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꾸는 글쓰기

선생 심부름과 종이컵

야야선미 2005. 3. 22. 13:09

점심을 먹고 숟가락과 미처 씻어두지 못한 찻잔을 들고 수돗가로 갔다.
늘 내 옆에서 뭔가를 거듣고 싶어하는 소영이가 어느 새 보고 따라왔다.
"선생님, 설겆이 해요?"
"어"
"나도 그거 잘 하는데."
"나도 설겆이 잘 한다."
"나도 하고 싶은데"
"그래도 내가 먹은 숟가락이니까 내가 하께."
"그런데 이거는 무슨 컵이예요?"
"이거는 내 찻잔. 어제 오후에 차 마시고 바빠서 못 씻어놨거든"
"그런데 선생님은 이런 찻잔 좋아해요?"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차 우려 마시기에는 이게 좋아."
"일학년, 이학년 때 선생님은 종이컵 썼는데."
"나는 종이컵이 싫더라."
"왜요? 환경오염 땜에요?"
지난 목요일 재량시간에 학교에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을 찾아 보자고 했을 때 나왔던 이야기가 생각난 모양이다.
"환경오염도 그렇고, 종이컵에 해로운 것이 많이 있어서 차 마시면 몸 속으로 다 들어가거든."
내 말이 길었던지 말하다 보니 소영이는 어느 새 가고 없다.
소영이 말처럼 언제부턴가 학교에서 종이컵을 쓰는 일이 참 많아졌다.
환경교육 시간에 아이들한테는 일회용 그릇 종류를 쓰지 말자고들 한다. 그런데 날마다 차를 마실 때 아무 생각없이 종이컵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지난 금요일. 사 오월 학습 준비물을 신청한다고 교과서를 주욱 펴놓고 필요한 준비물을 쓰고 있는데, 옆반 선생님이 종이컵도 한 서너개씩 돌아가게 적어란다.
"종이컵을 그렇게나 많이요? 하나 쯤만 해도 되겠던데. 그라고 그런거는 저기 미화당 수퍼 자판기 앞에서 들고 와서 말려서 쓰면 되는데."
"아아니 그기 아이고 커피타임 때 쓸라고 그라지"
"한 서너개씩 돌아가게 사서 여기 갖다놓고 쓰면 되잖아. 자기는 밥물인지 뭐어 한다고 커피를 안 마셔서 모르나?"
할 말이 잠깐 없다.
뭐라고 한 마디 나오다가 엊그제 후배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 일분만 참자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또 너무 빡빡하다고 할란가?  역시 한 박자 참으니 말도 곱게 나온다.
"아아이 쌔앰! 그거 환경호르몬 억수로 마이 나오는데, 그거를 와 쓸라캅니꺼? 젊은 사람들은 그거 자꾸 쓰면 아아 낳는데 지장있대이."
"그래. 그기  해롭다카기는 카데."
"그래도 일일이 컵 씻고 그런 거를 누가 할끼고? 고마 쓰기 편하이 그거 쓰지"
"쌤, 내가 씻으께예. 안 그래도 운동 부족이라서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카는데 내가 운동 삼아 씻지 뭐. 뜨거운 물 붇고 차 숟가락으로 싸악 젓는 순간에 환경호르몬이 다아 녹아나온다카는데. "
"박선생, 니이 그래 예민하이 그래 쌓아서 자꾸 더 아푸다 아이가."
"쌤. 내가 예민해서 아푼 기 아이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막 살아서 아픈 거 같아서 인자사 신경 좀 쓰고 살라고 그라는 기지예."
좀체 들을 기색이 아이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고 싶은 말도 좀 하자 싶다.
"그런데 내 삼년전까지 동학년 총무했는데. 그 때는 쌤들 컵 하나하나 외워가면서 커피 타고 씻고 그랬는데. 언제 부턴지 컵 외울 일이 없어졌더라."
"그기 컵 씻는 기 귀찮아서 다아 종이컵 쓰니까 그렇지. 우리만 그라나 어데."
옆에서 나이 많으신 대선배님이 거든다.
"와아 언제고 아아들한테 선생 심부름도 시키지 마라카고, 선생 컵도 아아들 시키가 씻으라 카면 안된다 하고. 그거 너거 전교조 선생들이 캔 거 아이가?"
"몰라예. 그거 전교조에서 말했는지는 모르겠고. 그 뒤로 종이컵을 쓴다 말이지예?"
이야기가 참 희안하게 돌아간다.
"아아들 보고 컵 씻으라카면 안된다카는데 선생들이 언제 지 컵 씻고 있노?"
"그래도 다아 우리가 컵 씻으면서 차 마셨는데."
"니나 그래 했으까, 다아 아아들이 했지."
"아아들 안 시킨 거는 잘 핸 거 아입니꺼? 갸들이 제대로 씻을 줄이나 아나, 괜히 손시럽은데 고생만 하지."
"쌤. 아아들 말 나왔으니까 말이지. 지난 주 환경 재량시간 공부가 종이컵 쓰면 안 된다. 일회용 도시락 쓰지 말자 그런 거 였는데. 종이컵 쓸라카이 손가락이 안 오그라집니꺼?"
"좀 뒤가 땡기기는 해도 우야겠노?"
 뒤가 땡기면 안 해야되는데. 학교에서, 우리 선생들은 그 뒤가 땡길 짓을 오늘도 하고 있다.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가겠지.
종이컵 쓰게 된 것이  아아들한테 선생 심부름 못 시키게 해서 그런 걸로 이야기가 넘어가고, 이야기를 하자면 참 어디서 풀어야할지 한참 어려운 사람들이다.
오늘 하루 결판이 날 일이 아니다.  올 한 해 쫀득쫀득하게 잊지 않고 자꾸, 생각날 때마다 조금식 이야기 해 보자. 한 가지만 못 박고 일어섰다.
"종이컵은 신청 안합니더. 그 대신 우리 사랑하는 동학년 쌤들 환경호르몬에서 보호 하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올해 컵 당번은 제가 할께요."  (2005. 3. 22. 부산글쓰기회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