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이름표를 만들어 붙이면서
우리는 어제 열시에 교무실에 모두 모였어. 봄 방학 하자마자 바로 모이니까 뭐어 방학 한 것도 아니야. 교감이 새로 맡게 될 학년을 부르는데 나는 삼학년이래.
같이 삼학년에 불리는 사람들을 보니 올해로 쉰 여섯 아줌마, 쉰 넷 아줌마, 이제 쉰 되는 아줌마, 그리고 나 마흔 몇 살짜리 비교적 처녀, 나머지 하나는 서른 살짜리 아저씨.
삼학년 책상으로 모이는데 누가 그러는 거라.
"삼학년이 젤 고령이네. 우리 학교 경로당이네."
'아이씨. 내가 들었는데도 경로당이라니.'
하긴 다아 둘러 보아도 우리 학년 나이가 젤 많아 보인긴 하더라.
삼학년 담임 다섯이 모여서 아이들 이름이 든 봉투를 하나씩 뽑았어.
삼학년 삼반. 나는 삼반이다. 삼반이라 적힌 봉투를 열고 아이들 이름을 살펴보는데 남학생 열 일곱, 여학생 열 셋 모두 서른이네. 특수반이라고 옆에 적어 놓은 아이가 하나 있어.
지난해 이 아이들을 맡았던 선생님이 옆에 와서
"이 아이는 별난 놈이고, 이 녀석은 어쩌고........." 이야기를 시작해.
"쌤, 괘안습니더. 바쁘신데 그래 친절하게 이야기 안해 주셔도 됩니더. 그냥 낼 모레 만나면 알게 되겠지예."
굳이 알려 주겠다는 걸 그냥 말렸어. 미리 그런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 이야기 듣지 않고 그저 반가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그냥 내 눈으로 아이들을 보고 싶은 거지.
오늘은 아이들 이름표를 만들었어. 신발장에 붙일 이름표와 교실에 만들어 두고 쓸 이름표 두 가지.
신발장에 붙일 이름표는 네모난 글 상자에다 예쁜 그림들을 넣어서 예쁘게 만들었어. 아이들 이름 하나하나마다 어울리는 그림들을 찾느라 시간이 꽤 오래 걸렸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이름 한 번, 그림 한 번 들여다 보며 아이들 얼굴을 상상해 봤어. 몇 번을 해 보았지만 할 때마다 참 재미난 일이야.
최경률. 이 녀석은 키가 클까? 이름만 봐서는 좀 덩치가 크게 생겼는데.
이진욱. 이름만 봐서는 다부지게 보일 것 같은데.
올해는 이름표를 코팅했어. 지난해에는 환경오염시킨다고 코팅을 안 했더니 물걸레로 자주 닦는 신발장이라 네 번이나 만들어 붙이게 되더라고. 그것 보다는 코팅해서 일년 내내 쓰는 게 더 낫지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네.
네모 표에다 이름을 하나하나 쳐 넣고, 이름을 보면서 그림 찾아 넣고, 종이에 뽑아서 하나하나 오리고, 코팅종이에다 짜 맞추듯 하나하나 나란히 놓고, 코팅해서 오리면서 아이들 이름을 예닐곱번이나 되뇌였더니 벌써 아이들 이름이 입에 착착 달라붙어.
몇 해 전 부터 이렇게 봄방학 때 나와서 신발장 이름표을 만들어 붙이고, 사물함 이름도 만들어 붙이면서 아이들을 상상해 보곤 하는데, 이게 참 재미있는 일이야. 또 내가 새로 만나는 아이들을 정성껏 만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며 준비하는 일이기도 해.
사물함에 들어있는 쓰레기나 못 쓰는 물건을 다 꺼집어 내고 청소하고 이름표를 붙이면서, 신발장을 깨끗이 닦고 새 이름표를 붙이면서, 아이들 이름을 조그맣게 불러보면서 나중에 내 입에 이름이 착착 붙는 느낌이 들면 나는 그게 참 좋았어.
아이들 얼굴은 하나도 모르지만 이렇게 이름을 자꾸 불러보다 보면 첫날 만났을 때 한결 더 반갑고 친하게 느껴졌거든. 첫날 만나서 이름을 불러보면 꼭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 같아서 참 좋아.
아하, 경률이가 이렇게 생겼구나!
어어 예슬이는 이름하고 여엉 다르네. 그러면서 훨씬 빨리 얼굴이 익혀지거든.
오늘도 아침에 나가서 신발장 물걸레로 닦고 이름표 만들어 붙이고 사물함 청소 다하고, 책상 높이 맞추어서 낮은 건 앞으로 옮기고 높은 책상은 뒤로 보내고, 걸상도 높낮이를 맞추어서 들고 다니다 보니 벌써 집에 가 저녁 준비할 시간이 되었어.
내일은 칠판에다 첫 인사를 몇 자 적어놓아야지. 옆에는 내 그림 솜씨도 좀 뽐내고. 산너머로 기우는 해를 보면서 운동장을 나서는데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 이름이 자꾸 맴돌아. 그 기분이 참 좋았어.
// "교단 일기" 게시판이 생긴 걸 보고 들떠서 대단하지도 않은 걸 떠 벌려 봤어. 이래 시답잖은 이야기라도 하나씩 들려주는 자리로 만들자 싶어서. (2005.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