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의 책

[스크랩] 박선미의 <욕 시험>을 읽다

야야선미 2009. 9. 17. 20:53

무슨 이런 시험이 다 있노?

-≪욕시험≫, 박선미 글, 장경혜 그림, 보리

 

 

우리 집 큰애가 단숨에 읽고 빙긋이 웃던 게 생각난다. 읽어봐야지 하고 미루어 두고 있다가 방학이라고 이제야 읽는다.

시험지를 앞에 놓고 눈꼬리를 치뜨고 책상머리에 앉은 야야 모습을 보면서 박선미 선생님을 문득 떠올려 본다. 조용한 듯 하면서도 참 맛깔스럽게 얘기를 풀어놓던 모습 말이다. 어쩌면 경상도 입말이 주는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이 풀어놓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나는 자꾸 우리 외갓집 사랑방 풍경이 그려진다.(우리 아버지 어머니 모두 경상도 사람이다.) 물론 읽다보면,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려야 할 때도 있지만 입속으로 소리내듯 읽어보면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

하루는 야야 선생님이 누런 똥종이 시험지를 한 장씩 나누어 주고 알고 있는 욕을 쓰라고 한다. 바른 말 고운 말 쓰기를 입버릇처럼 떠벌리는 학교에서, 그것도 알고 있는 ‘욕’을 모두 쓰라니 누구든 당황스럽지 않겠나. 더구나 주인공 야야는 아버지가 한 학교 선생님이다. 그러니 오죽하겠나.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지 않으려고 속마음하고는 다르게 얌전한 척, 똑똑한 척, 참한 척을 해야 하는 야야였기에 선뜻 알고 있는 욕들을 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을 게다.

야야가 망설이고 있는데 동무들이 시험지를 내기 시작한다. 야야는 마음이 바빠진다. 그러다 동무들이 가슴 콕콕 찌르는 말을 해도 억울한 소리를 해도 꾹꾹 누르고 참았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한 번도 입 밖에 내어보지 못한 욕들을 연필에 침을 묻혀 가며 똥종이 시험이 뒤에까지 빼곡히 자꾸자꾸 쓴다. 욕을 하면서 그래도 야야는 속이 시원했겠다는 마음이 든다. 더구나 시험이 아닌가.

그러구러 욕시험이 끝나고 야야가 교무실에 갔는데 선생님들이 “사학년 일반 욕쟁이”, “박선생 댁 욕쟁이 양념딸”, “뒤로 호박씨 깐다 카더마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놀려대니 어찌 분하고 미운 마음이 안 들겠나. 더러 학교에서도 이런 일들을 심심찮게 본다. 아이를 두고 선생들끼리 이러구저러구 입방아 찧는 일 말이다. 선생끼리야 그저그런 말이겠지만 그 말이 두고두고 아이한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때부터 야야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을 삭히지 못해 팔딱팔딱 뛸 노릇이다. 더구나 욕 시험지 때문에 선생인 아버지가 곤란을 겪지 않을지, 또는 나쁜 아이로 오해받지나 않을까 저혼자 끙끙 앓는다. 거기서는 나도 모르게 키들키들 웃음이 난다. 뭐 그깐 일로 그러나 싶은 마음도 없지 않다.

그런데 야야는 학교에 가서도 선생님이 밉기만 하다. 우스갯소리를 해도 ‘빙신, 그기 뭐 그래 우습노?’, ‘아이고. 어바리 겉은 기’ 하면서 속으로 욕을 한다. 그래, 잘한다. 그렇게라도 마음 풀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일 주일쯤 지나, 선생님이 마침내 야야를 부른다. 담임 선생님은 “너거들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게 뭔지 알고 싶어서” 욕 시험을 봤다면서 야야 마음을 달래고 다독여준다. 이제껏 욕 한번 변변히 못하고 박선생 딸로, 참산댁 딸로 살면서 애먼소리 듣고도 속으로만 억누르고 살던 일들을 쏟아내면서 야야는 이제 꺽꺽 소리내어 운다. 나도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그래도 그러면서 마음이 얼마나 홀가분했겠나. 여기 나오는 선생님도 마음이 탁 트인 사람이다.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야야 말을 들어주고 야야 편에서 말해준다. 이런 선생님을 둔 야야가 부럽다.

 

“박 선생은 박 선생이고, 박 선생 딸은 박 선생 딸이지. 욕할 거 있으면 욕도 씨게 해라. 도나캐나 욕을 입에 달고 있는 거는 안 되지만, 욕해야 될 때는 욕을 해야지.” (53-54쪽)

 

그러니 그 선생님이 어찌 오래도록 가슴에 남지 않겠나.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은 희미한데 선생님이 초등학교 다닐 적 실제로 치른 욕 시험을 떠올리며 사나흘 만에 쓴 이야기라고 한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썼지만 그대로 동화가 되었다.

책을 덮으면서 박선미 선생님이 해주는 이야기를 곁에서 듣는 듯 해서 푸근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경상도 입말이 고스란히 살아있어서 더 그렇지 싶다. 물론 씨차기, 망, 된매, 괘꽝스럽다, 땡깔, 새곰달달 같은 말이 생경하긴 해도, 이렇게 삶 속에 버젓이 살아있는 말들을 글로 남기는 일도 소중하다고 본다. 글보다 말이 먼저이니까. 또 하나 연필로 휘리릭 휘리릭 그린 듯한 그림을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읽으면서 내내 책에 나온 야야 얼굴에다 박선미 선생님 얼굴을 겹쳐 그려본다. ≪달걀 한 개≫, ≪산나리≫를 거쳐 자라나는 ‘야야’를 곁에서 지켜보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속 담임선생님 말이지만, 박선미 선생님이 우리 아이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어 그대로 옮겨 본다.

 

“너거들이 말로 하지도 못하고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기 뭔지, 너거들 마음을 어둡게 누르고 있는 기 뭔지, 그기 알고 싶더라. 이 시험지에 대고 시원하이 다 풀어 놓고 너거들 마음을 훌렁훌렁 씻어 버리라고 그랬지.”(54쪽)

 

나도 이렇게 선생 노릇을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다. (2009. 8. 4.)

출처 : 2009 서부초등학교 2학년 초록반
글쓴이 : 이무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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