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선미 2009. 9. 16. 11:50

<선생님께 드립니다>
꽃들의 화려한 몸치장이 한바탕 쓸고 지나가고 천지가 프르름으로 짙어가는 계절이 여왕 5월입니다.
가방이나 메고 다닐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입학을 시킨지도 벌써 2달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다행히도 한빛이가 학교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곳이라며 적응해 나가는 걸 볼 때 새삼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매일 집에서 예습, 복습 시켜서 다른 친구들과 같이 보조 맞춰서 가도록 지도해야하는데 저는 먹고 산다고 바쁘고 어머니는 동생 둘 키울랴 또한 모국어가 아닌 탓에 많이 힘든가 봅니다.
그리고 지난 주엔 할머니께서 뇌경색으로 입원을 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 매일 한빛이를 찾고 계시고 저 또한 당연히 한빛이가 매일 할머니 문병을 가야한다고 생각하기에 매일 저녁 병원에 데리고 갑니다.
한빛이가 할머니께서 휠체어에 타신 걸 보고 많이 충격을 받았던 것 같은데 다행인 것은 지금은 의젓하게 할머니 팔다리도 주물러 드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게 고맙기만 합니다.
덕분에 할머니도 많이 좋아지고 게십니다.
선생님, 당분간만 우리 한빛이가 받아쓰기나 읽기 못해도 야단 많이는 치지 말아주세요.
세상에는 공부보다 소중한 게 훨씬 많고 또한 그런 것을 하나씩 이해해 나가는 것도 학교생활 만큼이나 소중할 수 있으니까요.
때로는 1등보다 당당한 꼴찌도 있다는 걸 한빛이 또한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요.
선생님 찾아 뵙지는 못하고 편지로 대신하는 것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또렷이 기억하는 것처럼 우리 한빛이에게도 선생님이 마음속의 커다란 나무로 새겨질 것입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선생님의 가정과 1학년 4반 가족 모두에게 웃음만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200년 5월 14일   정한빛 아버지 올림

편지를 쓴 날을 보니, 가방에 며칠 넣고 다니다가 오늘 아침에야 꺼내 준 것 같습니다.

한빛이 어머니는 베트남에서 시집을 왔습니다.
입학식날, 3월말에 했던 일학년 학부모 연수회 때 한빛이 아버지는 기름때가 찌든 회색 작업복을 입은 채로 한빛이 책상에 앉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셨습니다.
한빛이 어머니가 아직 우리말을 잘 못 알아들어 일하시다가 잠깐 윗분에게 말하고 나왔다 하시더군요.
일학년 급식을 하지 않던 3월 어느날, 은박지에 김밥 두 줄을 말아 들고 급히 달려오셨어요.
"아니, 우얀 일이십니꺼?"
"한빛이 글마가 방과후 교실에 간 다고 밥도 묵으러 안오고 논다캐서..."
우리 학교에는 저소득층 자녀와 맞벌이 부부 자녀를 위한 방과후 교실이 있습니다. 공부보다는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일이 더 크지요. 그런데 한빛이는 신청도 안했는데 우리반 동무가 서넛 가니까 저도 따라간 모양입니다. 
"아이구, 일하시다가 또 이래 올라오셨네예."
"자슥이 밥도 안 묵고 있는데,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야지예."
환하게 웃는 한빛이 아버지는 웃음이 참 맑습니다.
옛날에 홍명보 선수가 환하게 웃던 모습이랑 꼭 닮았습니다.
김밥을 건네주고 또 급하게 달려나가시는 뒷모습을 보고 코끝이 찡했는데,
오늘 이 편지를 받고 보니 우리 한빛이가 받아쓰기 한 개를 맞아도, 여섯개를 맞아도 늘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오늘 아침은 비갠 뒤 하늘 만큼이나 내 마음도 맑고 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