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탱자나무 울타리

야야선미 2008. 4. 23. 11:19

매화는 벌써 지고 벚꽃도 피었다 지고 복사꽃도 다 지고 나무마다 새 잎이 야들야들 반짝거리고 있어. 동네를 환하게 밝혀주던 살구꽃도 지고 자두꽃도 지고 나니 이제 탱자나무 울타리가 올망졸망 꽃망울을 틔워내. 고 여리고 작은 꽃눈이 어떻게 저 댕돌같은 가시나무를 뚫고 나오는지. 야야는 탱자나무 꽃망울을 볼 때마다 저 힘이 어디에 숨어있었을까 싶어. 탱자나무는 그악스런 가시만 단 채 파랗게 질린 듯 겨울을 나더니 올해도 때를 잊지 않고 새하얀 꽃을 피워 내잖아.

탱자나무 꽃망울은 잎보다 먼저 가시나무를 뚫고 나와. 처음에 빼족이 눈을 내밀 때는 수수밥풀을 붙여놓은 것 같아.

“이거 수수밥풀 겉제?”

“인자 쌀밥만하제?”

“이기 다 쌀박상이면 좋겠제?.”

아이들은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서 오구작작 떠들어 대. 마치 입에 넣으면 오물거릴 틈도 없이 사르르 녹는 고소한 쌀박상을 한 입 넣은 듯한 얼굴이야. 봄볕이 제법 도타워져서 수수밥풀 만한 꽃망울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거든. 처음에 수수밥풀 만하게 얼굴을 내밀었다가 쌀밥알 만하게 자라다가 꽃이 피기 전에는 제법 쌀박상 만해져. 마치 가시나무에 하얀 쌀박상을 한 자루 꿰어놓은 듯 해.

마침내 꽃망울이 터지면 새하얀 꽃잎과 가운데 노란 꽃술이 골목골목을 환하게 밝혀줘. 뒤따라 나온 연둣빛 새잎까지 어우러지면 정말 눈이 부셔. 금방 나온 잎은 만지면 뽀드득 소리가 나지 싶을 만큼 반짝거리거든. 탱자꽃은 안개꽃처럼 자잘하지도 않고 목련처럼 크지도 않지만 참 곱단해. 동무들은 꽃잎 붙은 모양이 조금 멀쑥하다고들 해. 야야 눈에는 무리지어 핀 모습이 새하얀 눈처럼 보여. 보름달이 높이 뜬 날은 탱자나무 꽃이 눈이 시리도록 하얘서 고샅이 더욱 환해.

하얀 꽃도 꽃이지만 그 옆을 지나면 그윽한 내음을 빼놓을 수가 없어. 나지막한 울타리에 꽃이 하얗게 피고 코끝을 간질이는 내음이 퍼지면 호랑나비가 많이도 날아들어. 탱자나무에는 유별나게 호랑나비가 많이 날아들어. 탱자나무 꽃이 피면 야야는 무척 설레며 학교로 가는 날이 많아. 아침에 호랑나비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했거든.

야야네 동네에는 집집이 담장 대신 생울타리를 많이 했어. 그 가운데서도 탱자나무 울타리를 많이 했지. 긴 가시가 어찌나 여물고 센지 짐승들이 몰래 들어오다가 혼쭐이 나지. 집 앞쪽이나 옆에는 진흙을 이겨 돌을 쌓아 담장을 하기도 해. 수수깡이나 대를 엮은 바자를 두르기도 하고. 하지만 집 뒤는 어느 집이나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어. 식구들 눈에 잘 안 띄는 집 뒤를 탱자나무가 든든하게 지켜준 셈이지. 집 가까이에 가꾸는 텃밭이나 남새밭도 나지막한 탱자나무 울타리를 했어. 목줄 풀린 목매기송아지나 우리를 뛰쳐나온 돼지가 밭으로 들어가 난장 치는 걸 잘 막아주거든.

영석이네 탱자나무 울타리는 동네에서 으뜸이었어. 영석이 아버지는 울타리를 어찌나 잘 깎는지 자루긴 가위를 두 손으로 잡고 척척척 깎는데 그 솜씨가 정말 훌륭해. 높은 곳도 낮은 곳도 없이 판판하게 깎은 뒤에 보면 가시나무가 아니라 폭신한 잔디밭처럼 보인다니까. 가끔씩 저 위에 한번 누워 봤으면 싶을 때도 있어. 해마다 그렇게 둥글넙적하게 잘 다듬어 놓으면 동네 할매들이 꼭 한 마디씩 하시지.

“아이구우, 고것 참. 공단겉이 다듬었네.”

“꼭 갖고 놀고 싶제? 참하기도 깎았지럴.”

영석이네 울타리는 나지막하니 길기도 길어. 살림이 포실해서 큰 기왓집에 집터도 아주 넓었거든. 그 긴 울타리를 따라 지나가면 재미난 일도 많아. 영석이 할매는 욕쟁이 싸움대장 영석이를 붙잡아 목욕시킬 때 마다 “욕 씻재이 욕 씻재이”하거든. 욕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우락부락한 영석이가 할매한테 붙잡혀서 때를 씻을 때는 순한 목매기송아지 같아. “욕 씻재이 욕 씻재이”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서 버름한 울타리 틈으로 빼꼼빼꼼 들여다 봐. 울타리 사이로 알른알른 아이들이 보이면 영석이는 주먹을 쳐들고 입을 움찔움찔해. 할매가 “욕 씻재이 욕 씻재이”하면서 또 때를 박박 밀면 쳐들었던 주먹도 튀어나온 입도 쑥 들어가 버려. 할매한테 붙잡혀서 얌전하게 때를 씻을 때는 영석이가 아주 다른 아이 같아.

영석이 엄마는 욕쟁이 싸움대장 영석이하고는 아주 달라. 정지에서 부침개를 부쳐 나오다가 울타리너머 지나가던 아이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손짓해서 불러. “할매 한 장 갖다 디리래이.” 하면서 부침개를 넘겨주시거나 “자아, 동생하고 먹어라.” 하고 밀떡도 하나 쥐어주고. 나즈막한 탱자나무 울타리 덕에 그렇게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찐 감자도 넘겨주고 옥수수도 넘겨주고 그랬지. 어떤 날은 나물을 데쳐서 헹구다가 한 좨기 짜서 넘겨주기도 해. 야야도 돌미나리 데친 걸 한 좨기 받아서 엄마한테 갖다 줬어. 집에서도 곧잘 해 먹던 돌미나리 나물이지만 그날따라 참 맛나게 먹었더랬어.

쿵킹이 아제네 텃밭도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렀어. 그 아제는 어찌나 ‘킁킁 쿵킁 쿵쿵’거리고 콧소리를 내고 다니는지 동네 어른들도 ‘쿵킹이’라 부르고 아이들도 쿵킹이 아제라 했어. 쿵킹이 아제는 볼 때마다 두 손을 허리 뒤로 둘러 뒷짐을 지고 ‘쿵킁 킁킁’ 하면서 밭장다리를 하고 걸어. 동네 개구쟁이들이 아제 뒤를 따라다니면서 ‘쿵킁 킁킁’ 흉내를 내곤 했어. 그런데 아제를 따라 해 보면 ‘쿵킁’하자마자 콧물이 튀어나와서 동무들이 배를 싸안고 웃어댔어. 쿵킹이 아제는 콧물 한 방울 없이 그렇게 ‘쿵킁 킁킁’소리를 잘 내는지 몰라.

아제한테는 ‘쿵킁 킁킁’말고 한 가지 버릇이 더 있어. 뒷짐을 지고 ‘쿵 킁킁 쿵쿵’하면서 고샅을 빠져나오다가 탱자나무 울타리 앞에만 오면 긴 가시를 하나 뚝 떼어서 이를 열심히 쑤셔. 탱자나무 가시로 이를 쑤시고, 코로는 ‘쿵킁 킁킁 쿵쿵’ 소리를 내면서 밭장다리를 하고 걷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 야야는 동무들이랑 모여 흉내 내기 놀이를 하면 쿵킹이 아제 흉내를 잘 내었어. 다른 사람 흉내를 내면 동무들이 잘 못 알아맞히는데 쿵킹이 아제 흉내는 열이면 열 번 다 알아맞히거든.

야야네 집 뒤에도 탱자나무 울타리를 했어. 야야 할매는 탱자나무 가시를 아주 영험이 있다고 믿었어. 야야가 머리가 아프고 배도 아프고 매시근하게 앓으면

“아이구우 이눔으 객구. 어데 붙을 데가 없어 우리 강생이한테 붙었노?”

할매는 당장에 비손을 하고 탱자나무 가지를 가시달린 채로 잘라다가 야야가 누운 방문 앞에 걸어 두어. 그러면 객귀가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나서 어서 낫는다는 거야.

하루는 자고 일어났더니 눈에 빨갛게 핏줄이 서고 눈알이 머들머들하게 아파. 먼저 일어나 마당에 섰던 할매가 눈을 슴벅거리는 야야를 보셨어.

“우리 강생이, 눈에 삼 적었네.”하더니, 야야 손을 잡고 탱자나무 울타리로 데리고 가. 탱자나무 가시를 하나 골라 따서

“이기 해가 뜨는 동쪽으로 난 가시다.”

“저어기 해 뜨는 쪽을 보고 섰거라. 어여 눈 감아봐라.”하더니 탱자나무 가시로 아픈 눈두덩이며 눈창을 살살 문질러 주시는 거야.

“옆도 보지 말고, 뒤도 보지 말고, 지나가는 사람도 보지 말고 앞만 보고 집에 가는 기다.”

할매가 일러 준대로 옆도 보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집에 오는데, 아무 데도 안 돌아보고 앞만 보고 가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어. 저 앞에서 옆집 아제가 출렁출렁 물이 넘치도록 물지게를 지고 걸어오는데 인사도 한 마디 안하고 고개를 외로 꼬고 지나쳤거든. “내 눈에 삼 적어서 비손했습니더.” 그 말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참 미안스러워. 아침마다 동네 청소를 돌던 애향단 동무들이 “야야!”하고 부르는데 눈길도 주지 않고 집으로 가는데 뒤가 막 당기는 거야.

“이 물에 눈 살살 씻고 이불 덮고 한 숨 더 푹 자거라. 씻은 디끼 낫을 끼다.”

할매는 소금물 바가지를 건네주면서도 탱자나무 가시 덕에 눈이 나을 거라고 했어.

부스럼이 곪아 고름집이 되어도 탱자나무 가시가 한 몫을 했어.

“한번만 따끔하면 된대이. 자아, 눈만 한번 꿈벅하면 된다카이.”

겁에 질려 누운 야야를 안심시키면서 할매는 탱자나무 가시를 코앞으로 끌어당겨 콧김을 한번 ‘힝’ 쏘는 거야. 그 가시로 고름집을 콕 찔러 터뜨려. 그렇게 고름을 짜 내면 세나는 일이 없어. 쇠붙이 바늘은 잘못 쓰면 바늘독이 올라 되레 고생을 하지만, 탱자나무 가시는 바늘독이 올라 세나는 일은 없거든.

논에서 오빠랑 고동을 많이 잡아오는 날은 고동국도 끓이고 삶아도 먹어. 탱자나무 가시는 바늘 대신 고동을 빼 먹는 데 그만이야. 식구 수대로 탱자나무 가시를 따다놓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고동을 빼 먹는 그 맛이란. 다 자란 뒤에도 고동을 볼 때마다 옹기종기 둘러앉은 식구들이 그리워져. 그러고는 금방 단단한 가시 잔뜩 달린 탱자나무 울타리가 그림처럼 떠올라.

야야네 학교도 뺑 둘러 탱자나무 울타리를 했어. 학교 탱자나무 울타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일 년 내내 아이들한테 온몸을 내어줘. 오월 쯤 탱자나무에 물이 탱탱하게 오르면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달라붙어. 제일 길고 굵은 가시를 골라 뚝 따서 뱅뱅 돌려가면서 살살 문지르면 질긴 겉껍질이 가시 모양 그대로 옷을 벗어. 쏙 빠져나온 매끄럽고 하얀 가시 골갱이와 푸른 겉껍질은 그대로 칼과 칼집이 되거든.

“나는 열녀 장명숙이다. 내 꺼는 은장도다. 이놈,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흐윽”

은장도 놀이를 하는가 하면

“에잇, 받아라. 아아니다, 니가 무신 죄가 있겠느냐. 죄라면 나라를 잃은 것이 죄지.”

제법 어른 흉내를 내면서 독립군 놀이도 했어. 손가락보다 짧은 가시칼을 가지고 말이지.

탱자나무 꽃이 피면 아이들은 또 울타리에 달려들어. 긴 가시를 하나 따고, 하얀 탱자꽃을 꿰어 달고 달리면 뱅글뱅글 뱅글 팔랑개비처럼 잘도 돌아가. 종이로 만든 팔랑개비를 돌리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어. 쉬는 시간이 끝 날 때까지 탱자꽃 팔랑개비를 돌리면서 숨이 차도록 달리고 놀지. 운동장이 좁다하고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 새 종이 울려. 가지고 놀던 탱자꽃 팔랑개비를 필통에 꽂아 두고 공부를 하는데 자꾸만 눈이 가는 거야.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팔랑개비가 한 바퀴 돌다가 멈췄다가 쉬엄쉬엄 돌아가거든. 그것까지 얼마나 꿈결 같은지.

꽃이 지고 콩알만한 탱자가 열리면 그때부터 탱자가 정말 좋은 놀잇감이야. 콩알 만할 때는 먹국놀이도 하고, 조금 크면 깔빼기(구슬치기)도 하고, 팔매치기도 하고. 그 뿐 아니야. 가을에 샛노랗게 익는 노란색 탱자도 냄새가 무척 좋아. 탱자가 익을 무렵이면 꽃보다 더 짙은  내음이 퍼져. 샛노랗게 익은 탱자가 조롱조롱 달린 걸 보면 마치 조그만 꽃등을 달아놓은 것 같아. 골목골목이 또 한 번 환해지지. 아이들은 노랗게 익는 탱자를 못 먹는 줄 알면서도 꼭 입에 넣고 깨물어 봐. 샛노란 탱자가 어찌나 먹음직스러운데 그걸 먹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거든. 탱자는 살짝 깨물기만 해도 몸서리칠 만큼 시어. 어른들은 약으로 두루 썼지만, 아이들은 날로 먹을 수 없어 참 아쉽기만 했어.

그런데 어느 날, 영석이네 아버지가 탱자나무 울타리를 베어내는 거야. 그렇게 공들여 깎아서 멋들어지게 가꾼 울타리를 말이야. 가만 보니 새마을 모자를 쓰고, 새마을 지도자 완장도 팔에 끼웠어. 영석이 아버지는 야야네 동네 이장이야.

“탱자나무 이거 자리만 너르기 차지하고 못 쓰겠구매. 이거 다 뽑아내고 보로꾸(블록) 담하믄 길이 얼매나 넓어지겠능교.”

“가시가 얼매나 센지 사람 다치고 고마 안 되겠습니더.”

“오미가미 사람들 다 들여다 비고. 병아리도 자꾸 잃어뿌리고 고마 보로꾸담이 제일입니더.”

“우리라고 언제꺼정 이래 살아가 되겠능교? 도시맨치로 깨끗하이 해놓고 살아야지예.”

면에서 나온 사람들도 마을길도 넓히고, 주택개량사업도 해서 농촌 환경을 개선한다고 했어. 영석이네가 먼저 탱자나무 울타리를 뽑더니 한 집 두 집 뽑아내기 시작했어. 동네에는 차츰차츰 높은 블록담이 늘어났지. 담장에는 알록달록 페인트도 칠했어. 골목도 조금 넓어졌어. 수채도 덮고 길바닥에도 시멘트를 덮어 발랐어. 그러고 좀 있으니 담장을 따라 살피꽃밭도 만들래. 블록담 아래로 또 블록을 나지막하게 쌓고 흙을 채워 꽃밭도 만들었어. 이름도 잘 모르는 서양 꽃씨를 나눠주면서 심으라는 거야.

쓸데없이 높아진 담장 때문에 이제는 영석이 엄마하고 눈길도 마주치지 못하게 되었어. 아침마다 야야를 설레게 하던 호랑나비도 못 보게 된 거지. 겨울 아침에 일어나면 돋을볕이 퍼지는 탱자나무 울타리로 포르르 포르르 무리지어 날아드는 멧새 떼. 재재굴 재재굴 지저귀다 와그르르 날아가는 수십 마리 참새 떼. 그 그림 같은 풍경도 사라졌지. 새마을 운동을 열심히 한 덕에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철마다 다른 모습으로 아이들과 함께하던 탱자나무 생울타리는 자취를 감추었어. 다행히 학교 울타리는 살아남았지만. 야야네 학교는 동네에서 뺑 둘러 논이고 밭이었거든.

‘아이구 벌써 서른 해도 훌쩍 넘어 지나갔어.’

‘여기가 영석이네 집이었는데. 아직도 이 집에 살고 있을랑가?’

오랜만에 찾은 고향마을을 들어서는데 들머리 영석이네 집부터 눈에 들어와.

‘영석이 엄마는 아직 살아계실까?’

‘이 블록담이 생기기 전에는 오며가며 눈만 마주쳐도 좋았는데.’

‘욕쟁이 영석이도 아직 이 집에서 사는강?’

높은 블록담을 넘어다보려고 까치발을 해도 집안은 넘어다 볼 수가 없어. 새마을 운동으로 새로 쌓아올린 블록담은 꺼무죽죽하게 빛이 바랬어. 영석이네 집 뿐 아니야. 집집마다 담이란 담이 꺼무죽죽해서 동네가 침침하고 스산해. 세월이 흘러흘러 서른 해가 넘어 지났으니 빛이 바랠 만도 하건만 야야 눈에는 자꾸만 흉물덩어리처럼 보여. 아련하게 떠오르는 탱자나무가 자꾸만 그리워져.

‘이맘때면 야들야들 반짝이는 연둣빛 이파리하고 하얀 탱자꽃이 눈부셨는데.’

‘온 동네가 환했지. 꽃내음은 또 얼마나 향긋하게?’

야야 머릿속에는 온갖 가지 생각이 다 일어. 호랑나비를 보고 설레던 일, 탱자나무 가시로 고동 파먹던 오빠들과 탱자꽃 팔랑개비까지.

알록달록 페인트를 칠했던 블록담은 하나같이 꺼무죽죽하고 그 아래로 만들었던 살피꽃밭도 이미 없어진 지 오랜 듯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어. 울타리 아래 모여 오구작작 떠들던 아이들도 없으니 동네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해. 어릴 때 수십 번도 더 오가던 골목길을 쓸쓸하게 걸어 학동아제집 텃밭까지 왔어.

“학동아제 맞지예?”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아제는 분명 학동아제야. 머리도 하얗게 세었고 허리는 굽었지만 그 옛날 학동아제가 맞아. 젊었을 때부터 선비라고 불리던 아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뉘신교?”

멀어서 잘 못 알아보신 걸까? 아제는 허리를 두드리면서 일어나 한참 건너다 보셔.

“아제, 야얍니더. 뒷집에 참산띠기 딸.”

“아이구 우리 박 선생님. 박 선생님이 오셨능교? 어서 오이소! 박 선생님.”

학동아제는 팔순이 되어가면서도 야야를 이렇게 불러. 야야가 스물 서넛에 선생이 되었을 때부터. 야야가 태어나기 전부터 앞뒷집에 살면서 야야 아버지랑 너나들이로 살았는데도 말이야. 어릴 때부터 영 매시근하던 동무 딸이 실하게 자라서 학교 선생까지 하는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우신 거지. 야야는 학동아제가 ‘박 선생님, 우리 박 선생님’ 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져. ‘이 분들 사랑으로 내가 이만큼 자랐구나.’ 싶어서.

“아제도 참. 고마 야야지, 박 선생이 뭡니꺼예. 부끄럽구로. 고마 야야라 카이소, 인자.”

“아이지. 인자 야야가 아이고 박 선생님이제.”

“뭘 그래 심어놓고 보십니꺼? 아제는 힘도 좋으시네. 인자 고마 아아들한테 맡기고 쉬어야지예.”

“좀 있으면 안 쉬고 싶어도 원 없이 쉴 낀데. 몸 꿈쩍거릴만할 때 꺼정 꿈쩍거려야지.”

학동아제는 대꾸를 하면서도 인제 갓 올라오기 시작하는 작은 풀을 자꾸 뽑아 들어.

“뭘 심었습니꺼? 엄머야, 그거 탱자나무 아입니꺼?”

야야는 탱자나무 모종을 한 눈에 알아보았어.

“그러키. 작년에 모종을 부었더마는 에북 컸어. 저 짝에 심을라꼬.”

학동아제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아제집 대문 옆으로 담장이 제법 허물어져 있어. 아제집도 새마을 운동할 때 블록담으로 바꾸었거든.

“저기 와 저래 넘어갔을까예?”

“저기 원래 힘이 없다. 경운기 궁디이만 시부직이 갖다 대도 엉그름이 가고, 황소가 들이받아도 넘어가고 그란다.”

탱자나무 울타리 대신 우뚝 세워진 블록담은 그렇게 힘도 못 쓰면서 동네만 을씨년스럽게 만들어 놓은 거야.

“이기 울타리 구실 할라카면 몇 년은 기다리야 되겠네에. 씨는 어데서 났습니꺼?”

“그래도 이기 제일이다. 저 놈으 것은 날이 갈수록 비기 싫지만 이거는 안 그렇다. 해가 가면 갈수록 실해지지. 바람이 숭숭 들고나지. 그러니 여름에 시원하지. 꽃 피제 열매 달리제. 돈 안 들제. 학교 울타리 밑에 가서 몇 바가지 주워왔더마는 이러키 많이 났네.”

야야는 학동아제 말을 들으니 마치 동네가 다시 환하게 살아나는 것 같은 거야.

“탱자나무 울타리만한 기 없지럴. 안 뭉개지지. 보기 좋지, 시원하지. 요새는 짐승보다 차가 무섭거든. 탱자나무 울타리를 해 보래이. 차들이 지 알아서 조심하지. 우야다가 와서 박아도 가지 몇 개 부러지면 그만이거든. 부러진 가지야 내년이면 새로 나서 자랄 끼고. 저놈으 보루꾸담은 돈 덩어리대이. 경운기고 트럭이고 지나가다 쿵 박아놓고 미안하다고 가는데, 동네 사람끼리 물리라마라 할 수도 없고. 벌씨로 담장 새로 올린 기 몇 번 된다.”

아제는 자꾸만자꾸만 야야를 감동시켜. 야야는 먹먹한 가슴으로 아제를 보고 섰기만 해. 아무 말도 못하고.

“아제 말씀이 맞습니더. 그 좋은 거를 백지로 뽑으라 캐가. 지가 봐도예, 온 동네가 꺼무죽죽한 기 보기도 안 됐네예.”

“그러키. 그거 없앤 거는 잘못해도 참 잘못 된 기라. 돈 들여 했으니 백지로 또 허물어버리고 새로 할 수도 없고. 저거 저거 뭉개진 거 저것도 애물단지다. 흙 맨치로 또 이개서 쓸 수도 없고. 갖다 내삐릴 데도 없다. 썩지도 않지럴.”

그러고 보니 대문 옆에 뭉개진 시멘트 블록덩이가 그냥 쌓여 있다.

“뭉개진 데라도 다시 생울타리로 하는 거는 참 잘했지 싶네예. 참말로 백지로 일을 이래 맨들었다 그지예? 옛날에는 와 그랬으꼬?”

“그러키. 책상물림으로 머리만 쓰는 사람들은 한 가지 배끼 모르는 기라. 아이믄 저거 일 아이라꼬 에멜무지로 하고 말기나. 저거가 여어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 알면 얼매나 안다꼬. 내사 지금도 농촌지도소 사람들 말 다 안 믿는대이. 저거가 머 안다꼬 우리를 지도하노? 뼈아프게 농사도 안 지어 본 놈들이. 그런 넘들 말 듣고 울타리 뽑아내고, 도랑마다 시멘트 바르고. 우리가 깨춤 춘기다.”

학동아제 말이 어찌 그리 눈물겨운지. 야야는 눈을 슴벅거리면서 먼데 하늘만 올려다보고 섰어.

“우리 박 선생님이 아아들 가르치는 거 보러 한번 가야 될 낀데. 우리 박 선생님은 아아들 잘 가르치제? 그렇지요? 어이 박 선생님.”

한참 동안이나 야야가 대꾸를 안 하니까 아제가 웃으면서 농을 걸어. 끝까지 ‘박 선생님, 박 선생님’ 하면서. 멋쩍고 부끄러워서 야야도 아제한테 농을 걸어.

“아아, 아제를 이번 국회위원으로 뽑아야 되는데. 국회에 가서 멍청한 국회의원 놈들 한 수 갈키줘야 되는데. 그지예? 몬 알아들으면 썩지도 않는 저어 저 시멘트 덩어리를 확 뿌리주면 좀 알랑강?”

학동아제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야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어. 탱자나무 울타리가 동네에 다시 살아날 것이니까. 저기 썩지도 않는 시멘트 덩어리가 선 자리에 탱자나무 생울타리가 조금씩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니까. ‘보기 좋다’, ‘실용이다’, ‘발전이다’, ‘경제를 살린다’면서 여기저기 파내고 허물고 그 자리에 들어오는 시멘트 덩어리들. 그것들을 대신해서 탱자나무 울타리가 다시 늘어나는 것이 기뻐. 탱자나무처럼 뽑히고 허물었던 우리 것들, 자연이 조금이라도 돌아오는 것 같지 않아? (200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