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권정생 선생님

『몽실 언니』

야야선미 2007. 9. 19. 16:18

『몽실 언니』
 

 (창작과 비평사, 1984) 머리말

가끔 운동장이나 골목길에서 조그만 아이들에게 큰 아이들이 싸움을 시키는 것을 봅니다.  뒤에서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자꾸 이간질하고 부추겨서 결국 치고 받고 싸우게 만듭니다. 그럴 땐, 싸우는 아이들보다 뒤에서 싸움을 시키는 아이들이 얄밉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물건이나 돈을 훔친 사람을 '도둑놈'이라고 부르며 욕을 합니다.  아 책에 나오는 몽실이라는 주인공도 한쪽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된 것을 아이들이 놀려 줍니다.  몽실은 자기가 절름발이가 되고 싶어 일부러 다친 것도 아닌데, 결국은 남의 놀림감이 되는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의 것을 훔친 사람도 일부러 도둑이 되고 싶어 훔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괴로운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작은 아이들을 큰 아이들이 싸움을 시키듯이, 도둑질도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일을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까닭은 덮어놓고 도둑놈만 나쁘다고 욕하고 벌을 줍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몽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한 것과 나쁜 것을 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딴 데 시집을 간 어머니도 나쁘다 않고 용서합니다.  검둥이 아기를 버린 어머니를 사람들이 욕을 할 때도 몽실은 그 욕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나무랍니다.
  몽실은 아주 조그만 불행도, 그 뒤에 아주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실은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자라나면서 몸소 겪기도 하고 이웃 어른들에게 배우면서 참과 거짓을 깨닫게 됩니다.
  아주 조그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 몽실 언니한테서 그 조그마한 것이라도 배웠으면 합니다.
  몽실 언니는 제가 너무도 어렵게 쓴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쓴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끝까지 읽어 주셔요. (1984년 4월 지은이)

 

 

 ■개정판을 내면서 

오늘 아침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바로 이웃 나라 중국에서 열 여섯 살 고등학생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십 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다그치자 화가 난 아들이 굵은 막대기로 어머니의 정수리를 내리쳐서 숨지게 했다는군요. 언제나 ‘천천히’ 하면서 느긋하게 살아가던 중국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요?
   옛날 어린 시절, 일본 토오꾜오 시부야의 변두리 동네 아이들이 조그만 흙 무더기나 언덕배기에 올라가 부르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산꼭대기 대장은 나 하나뿐이다.
   뒤에 올라오는 놈은 차 던져 버려라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노래군요. 육십 년이 지난 지금, 일본 아이들이 아직도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요? 
  《몽실 언니》는 1981년 울진에 있는 조그만 시골 교회 청년회지에 연재를 시작해서 3회쯤 쓰다가 《새가정》이라는 교회 여성잡지에 옮겨 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열 번째 꼭지까지 썼을 때 갑자기 연재가 중단되었습니다. 두 달을 쉬고 나서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용은 아홉 번째와 열 번째 꼭지에 나오는 인민군 이야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이상 잡지에 싣지 못하게 한 것을, 앞으로 잘못 쓴 것은 모두 지울 테니까 계속 연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문화공보부에 사정을 해서 겨우 허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열 한 번째 꼭지는 원고지 열 장 분량이 잘려 나간 채 연재가 되었습니다. 잘려 나간 부분의 내용은 인민군 청년 박동식이 몽실이를 찾아와 통일이 되면 서로 편지를 하자고 주소를 적어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자 그 뒤부터는 이야기 줄거리까지 조금씩 고쳐 써야만 했습니다. 박동식이 후퇴를 하다가 길이 막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와 빨치산이 된 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몽실이한테 보낸 편지엔 이런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몽실아, 남과 북은 절대 적이 아니야. 지금 우리는 모두가 잘못하고 있구나……"
  몽실이가 편지를 받아 읽고 나서 주저앉아 흐느끼면서 최금순 언니, 박동식 오빠를 부르는 대목도 모두 지워야 했습니다. 그러고는 난남이를 양녀로 보내고 나서 삼십 년을 훌쩍 건너뛰어 부랴부랴 이야기를 끝내야만 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1천장 분량으로 쓰려고 했는데 겨우 7백장으로 끝을 맺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창작과비평사에서 개정판을 낸다는 연락을 받고 지워져 나간 모든 장면을 다시 살려보려고 했지만, 그동안 많은 독자들이 읽었고 이제 와서 고치는 것도 별로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런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이 책을 읽는 여러 독자의 이해를 얻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단기 4333년 3월 1일 권정생 씀


 ■작가의 말

 1923년 무서운 관동지진이 덮쳤을 때 조선 사람 대략 5천 명이 죽었다고 했다.
   영순이 누나는 그때 갓난아기로 혼자 살아남아 친척 되는 아주머니 손에서 자랐다. 1944년까지 우리 식구는 토오꾜오의 시부야 변두리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 스무살이나 다 된 영순이 누나는 우리 집에 가끔 놀러왔는데 덩치만 커다랬지 아직 열다섯 살 어린애 같았다. 겨울이면 얼어터진 손등을 우리 어머니께 내밀며 질금질금 울기도 잘했다. 그 누나를 마지막 본 것은 해방이 된 뒤 청송 어느 국밥집 부엌데기로 일할 때였다.
   빨치산이었던 춘자네 아버지는 경찰에 끌려가 죽고 집안은 온통 난리가 아니었다. 장독대가 모두 깨지고 세간이 불태워지고, 할머니는 넋이 나간 듯이 먼산만 바라보시다가 돌아가셨다. 춘자가 세 살때 엄마는 춘자를 데리고 어디론가 멀리 떠났다.
   6·25때 송서방 아저씨는 인민군 부역자라고 해서 너무 많이 두들겨맞아 미쳐서 발가벗은 채 온동네를 뛰어다니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대추나무옥분네도, 큰우물집 인수네도 모두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학교에서 가르쳐준 대로 나도 반공주의자였다. 그러다 60년대가 되면서 차츰 생각이 달라졌다. 반공도 용공도 아닌, 다른 무엇인가 고약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 영순이 생각, 송씨 아저씨 생각, 춘자랑 인수, 옥분이, 그애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두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 『몽실언니』를 쓰면서 나도 많이 울었다.
   어쩌면 이 작은 이야기가 통일의 밑거름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고통스럽게 살아온 전쟁의 어린이들에게 조금 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싶었다.

2001년 육이오 쉰한돌에
                권정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