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읊어주는 동무들 - 진안가는 길
오랜만에 글쓰기공부방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새롭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자마자 역으로 달려가서 헐레벌떡 기차에 몸을 실었던 옛일도 행복한 시간으로 떠오르고, 저녁 으스름쯤에 하나둘 모여들던 옛동무들, 늘 반갑고 든든하던 이무기 언니오빠들, 그 누구보다 보고싶은 얼굴 이오덕 선생님.
그때 그 얼굴들도 볼 수 없고, 이오덕 선생님은 다시 뵐 수 없는 길을 떠나셨지만 오랜만에 글쓰기동무들과 하룻밤 공부방을 열게 된 것,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공부방 자료집 원고를 보면서, 눈물이 핑 돈다. 저마다 써 온 글을 수줍께 꺼내들고 밤이 이슥해지도록 글 읽고 이야기 나누던 무너미 공부방,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귀기울여듣던 이오덕 선생님 말씀. 설거지 끝내고 냄비 들고 바가지 들고 놀던 부엌도 살아난다.
그 공부방에 다시 둘러앉아 공부할 날이 또 있을까? 고된 내 삶도 위로받고, 내 마음을 다독이고, 내 삶을 바로세울 수 있게 스스로 추스를 수 있는 힘을 얻어올 그런 날이 있기나 할까. 가끔 글쓰기회를 생각하면 쓸쓸하고 아프기만 했다.
다시 우리끼리 작은 공부방을 시작하기로 했을 때 마음속에 작은 불씨같은 것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기뻤다. 공부방 자료집 원고를 읽기 시작하면서 그 기쁨이 점점 커지면서 설레고 눈물까지 핑 돈다. 글이 너무나 좋다. 아이 사람들이 좋아진다. 고맙다.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절망하고, 그렇지만 놓지도 못하고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제 속을 다 드러내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 그래서 더 가까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동무들. 참 고맙다. 요 몇 년 동안 회보에서 볼 수 없었던 좋은 글이 여기로 다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다 만들어진 옹골찬 공부방 자료집을 들고 이제 진안 웅치골 공부방으로 간다. 여전히 토요일 네 시간 수업을 마치자마자 헐레벌떡 날아서 차 타러 간다. ‘내 지각 아이제?’ ‘어서 타라.’ 몇 해 만에 해 보는 이 짓거리도 즐겁다.
남강휴게소를 지나고 진주도 지나가고 전라도쪽으로 접어드니 눈발이 날린다. 작은 굴 하나를 지나니 산이고 들이고 하얗다. 벽 하나를 뚫고 온 천지가 바뀌는 환타지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일소, 눈이 내리니까 그 시 생각난다. 외워줘.”
“뭔 시?”
“그거 있다 아이가? 제목도 뭣도 모르겠노? 전에 눈 올 때 외워줬는데. 얼음판이 쩡쩡 어쩌고. 지금 딱 떠오르는 신데.”
“흐음, 그 시 제목이 천장호에서다.”
“천장호에서? 외워줘.”
“아~참, 생각이 잘 안 날낀데. 나희덕 신데, 그거 말고 다른 시 외워줄게.”
“해봐.”
‘일하는 소, 구자행’이 운전을 하면서 잠깐 시를 생각한다.
“백석 시. 아, 나는 백석이 좋데..”
“나도.” 옆에 앉은 경해가 거든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눈 내릴 때, 지금 딱 떠오르는 시다.”
“나타샤는 백석이 좋아하던 여자다. 자야라고. 그 좋아하던 여자와 멀리 떠나기로 했는데 백석만 가고, 그 사랑하던 여자는 안 떠났어. 그래 혼자 약속한 곳에 떠나와서 머물면서 쓴 시가 있지.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이라고.”
아는 것도 참 많아. 나중에 그 시 찾아 볼 거라고 수첩에 적어둔다.
일하는 소는 운전을 하면서, 눈 나리는 창밖을 구경하면서, 그러면서도 시를 맛있게 외운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듣는다. 아, 참 평화롭다. 지나치게 많이 나리지 않는 눈발, 함께 길을 떠난 동무들. 조용히 시를 외워주는 동무. 그리고 참 좋은 시. 이 길이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남편하고 떠나는 길은 편하고 행복하다. 그런데 이런 동무하고 떠나는 이 길은 그 여행길하고 아주 다른 행복이 있다. 시를 읊어주고, 눈 지긋이 감고 젖어들고.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는 백석.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고, 언제 벌써 고조곤히 와 앉을 나타샤. 먼 옛날의 절절한 사랑이 가슴을 파고 든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참, 나는 더러운 세상 버리지도 못하고 살고 있지.
" 제대로 외웠는가 모르겠다."
쑥스러운 게지.
"잘 외웠어요. 다 맞아요."
"맞아요? 경해도 이 시 다외우는가베,"
"그러믄요. 나도 백석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 김자야가 ‘내 사랑 백석’이라고 썼다. 참, 어제가 오늘이가, 한겨레에 책 소개해 놨던데 봤나?”
어느새 경해가 가방을 부시럭거리더니 한겨레 신문을 펴든다.
“백석 진짜 잘 생겼제?”
“꽃미남이다, 그자.”
이 나이되어서도 밤새 공부한다고 먼 길을 함께 떠나는 동무들, 그 차안에서 시를 외워주는 동무, 함께 고즈넉이 젖어들 수 있는 동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여럿 가운데 하나다. 창밖에 눈발이 날리지만, 차안은 이렇게 따뜻하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집에 와서 '천장호에서'를 찾아 본다. 백석시도 다시 찾아 조용히 외워본다. 옛날하고 달라서 몇번을 외워도 외워지지가 않는다. 잠깐 행복이 깨어진다.ㅠㅠ 찾아보니 '남신의주~'도 바른 제목이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이다. 제대로 듣는 것도 어려운 나이는 아직 아닌데.
천장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 신의주 남쪽 버드나무골 박시봉이라는 사람 집에서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슴> 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