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살아있다는 것
무너미 다녀오신 분들, 피로는 좀 풀렸는가요?
몸도 마음도 다들 힘들었을거예요.
푹 쉬시고, 나중에 생각나면 한 번 불러 주세요.
그저께가 돌아가신 어머님 생신이기도 하고
마음도 시끄러워서 산소엘 다녀왔어요.
마침 생신날이니 어머니 좋아하시던 거나 좀 사자 싶어 장보러 갔는데,
과일집에 요새 보기 드문 복숭아가 있어요.
노랗게 잘 익은 복숭아, 황도 라고 하데요.
두 개씩 담아서 사천 오백원이라고 딱지가 붙어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비싼 건지 생각도 않고 덜렁 샀어요.
우리 어머니 살았을 적에 얼마나 좋아하시던 건가.
좋아하시던 떡도 좀 사고, 사과, 배도 사고 집으로 왔어요.
집에 와서 산소에 가져갈 걸 챙기면서
'옴마야, 제삿상에는 복숭아 안 올리던데........'
'그렇지만 그게 뭐 보통 복숭아냐, 어머니가 그래 좋아하시던 건데.
좋아하시던 거 드리지 뭐.'
배도 씻어 담고 복숭아도 씻어 담고 집을 나섰어요.
"저기요, 복숭아가 있어서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냥 덜렁 두 개를 샀거덩요."
"요새도 복숭아가 있어요?"
"예에. 그런데 제삿상에는 복숭아를 안 올린다카는데, 산소에는 가져가도 되나?"
"안 쓴다카는 거는 안 놓지요, 뭐."
"그래도 어머니가 얼매나 좋아하시던 건데."
안 놓자니 아쉽고, 놓자니 마음에 걸리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했게요?
'뭐, 어떻겠노? 어머니도 당신 좋아하시던 거 보면 안 반가울까?'
'아이다. 옛날에 할매가, 귀신이 되면 살았을 적에 입맛하고 달라진다카던데.'
'옛날말이 그렇지, 그런기 어데 있겠노?'
그래 속시끄럽기 혼자 중얼거리다가 다른 거는 다아 상석 우에 차려놓고
복숭아만 담아갔던 소쿠리에 그냥 담아서 상석 옆에다가 살째기 놓았어요.
'어머니 요오 있는 복숭아 보이지예?
요게 더 맛있으면 요거 드세요. 상에 안 올렸다고 어머니 안 드리는 거 아니예요. 어머니만 드시라고예'
이래 꼼수를 쓰고는 절도 하고 여기저기 돋아난 풀도 좀 뽑았어요.
풀을 뽑으면서도, 어머니가
'야아레, 나이 쉰이 돼 가는 에미나이레 아직도 얼라 겉어야?'
하실 것 같아서 자꾸 실실 웃음이 나와요.
어머니 살아실 적에도
아버님 제사를 지내면
음식을 다 했놓고는 상에 차릴 때는 하나씩 잘 빠뜨리는 거예요.
절 다 하고 보면 안 올린 게 생각나서
뛰어가서 들고 와서는
"아버님, 디저트예"
그러고 올리기도 하고,
통닭을 잘 조렸는데 두 다리 옹그린 모양이 하도 야하게 생겨서
"아버님, 야아가 진짜로 야해서 돌려놨거든 예"
하면서 변명을 해대면
어머니가
'저 에미나이레, 아이구 저 얼라' 하면서 웃으셨는데.
서인이가 소쿠리에 담긴 복숭아를 보면서
자꾸 복숭아 먹고 싶다고 졸라요.
서인이는 어머님이 키우셔서 그런지
어머니 좋아하시는 거는 다아 좋아해요.
국수 좋아하는 거,
호박들어간 음식은 뭐든 잘 먹는 거,
고구마에 김치 처억 걸쳐서 먹고 싶다는 거,
어머니 입맛을 많이 물려 받았어요.
"쫌 기다리라"하다가는
또 어머니 말씀이 들려요.
"야아레, 머라카너. 죽은 조상이 뭐시긴?
가차이 산 조상 배아지 다 곯겠구마이레. 날래 얼라 먼저 줘라마."
아버님 제사에 쓸 거라고 따로 챙겨놓는데
어린 것들이 달라들어 먹고 싶다면 어머닌 늘 그러셨어요.
"산조상 배아지 곯게 하고 죽은 조상 섬기간? 어여 얼라들 먼저 줘라마."
복숭아 껍질을 살살 벗겨가며 옴삭옴싹 먹고 있는 서인이를 보는데
어머니 얼굴이 보이는 듯해요.
우리 어머니는 지인짜로 복숭아를 좋아하셨어요.
처음 시집 가서 대신동에 살 때,
집 앞에 돌 복숭아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걸 그냥 놔 두질 못했어요.
옛날도 아니고 요즘에야 그 돌복숭아 따 먹는 사람이 있어요, 어디.
집앞에 그 복숭아는 누가 거름주어 가꾸는 것도 아니라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하나 둘 자꾸 빠졌어요.
어머니는 익지도 않고 빠져버린 그 풋복숭아도 버리질 못해요.
탱자만한 걸 한 바가지 주워다가 껍질을 벗기고 씨를 발라내서
설탕을 듬뿍 뿌려서 냄비에 넣고 푹 끓여서 드시는데
어쩌다 한 숟가락 먹었더니 복숭아 맛보다는 순 설탕물이예요.
그걸 냉장고에 넣어 두고 한 그릇씩 떠다 드시곤 했어요.
당감동 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도 우리집 창밖으로 돌복숭아가 한 그루 있었어요.
아파트 꽃밭에 자라는 복숭아 나무라
봄에 곱게 꽃이 피면 그 꽃이나 즐기지
누가 그 돌복숭아 열매를 탐이나 내겠어요?
그러니 떨어진 돌복숭아나, 다 익은 거이나 모두 우리 어머니 차지예요.
학교 마치고 집에 가 보면
바가지에다 복숭아를 주워다 놓곤 하셨어요.
여전히 설탕을 듬뿍 넣어 삶아드셨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풋복숭아를 주워 나르시는 모습이 자꾸 짜증이 나는 거예요.
언제부터 그게 그렇게 싫어졌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동네 사람 아무도 안먹는 걸 주어 오시는 것도 싫고
바닥에 흘려놓으면 정말 찐득찐득해서
걸레로 잘 닦여지지도 않을만큼 설탕을 많이 넣어서
어린 서인이한테 자꾸 먹이시는 것도 싫고
그러고 나면 입맛을 잃고 우유도 밥도 잘 안 먹으면
더 속이 상하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다 언젠가, 자꾸 짜증만 낼게 아니다 싶어
어머니 좋아하시는 복숭아를 떨어지지 않게 사다 드려야지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과일집에 복숭아만 나오면 사다 드리기로 했어요.
세 개 이천원 할 때 부터
나중에는 한 소쿠리에 삼천원할 때까지
냉장고에 복숭아가 떨어지지 않게 사다 날랐어요.
달고 맛있는 거니 설탕 넣어 삶아 드시지 않고
그냥 껍질 벗겨 드셔도 아주 맛있는 걸 골라서.
그런데 어머니는 냉장고에 복숭아가 아무리 있어도
꽃밭에 나가 복숭아를 주워 오시는 겁니다.
"어머니, 이기 훨씬 더 맛있는데예.
볕에서 잘 익은 거라서 이기 영양가도 더 많습니더. 이거 잡수이이소."
"자꾸 사 나르지 말라우야. 내레 저거 아까버서리 안된다야.
저거레 다 먹어야 되니께네 아까븐 돈 쓰지 말라우"
"먹을 거를 썩어빠지게 나두면 죄받는다야"
그러면서 꽃밭에 떨어져 시들어가는 꼴을 못 보시는 거예요.
아무리 때깔좋고 맛있는 복숭아를 사다 드려도 그건 본체만체 하시고
손도 안대고 버리는 돌복숭아가 아까워서
하나도 버리지 못하던 우리 어머니,
할머니 덕에 때아닌 복숭아를 맛있게 먹고 있는 서인이한테서
우리 어머니가 보입니다.
한참을 지 얼굴을 바라보는 걸 눈치챘는지
"엄마, 복숭아는 잘 익어야지 껍질이 이래 벗겨지지요오?" 한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처음 바알갛게 복사꽃이 피었을 때
그 꽃을 내려다 보면서 눈물을 닦았다.
'올해는 어머니가 계시면 떨어진 풋복숭아를 같이 주울 텐데.'
그런데 인간이 참 그렇다.
그걸 살아계셨을 때 한 번도 못하고
꼭 돌아가신 담에야 철이 드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