으로 싹싹 문대었다가. 또 한 번 뜨거운 김 쐬고 부채질해 식혀서 문대고. 그렇게 서너 번 해서 바람 선선한 대청마루에 놓고 말리지.
“이 감잎차를 마시면 마음이 착 가라앉아. 겨울에 고뿔도 안 걸려”
아버지는 엄마가 만든 감잎차를 좋아하시지.
아아, 하루는 야야가 학교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자리에 누우셨어. 간밤에도 옛날이야기를 두 자리나 들려주셨던 할머니가 갑자기 못 일어나시는 거야. 혼자 일어나 앉지도 서지도 못해. 오른팔과 다리는 아예 축 늘어져 힘이 하나도 없어. 그나마 왼손이라도 쓸 수 있어 다행이지.
그것만이 아니야.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입을 벌리고 하아악 하시는데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해. 가슴을 퍽퍽 치면서 하아아아아악 하시는데 목에 핏줄이 팽팽하게 불거지고 이마에 핏대가 뚝 불거지고. 야야는 겁이 더럭 나는 거야. 뚝 불거진 핏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할매예, 그라지 마이소.”
야야는 할매를 안고 잔등을 쓸어내리면서 울고 할매는 가슴을 퍽퍽 치면서 하아악하아아,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아.
엄마는 온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묻고 또 물어.
“중풍에는 오리알이 좋다 카던데.”
엄마는 이십 리밖에 이웃 마을까지 가서 오리알 구해다 삶아드리고.
“영천에 중풍에 용한 한의원이 있다카데/”
가는데만 하루가 꼬박 걸린다는 먼 곳까지 가서 약을 지어 와서 드려도 소용이 없어.
“쌔가 꼬이고 굳어서 그렇다. 중풍이 와서 쎄가 굳은 데는 풋감으로 물을 짜 먹으면 좋다카데.”
이웃집 성아 할머니가 나가자마자 엄마는 야야를 데리고 감나무 아래로 갔어. 감꽃 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풋감이 제대로 자랐어야지. 감꽃을 못 떨궈 내고 아직도 꽃을 뒤집어 쓴 감또개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 야야는 감또개라도 주워 날라. 애가 타는 엄마는 감나무 가지째 뚝 끊어다 여린 감잎, 감또개 모두 한데 훑어 옴팍한 돌절구에 넣어.
야야는 절굿대로 콩콩콩 찧으며 빌었어.
‘우리 할매 이거 드시고 말 좀 하게 해 주이소.’
밤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가 말 한 마디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아.
자잘한 감또개는 웬만큼 찧어도 감물이 덜 나와.
‘풋감이 어서 자라야 감물이 잘 나올 낀데.’
야야는 아직 자라지 않는 풋감을 올려다보며 절구질을 하고 또 하고.
그렇지만 할머니는 그 감물을 제대로 드시지도 못해. 숟가락에 조금씩 떠 드리는데 모두 입 밖으로 흘러버려. 삼키지를 못하시는 거야. 답답한 할머니는 숟가락을 밀치면서 하아악하아아 우시는지 웃으시는 건지.
“할매예, 이거 드시면 혀가 풀린답니더.”
입술을 벌리고 한 방울 한 방울 흘려 넣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턱으로 목으로 흘러버리는 게 더 많아. 혀가 굳으면 삼키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야.
엄마는 애를 끓이며 숟가락을 든 채 울고, 답답한 할매는 한 손으로 숟가락을 떠다밀면서 하아아하아악. 야야는 할머니 이마에 뚝 불거진 핏줄이 터질까 겁이 나서 더럭더럭 울고.
셋이 부둥켜안고 울면서 달래면서 몇몇일 감물을 입에 흘려 넣은 덕일까? 할머니 말문이 조금은 열렸어. 비록 식구들만 알아들을 정도지만.
그리고 남은 것은 온통 얼룩덜룩한 할매 옷가지랑 이부자리야. 삼키지 못하고 흘린 감물이 옷이야 이부자리에 물을 들여놓은 거야.
“예전엔 일부러 감물도 들여 입었는데 뭐”
엄마는 지워도 지워도 빠지지 않는 감물 든 빨래를 문지르면서 그래.
“감물이 알록달록 곱지는 않아도 때가 안 타서 좋아. 흰옷은 일할 때 당할 수가 있나. 감물들인 옷은 때가 타도 표가 안 나 일옷 하기 좋지.”
그렇게 어서 자라라 애를 태우던 풋감. 여름 따가운 볕에 감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 채 자라지도 않은 풋감이 툭툭 빠지기도 하고. 낮잠을 자다 슬레이트 지붕에 “툭” 감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기도 해.
엄마가 비워준 조그만 항아리에 소금물을 넣고 떨어진 풋감을 주워 담아. 그렇게 며칠 담궈 두면 감이 잘 삭거든. 떫은맛이 가시고 단맛이 나지. 입치레할 것 없는 아이들한테 아주 좋은 먹을거리가 돼.
“에퇴퇴, 아이구 떫어!”
“그러게, 아직 맛이 덜 들었을 거라 캐도.”
성급한 동생이 한 입 베어 물고 진저리를 치며 뱉어내. 그러니까 잘 삭아 단맛이 들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한다니까.
“올해는 추석이 되어도 감이 안 익겠네.”
일찍 빠진 풋감만 주워서 담그는 게 아니야. 추석이 이르게 오는 해는 감이 채 익지 않거든. 그 중 큰 감을 골라 따서 항아리에 담궈. 잘 삭혀서 차례상에 올리거든. 설날에야 가을에 말린 곶감을 쓰지만.
감이 익기 시작하면 시골은 바빠.
‘가실할 때는 공동묘지 귀신도 꿈쩍거린다 안 카나’
벌레 먹은 감이나 병이라도 든 것은 먼저 홍시가 되어 툭 떨어지기도 해. 아이들한테는 아주 맛난 먹을거리지.
이렇게 절로 빠지는 홍시는 그때그때 먹어. 더 두면 시큼하게 초가 되거든. 엄마는 마당에 떨어져 터져버린 홍시들은 단지에 주워 담아서 감식초를 만들어. 감식초가 새큼달큼 잘 익으면 초항아리에 옮겨서 두고두고 음식에 넣어 먹지.
바쁜 가을걷이 틈틈이 감을 깎아 말리기도 해. 알이 굵고 벌레도 먹지 않은 좋은 것을 골라 곶감을 만드는 거야. 너무 늦은 가을에는 곶감 맛이 잘 안 들어. 볕이 두터울 때 말려야 단맛이 잘 든대.
곶감은 잘 말려서 마른 독에다 넣어둬. 설날 차례상에 올리고, 제사상에도 꼭 올려야 하거든. 설날에 먹는 수정과에도 넣고, 곶감을 잘 펴놓고 호두를 돌돌 말아 곶감쌈을 만들기도 하지. 곱게 채 썰어서 찰부꾸미 부칠 때 꾸미로도 써.
엄마는 곶감을 감추는 것도 큰 일이야. 햇감이 나올 때까지 두고두고 집안 큰일에 써야 하니까 엄마는 꼭꼭 감춰. 야야랑 오빠들이 그 달달한 곶감을 그냥 두지 않거든. 독이든 뒤주든 넣어둘 만한 곳은 다 뒤져 먹으니까.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 잡듯 집안을 뒤져 찾아 먹는데도 꼭 필요한 때에 곶감이 빠지질 않더라고.
감을 깎은 껍질은 그래도 아이들 차지가 돼. 감 껍질도 볕에 잘 말리면 아주 달달하고 쫄깃쫄깃 씹을수록 달거든. 길게 깎아낸 감 껍질 하나도 버리지 않고 아껴아껴 먹었지.
쓸 만큼 곶감을 깎아 말리면 그 다음엔 잘 익은 감을 따서 마른 독에다 차곡차곡 담아. 이게 몰랑몰랑 달달한 홍시가 되면 겨우내 꺼내 먹거든. 할머니 입맛 없을 때 하나씩 꺼내 드리고, 이웃집 할머니들 마실 오셔서 입맛 다실 거라도 내놓으려면 잘 넣어 둬야해.
가래떡을 홍시에 찍어 먹어도 아주 맛있어. 엄마는 김치 담글 때나 불고기 양념할 때 단맛을 내고 싶으면 꿀이나 설탕 대신 넣기도 해. 엄마는 이 홍시도 단단히 잘 지켰어. 긴긴 겨울밤 자지 않고 놀다 배가 허줄하면 무엇이든 먹을 만한 게 없나 뒤지고 다니거든. 아아, 야야랑 오빠들이 그런다는 거지.
“꼭 써야할 때 쓸라카면 애끼 묵을 줄도 알아야지. 날름날름 가져다 먹고 다 떨어지면 그런 낭패도 없대이.”
엄마는 오빠들을 나무라면서도 가끔 나무모랭이에 홍시를 가득 꺼내 와서 하나씩 나눠 줘. 추운 겨울밤에 얼음처럼 차가운 홍시를 먹으면 이가 시려워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려. 그렇지만 달콤한 그 맛은 무엇에도 댈 수 없는 맛이야.
홍시만 못하지만 깨감을 항아리에 두었다가 먹어도 맛있어. 자잘하게 다닥다닥 달린 깨감을 서리 맞을 때까지 두었다 모두 따서 항아리에 담아 둬. 깨감은 너무 자잘하고 어찌나 떫은지 그냥 먹진 않아. 대추알 보다 작은 것이 씨는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한 알 통째 입에 넣어도 목에 넘어가는 건 별로 없어. 한겨울에 항아리를 열면 홍시가 되어 서로 엉겨 붙어 있어. 한 양푼 퍼다가 빙 둘러 앉아 숟가락으로 떠먹으면 꿀맛이 따로 없어. 그런데 한 숟가락 떠 넣으면 씨가 예닐곱 개나 나오거든.
“에이, 목에 넘어 가는 것 보다 씨가 더 많네. 구찮아서 안 먹어.”
좀 까탈스런 작은 오빠는 깨감을 안 먹어. 씨 뱉어내는 게 성가시기는 하지만 긴긴 겨울밤 심심한 입을 달래줄 거리는 됐지.
곶감 깎고, 홍시 독에 채우고 남은 감도 다 쓸 데가 있어. 너무 자잘한 것이나 늦게 익어 아직 단단한 것은 따로 모았다가 납작납작 얇게 썰어 말려. 감말랭이를 만드는 거야.
감말랭이는 곶감만큼 귀하게 아끼지는 않지만 두루두루 쓸 데가 많아. 시루떡을 찔 때 섞기도 하고, 콩이나 밤이나 여러 잡곡이랑 섞어 모둠찰떡을 해 먹기도 해. 말랑말랑 달달한 감말랭이가 씹히면 떡이 한결 맛있거든.
“우리한테 꽃부터 마지막 남은 것까지 모두 다 주고 간다, 그치?”
제때 감을 다 못 따서 얼었다 녹은 홍시를 닦으면서 동무가 새삼 놀라는 거야.
“어디 먹을 것만 주나? 이렇게 텅 빈 겨울 마당에 저 감나무 한 그루 없었으면 마당이 얼마나 휑했겠노?”
시골 집집마다 한두 그루씩 서 있는 감나무. 눈이라도 내려 보라지. 감나무 꼭대기에 몇 알 남은 감 위로 새하얀 눈이 쌓이면 붉은 꽃등을 단 것처럼 반짝반짝 반짝반짝. 새파란 겨울 하늘을 뒤로 하고 얼마나 곱게 빛난다고.
그것뿐이야, 어디? 단풍 곱게 들면 책갈피에 넣어 말렸다가 예쁘게 글 써서 동무한테 카드도 만들어 보내고. 단풍도 참 곱게 드는 데다 넓적하니 글을 쓰기도 좋지. 카드 만드는 덴 감잎만한 것도 없어.
“아궁이 불 때야 하는데, 불쏘시개 좀!”
멀리 갈 일도 없어. 담장 아래로 굴러가 바스락바스락 잘 마른 감나무 이파리 한 줌 긁어다 넣고 불을 지펴. 가랑잎 타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간질. 마당가에 선 감나무 한 그루가 참 고맙지. 암, 고맙고말고!
'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화꽃 당신 (0) | 2016.08.21 |
---|---|
문 바르는 날 (0) | 2016.08.21 |
이불 한 채 (0) | 2014.10.07 |
사진 한 장 (0) | 2013.10.07 |
태풍 볼라벤께 드리는 기도 (0) | 2012.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