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달걀 / 황시백
나는 올해 김장밭에 나가 보지도 못했네. 무우 배추 갈고 고추 따서 말리고 요즘 사잇골 식구들은 바쁘다. '작업반장' 상기 아우는 그 못 버리겠다던 늦잠 버릇도 걷어차고 농사철 내내 동틀 때 일어나 논에 간다. 퇴근하면 또 해질 때까지 밭일을 한다. '내가 농사에 밀리면 형도 병에 밀린다'는 마음이라 한다. 그래 아우야, 니 마음을 모르겠나. 사잇골 식구들 마음, 동무들 마음을 모르겠나. 나 안 밀릴게.
지난해에는 네 집 김장을 같이 했더랬지. 마리아네, 용명네, 상기네, 우리 집. 김장 날, 잔치도 그런 잔치가 없었다. 올 가을엔 기범이 오두막 뒤꼍에도 한 독 묻어야겠지. 다섯 집 김장이다. 열 집 김장을 할 날도 머지않아 오겠지. 조용명이 말한 '꼬질꼬질한 작업복이 어울리는 거지들의 나라' 가장 큰 잔칫날이 되겠지.
어릴 적 고향집에서는 김장을 요즘 너댓 집 하는 만큼 했던 것 같다. 하긴 우리 집 식구가 열둘이었고 거의 김치와 된장으로 겨울을 났을 테니. 농사도 없었으니 아버지 월급으로 간장 된장 담고 김장 담가 겨울 날 채비하기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버지는 평생 철도원으로 사셨다. 집도 일본식 철도 관사였다. 늘 군청색 철도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지금도 아버지는 그 작업복 입은 모습으로 떠오른다. 아버지도 눈만 뜨면 일을 하셨다. 꼬질꼬질한 철도 작업복을 입고 집을 고치거나 텃밭 일을 하거나 마당을 다지거나 늘 무슨 일이든 하고 있었다.
철도 작업복을 입은 아버지 손을 잡고 내가 걷고 있다. 키는 아버지 허리쯤이다. 경상남도 마산 변두리. 집까지 이삼십 분 거리였을까. 자산동에 있는 '몽고간장' 공장에서 간장을 한 말 들이인지 두 말 들이인지 커다란 통으로 한 통 사서 손수레로 배달을 시키고, 아버지와 나는 손수레 옆에서 집으로 걷고 있는 것이다. 김장 끝나면 '왜간장'이라고 했던 그 간장, 요즘은 뭐 진간장이라고 하던가, 그걸 한 통 들여 놓아야 우리 집은 겨울 채비를 마쳤다. 마산이면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그 문화였겠지. 왜간장은 겨울철 아이들 밥반찬이었다.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깨소금 조금 뿌려 주면 그걸로 밥을 비벼 먹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걷는다. 왜간장에 비벼 먹을 생각으로 나는 좀 행복하다. 고개를 들면 철도 작업모 쓴 아버지 머리가 파란 가을 하늘과 함께 저 위에 있다. 나는 또 생각한다. 오늘 저녁상에 달걀이 나올까?
어쩌다 밥그릇 옆에 날달걀이 놓일 때가 있었다. 참기름 깨소금 친 왜간장 종지와 함께. 아이가 아프거나 입맛이 없어 보일 때 그랬겠지. 뜨거운 밥을 숟갈로 옴팍하게 파 헤집어 그 속에 달걀을 깨 넣고 다시 밥을 덮어 놓고 잠시 기다릴 때, 간장 한 숟갈 넣고 달걀 노란 빛으로 밥을 비빌 때, 그때 만한 행복이 없었다.
나는 요즘 두어 달째 음식 삼키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 몸무게가 거의 20킬로 빠졌다. 어떻게든 먹어내지 못하면 치료고 뭐고 계속할 수 없다고 한다. 자리에 누워 있으면 꿈결인지 잠결인지 아버지가 자꾸 보인다. 여전히 철도 작업복을 입었다. 어느 새벽인가. 아버지가 그런신다.
'시백아, 니 우짤라고 그라노? 와 밥을 못 묵노?'
'아부지예, 저도 벌써 육십이 다 돼 갑니더. 그라고 마이 지쳤어예. 안 묵으니 그냥 편안하네예.'
아버지는 쪼맨한 아새끼가 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냐는 얼굴이다. 그리고 한 마디 하신다.
'달걀에 비비 묵어라.'
아버지도 밀리지 말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