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회보 공부를 하고
7월 회보를 함께 읽으면서
옥진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옥진이도 마음이 아플 텐데, 정희랑 태희도 옥진이 돕느라 공부방에 오지 못하는데, 밀양가면서 알았지만 살구도 경숙이도 오지 못한다는데, 이래저래 못 오는 사람도 많고, 마음도 무겁고 해서 공부를 해야 하나, 한번 건너뛸까, 마음도 무거운데 모여 서로 위로가 되지 않을까나, 생각은 끝도 없이 일어났지만 결국은 “그래, 공부하자. 모여서 우리끼리 서로 위로하고 위로 받자. 옥진이도 그 기운 받겠지.” 그러면서 우리끼리 공부했습니다.
소눈, 일하는 소, 샘돌, 숙미, 영자, 경해, 야야 이렇게 수연재에 둘러 앉아 밤늦도록 공부했습니다. 식구들 많이 올 줄 알고 소눈이 맛있는 알밤도 많이 주워놨더라고요.
7월 회보에서 몇 꼭지 골라서 이야기 하고, 영자언니가 써온 시 공부하고, 공부하다가 이런저런 이야기에 덧붙여 서로에게 해줄 말도 해주고 그랬어요. 밖이 조용하고 촉촉하기도 했지만 동무들이 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차악 가라앉으면서 젖어들었습니다.
샘돌도 아이들 지도한 글을 써 오고, 숙미도 써 왔는데 그 좋은 공부를 우리끼리 다 하기 아까워서, 다음 모임에서 식구들이 더 많을 때 함께 공부하려고 남겨 두었습니다. 스스로 공부거리를 들고 오는 사람들이 있어 일하는 소가 더 좋았겠지요? 지 말 잘 들어줘서.
모임이야기나 회보 공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아우들이 하도록 맡겨두고 있었던 것이 어느 날 문득 미안하더라고요. 그래 이번에는 내가 한번 해볼게 하고 나섰는데, 그거 정리하는 거 참 어렵네요. 그동안 아우들이 참 욕봤더라. 나도 옛날에 좀 했던 것 같은데 이거 이거 쉬운 일이 아니라요.
<아이들 글 보기>
아이들의 생각과 느낌 (이호철)
이 꼭지는 우리 회보에서 중요한 꼭지이고, 또 우리도 함께 공부해야겠다 싶어 이 꼭지부터 함께 공부했습니다.
김지영의 <집에 오는 길에서>를 읽고 이호철 선생님이 <‘홍시가 주렁주렁 열리면 따먹을텐데’ 하는 말에서 ‘따먹을텐데’ 이 말이 마음에 조금 걸리기도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감홍시를 못 따먹어 아까워하는 모습으로만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영이의 마음은 그게 아니겠지만 말이다.> 하고 짚어 주셨는데 우리들도 참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시 쓰기 공부를 하다 이런 글이 나오면 함께 읽고 지도를 해서 아이더러 고쳐 써 보게 할 수도 있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은희 <고양이>를 읽고 <은희의 시에서 새끼고양이는 어떤 모습인지, 없는 발은 어느 발인지, 떨어질 듯 떨어질 듯 걸어가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절뚝거리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이런 점이 좀더 또렷하게 드러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에서 누가 그랬습니다. “모든 시에서 이렇게 해야 하나?”
함께 이야기 하면서,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또렷하게 밝혀 써야할 것이나, 또렷이 쓰면 더 좋을 것도 있는데 아이들이 뭉뚱거려 쓸 때는 이렇게 이호철 선생님처럼 짚어줘서 스스로 고쳐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했습니다.
<아이들 글 보기> 뒷부분에 생리현상을 쓴 시를 몇 편 들어주셨는데, 학교 이름으로 보아 이호철 선생님 반 아이들 글이라 짐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옛날에 부림 학교 아이들 글 지도하셨을 때 보다 맛이 안 난다’
‘세월이 갈수록 아이들 글이 그렇지 않겠나’ 하는 이야기도 하고,
‘생리현상을 쓴 글만 따 오다 보니 맛이 덜할 수도 있겠다’ 했습니다. 이쨌든 이런 글감은 한번쯤은 써 볼만하지 여러 번 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했습니다.
이번 호에 쓰신 것처럼 이렇게 쭈욱 썼으면 좋겠다, 아아 이런 글을 보니까 이오덕 선생님께서 짚어주시던 거랑, 그런 글맛이 그립네 하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함께 이 일을 해 보자, 글을 한 편씩이라도 보고 <아이들 글 보기> 글을 써 오자, 꼭 회보에 싣는 것은 아니지만 다함께 볼 글이라 생각하고 진지하게, 열심히 하자 하고 마무리 했습니다.
모두들 다음 공부 때는 <아이들 글 보기>.도 한편씩 써 와서 공부합시다. ^.^
<회보를 읽고>
하늘나라 권정생 선생님이 이 두 글을 읽으신다면 (김종만)
먼저,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떠올랐던 생각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서정홍 선생님의 글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쓰면 되지, 다른 분을 끌어다가 ‘그 분도 안 좋다고 할 것이다’ 하는 마음을 바탕에 깔고 쓰는 듯해서 마음에 걸렸습니다. 또 살아계셔서 그분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분도 아니고, 이미 돌아가신 분을, 많은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고 따르는 분을 이렇게 끌어다 대는 것은 권정생 선생님에 예의도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김종만 선생님이 서정홍 선생님의 글을 읽고 짚은 것을 천천히 읽어보면 선생님이 무엇을 짚으려고 한 것인지, 어떤 부분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는 짐작이 갑니다. 또 그렇게 짚으려고 하는 부분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김종만 선생님이 쓴 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습니다.
<어이쿠! 난 여태껏 하루 일이 끝나면 힘들어서 세상 귀찮가만 하던데. 패랭이꽃은커녕 예쁜 여자도 반갑지 않던데. 늙고 병든 농부들의 거친 숨소리가 아름답다고? 내가 못살아!>
서정홍 선생님처럼 농사를 짓고 사는 소눈은 ‘하루 종일 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힘은 들었지만 오늘은 이만큼 일했구나,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올 때면 작은 꽃 하나도 반갑게 보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 느끼는 것이나 무엇을 보고 예쁘다, 반갑다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데, 자기 기준으로 이렇게 이야기할 것은 못된다 싶습니다.
<우선 내가 경험한 돼지 잡는 마을 풍경하고 많이 다르다. 돼지 멱 따는 데는 긴 칼이 아니라 날선 창칼로 목줄기 가운데를 베면서 울대를 단숨에 끊어 놓는다. 긴 칼을 푹 박지 않는다.
그리고 멱을 따자마자 곁에서 누군가가 양푼 같은 큰 그릇을 들이 밀어 선지를 받는다. 옛날에는 선지를 대접에 받아 마을 남정네들이 꿀꺽꿀꺽 마시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이것도 보기 힘든 풍경이다. 결코 붉은 피가 마당을 피 칠갑하며 적시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건 고기가 지천인 서양 사람들이나 하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풍습에는 짐승을 잡아먹을 때 피 한 방울 고깃살 한 점 버리는 일이 없다.>
자기가 경험한 것만 바탕으로 그것을 잣대 삼아 진정성이냐 정확성이냐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또 돼지 잡는 것도 지방이나 마을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서정홍 선생님의 글도 말장난이나 언어유희처럼 생각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글의 진정성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지요. 그런 점을 짚으려는 김종만 선생님의 뜻은 전해집니다. 그런데 김종만 선생님의 글도 산만하고, 글쓴이가 쓴 것을 넘어 넘치게 비약해서 앞서가는 것도 있어 공감이 잘 안된다 싶습니다.
그렇다면 서정홍 글에서 무엇을 비판할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데, 그 생활을 글로 쓴 것인데 왜 감동이 적을까?
함께 생각해 보았는데, 서정홍 선생님의 글을 보면 자기를 너무 드러내려 해서 감동이 덜한 것 같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느낀 것을 모두 드러내려고 하니 감동이 죽는 것이지요.
<서정홍씨 글은 대개 단순 명쾌한데 이번 6월호에는 멋을 부려도 너무 부렸다. 그런다고 농사일지가 별것이라도 될 것 마냥.>
이 점은 잘 짚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쓰는 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글을 읽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나하나 짚어서 근거를 대어 짚었으면 좋겠지요.
<더구나 앞의 시골의사가 쓴 글에 견줄 때 진정성이나 정확성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1)의사도 바쁘지만 농사꾼도 바쁘다. 그러니 농사꾼은 글을 쓸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글 농사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일지란 철저하게 서사문 형식을 굳게 지켜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싣기 전에 편집부에서 논의를 거쳤는지 묻고 싶다. (2)자칫 유명짜한 글쓴이의 글을 소홀하게 다루어 실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김종만 선생님이 서정홍 선생님의 글을 “아니라”고 본 것은 잘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글을 풀어가는 것이 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진정성이 떨어지는 것, 말장난이라 생각되는 것, 멋부린 글을 하나하나 짚어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싶어요.
그리고 줄친 (1)처럼 앞뒤가 잘 맞지 않고 억지스런 곳에서는 김종만 선생님의 마음을 따라가다가 자꾸 걸리기도 합니다.
줄친(2)에서 짚으신 것처럼 서정홍 선생님의 귀농이야기 꼭지가 이렇게 오래 연재되는 것도 마음에 좀 걸립니다.
<나는 요즈음 어떤 글을 읽으면서 이 글을 이오덕 선생님이나 권정생 선생님이 읽으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하고 스스로 묻는다. 이 두 글을 권정생 선생님이 읽으신다면?>
이 부분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스개 소리였지만, 아마 두 분이라면 “종만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니?” 했을 것 같다고 하면서 이런 점도 많이 걸렸습니다. 처음에 제목을 보고 들었던 생각이나 같아서 더 쓰지는 않습니다.
이 글을 공부하고 생각들을 말했습니다.
글쓰기 지도사례, 비평글, 아이들 글 보기, 지난회보를 읽고, 귀농이야기 같은 꼭지는 글쓰기 정신에 어긋나면 분명하게 짚고, 가려서 실어야 회보의 중심이 잡힌다고 생각합니다.
회보를 엮을 때, 편집부에서는 들어오는 원고를 모아서 엮어내는 일만이 아니라 글쓰기 정신을 생각하며 원고를 살피고 짚어야지 싶습니다. 물론 편집부만이 아니라 회를 꾸리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해야 할 일이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나 새내기 마당은 글쓴이가 쓴 대로 실어서 함께 생각을 나눌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글도 ‘지난 회보를 읽고’ 같은 꼭지에서 짚어주거나 이야기할 것은 이야기 해야 한다 싶습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은주 이야기 (김영수)
먼저 은주이름을 ‘만든 이름’ 이라 썼는데, 흔히 쓰는 가명이란 말보다 좋다고 여겼습니다.
<“은주야, 나는 민지(맞은 아이-만든 이름) (1)때린 것을 왜 그랬냐고는 안 묻겠다. 사람이 사람을 때린다는 건 분명히 잘못이지만 니가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아마 니 속에 있는 어떤 한 부분, 니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을 민지가 건든 거겠지. 그렇지만 니 속에 있는 통제할 수 없는 그 마음도 니 마음이다. 그걸 니가 감당을 못했으니 그 결과에 대해선 니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니가 자꾸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화가 자꾸 나는 걸 내가 가만 생각해보니 진학에 대한 스트레스가 큰 거 같은데 이번 일 정리되고 나면 형편에 맞는 학교를 좀 알아보자. 어떻노?”>
줄친 (1)에서 ‘안 묻겠다’ 할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지, 아이 말을 다 들어주고 맺힌 것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줄친 (2)에서도 그냥 읽으면 멋지게 들리지만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아이가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듣겠나 싶고요.
이 글을 읽으면서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풀어주는 과정이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풀어가는 과정이 없고, 선생님이 아이를 설득하는 말만 하려하고 아이와 주고받는 교감이 없어서 안타까웠어요.
글을 읽어가면서 어떻게 풀어갈지 기대되었는데 너무 쉽게 끝이 나 버렸어요. 그래서 풀어가는 과정이 정말 아쉽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를 알려고 하는 노력 그러니까 부모를 만난다거나, 아이와 깊이 있게 이야기를 해 본다거나 하는 노력이 안 보여서요.
끝부분에 <그래서 은주가 좋아하는 네일 아트나 메이크업에 관한 정보를 모아볼 생각입니다.> 했는데 교사가 아이에게 끝없이 해주어야한다는 생각이 앞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교사가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 볼 수 있게 해 줘야지. 스스로 몸으로 부딪혀서 해 보아야지 싶어요. 말로써 가르치고 감화를 주려는 것은 너무 쉽게 먹으려는 것 아닐까요?
<새내기 마당>
현진이가 그린 무궁화 (이희진)
새내기 선생님의 이런 글을 읽고는 근본 태도나 정신, 이런 것들을 오래된 회원이 짚어주어야 한다 싶어 이 글을 읽고 이야기 했습니다. ‘무궁화 그리기 대회’ 같은 것은 당연히 하는 것이려니, 이런 대회에 대한 근본 고민이 없는 것이 안타깝지요.
이런 대회를 하라고 했을 때, 혼자서 안 할 수는 없는 현실이라 해도 문제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현실에 잘 순응해 가는 모습도 함께 떠오르면서 걱정을 좀 했습니다.
‘무궁화 그리기 대회’ 는 왜 하는 것인가, 나라사랑의 마음을 길러주려고?
무궁화를 베껴 그리면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길러지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주려면 이 방법 밖에 없을까?
꼭 무궁화 그리기를 해야 한다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어떻게 하면 무궁화를 더 알게 할까?
한번쯤이라도 무궁화를 마음에 새겨보게 하려면?
우리 꽃 무궁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할까? 그런 마음은 어떻게 심어줄까?
나는 우리반 아이들과 ‘무궁화 그리기 대회’ 를 어떻게 해볼까?
이런 생각뿐 아니라 수많은 생각이 떠오를 것인데, 아무런 고민 없이 무궁화 그림을 그리다 보니 힘들어하는 현진이를 구슬려가며 억지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억지 성과를 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샘돌도 학교에서 ‘무궁화 그리기 대회’를 한다고 했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회를 하긴 했지만, 일본 강점기에 우리나라가 겪었던 이야기나 그 시절에 무궁화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어 아이들이 무궁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들도록 먼저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뒤에 세밀화로 그린 무궁화도 보여주고 여러 가지 무궁화 그림, 여러 곳에 핀 무궁화를 보여주어 그리게 한다면 아이들이 적어도 우리가 왜 무궁화를 그려보는지는 알 수 있겠지요.
물론 자연에 나가서 몸으로 겪고, 무궁화를 더 잘 알아보는 활동을 먼저 하고 난 뒤에 하면 더욱 좋겠지만 이희진 선생님 글에서처럼 무궁화가 피는 계절도 아니고, 또 무궁화 보기가 어려운 곳이라면 하는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인터넷이나 사진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보여주고 따라 그려보게 하는 것은 좀 아니라 싶습니다.
이 글에서 보는 현진이 같은 경우라면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그림을 그리게 해서 성취감을 맛보게 할 수도 있는데 굳이 무궁화를 그리게 끌고 가는 것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무궁화 그리기로 시작해서 현진이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풀어간 것은 좋은데 무궁화에 집착해서 끝까지 그리게 하는 것이 아무래도 걸립니다.
<이렇게 꽃만 그려놓고 보니 현진이가 더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꽃만 그려도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 현진이가 꽃을 잘 칠했다.
“이야! 정말 잘했네. 그럼 이제 줄기랑 잎도 그려보자.”
“어…… 어려운데. 안 할래요.”
현진이는 쉽게 포기하려고 했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화를 내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욕심에 아이를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새내기 교사들의 포기할 줄 모르는 애살이 보이기도 합니다. 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좀처럼 뒤지지 않았던 요즘 새내기 교사들의 욕심이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진득하게 끝까지 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좋지만 끝까지 교사 중심이었다는 것, 자기 방식에 끌어넣고 그걸 성과라 생각하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 싶습니다.
줄친 부분처럼 끝까지 꼭 이루어야할 그 어떤 것이 집념인지, 집착인지, 자기 욕심인지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현진이가 화가 난 까닭을 이야기해서 풀고 나가야지, 여기서는 현진이가 화난 까닭은 접어두고 그림 그리는 것으로 관심을 돌려 잘 마무리해 나갔다는 것 뿐입니다.
<이제 넉 달 정도 현진이와 지내오면서 현진이가 왜 화를 내는지 화가 났을 때 현진이가 무슨 생각을 할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 현진이 이야기를 풀고 싶으면 이런 이야기를 좀 썼으면 좋았을텐데, 이 글만 읽어서는 알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무궁화를 그리던 그 날도 무궁화를 못 그리겠다고 버티고 있던 현진이에게 왜 안 그리냐고 나도 똑같이 화를 내고 혼을 냈다면 이렇게 현진이가 상을 받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현진이 속마음을 헤아려 주고 현진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먼저 알아주고 잘 이끌어 주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겠지.>
줄친 (1)에서 처럼, 교사가 이러해야한다는 욕심이 앞서면 아이를 있는 그대로 혹은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고 기다리지 포기하지 못하고 억지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를 힘들게 할 수도 있겠지요.
교사가 늘 먼저 알아주고 잘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어찌 보면 교사는 이러해야한다는 것도 고정관념 아닐까요? 그저 좀 편안하게 보면서 기다려주고 들어주고 옆에서 조금 거들어주는 것이 좋을 때도 있지 않을까요? (정리 야야) 2007. 9. 13 . 부산글쓰기회 카페에서
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