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권정생 김수업 선생님

학대받는 생명에 대한 사랑 / 이오덕

야야선미 2007. 8. 23. 16:17

학대받는 생명에 대한 사랑   -권정생 씨의 동화에 대하여- / 이오덕

 

  동화라면 으레 천사 같은 아이들이 나오고, 그 아이들이 꿈꾸는 무지개 같은 세계가 펼쳐지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이들에게 권정생 씨의 작품은 확실히 하나의 이변이며 충격일 것 같다. 이 동화에는 천사는 물론이고, 옷, 밥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니는 행복한 아이들도 안 나온다. 아이들보다 사람들에게 학대받는 짐승이나 곤충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도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모기라든가, 지렁이, 구렁이 파리 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 흉악한 냄새가 나는 시궁창에 버려진 똘배, 사람들에게 뜯어 먹히는 물고기, 강아지의 동, 사냥당하는 산짐승……. 이런 미움받고, 버림당하고, 짓밟히고, 희생되는 목숨들의 얘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넥타이 매고 점잔을 빼며 살아가는 세상의 신사 숙녀들이 보면 침이라도 퇴퇴 뱉고 지나가 버릴 듯한 가련한 목숨들의 세계를 찾아가 그들을 부둥켜 안고 뜨거운 눈물과 무한한 사랑을 쏟는 것이 작가의 세계다. 이리하여 지옥의 밑바닥 같은 암흑의 셰계는 비로소 한 줄기 따뜻한 등잔불 같은 빛을 받게 된다. 일찍이 우리 아동 문학사에서 어느 작가도 그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시궁창에 버려져 짓밟힌 목숨들의 세계가 실은 가장 인간스런 세계요,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임을 그는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사랑은 드디어 죽음이란 운명까지도 눈물겨운 부활의 의지로 이겨내는 것임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가가 보여주는 부활은 소박한 현세 부정의 속임수 같은 그것이 아니고, 삶을 긍정하는 보다 폭 넓고 깊은 신앙에서 오는 것 같다. 동화란 것이 왜 이 모양으로 슬프기만 한가. 아이들에게는 명랑한 것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유행적인 타령을 하는 사람이 응당 있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권정생 씨의 동화는 행복한 아이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불행한 아이들에게는 불행한 얘기만이 위안을 주고, 희망을 주고, 때로는 용기까지 줄 수 있다는 것, 불행한 이들에게 행복한 얘기를 들려주는 것은 그들의 불행을 더 한층 기막힌 불행으로 느끼게 하는 잔인한 짓이 된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괴로워하는 것이 종교요, 정치요, 문학이다. 그런데 불행한 목숨만 있는 땅에서 권정생 씨는 백 마리의 양을 다 끌어안고 구원받을 가나안을 찾아 헤매고 있다. 병들고 신음하는 목숨들만을 생각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로 그 누구보다도 건강한 인간정신과 작가정신을 가졌기 때문인 것이다.
  작가의 이런 뭇생명에 대한 사랑은 또한 그것이 결코 값싼 인도주의적인 감상에서 온 것이 아님을 말해두고 싶다. 바르고 착한 것이 항상 불의와 부저에 패배하는 현실에서, 아무리 약한 목숨이라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고, 미워할 것을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그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이 만만찮은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건전한 상황의식은 그의 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동물이나 곤충 초목이 아닌 바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 <무명저고리와 엄마>에서는 우리 아동 문학에서는 극히 희귀하다 할 수 잇는 역사적 리얼리티를 획득한 작품으로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남쇠와 파란 눈의 아이>는 상징적 수법으로서 역사적 상황과 슬기로운 삶의 자세를 탐구한 역작이다.
  그러나 지금 권정생 씨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음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무서운 고독과 육체적 고통 속에 초인적인 노력으로 생명의 불꽃을 마지막까지 태우려고 하고 있는 중이다. 조국의 불행을 한 몸에 안은 듯한 리 작가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학대받는 가련한 생명들을 버리고 차마 혼자 떠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강아지의 똥이 환한 민들레꽃으로 다시 살아나듯, 이 땅을 위해 바친 그의 생명이 그가 사랑한 조국의 수많은 어린이들의 넋 속에 들어가 길이길 빛나게 살아 있을 것이란 것을 그 누가 의심하겠는가. 부디 이 괴로운 세상일지라도 좀더 많은 날을 살아서 더 많은 작품들을 남겨 주었으면 하고 빌 뿐이다.  - 『무명저고리와 엄마 (다리, 1994)』에 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