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이 좋다 (하나, 백화주 이야기)
나는 술이 좋다 (하나, 백화주 이야기)
봄이다. 뒷산에 꽃이 피어 동네가 환하다. 진달래가 붉게 피었다 지더니, 산벚나무도 하얀 꽃잎을 흩날리고 섰다. 절집 마당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진분홍 박태기 꽃이 총총총 달렸다. 산허리 여기 저기 돌복숭아 꽃이 참 곱다. 허물어진 빈 집 담장 옆에 띄엄띄엄 서있는 살구나무, 배나무도 질세라 고요한 동네를 밝히고 있다. 좀 있으면 저기 우리들 그네 매어 뛰던 소나무 아래로 붉디붉은 처녀꽃도 몇 그루 꽃을 피우겠지. 어디 이렇게 큰 나무에만 꽃이 피는가. 산길 어딜 걸어도 자잘한 꽃들이 발길을 밝힌다. 노란 양지꽃이 발길에 밟힐 듯 나지막히 피어 올려다본다. 마른 풀잎 사이에 고개를 숙이고 핀 꼬부랑 할미꽃도 보인다. 보랏빛 제비꽃이 여기저기 피었고 민들레는 어느새 홀씨를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하나하나 이름을 다 들먹이지도 못할 꽃들이 온 산에 들에 피기 시작하면 엄마는 독 하나를 꺼내왔다. 겨우내 묵혔던 빈 독을 꺼내 짚불을 붙혀 넣고 독안을 구석구석 거을리고 나면 맑은 물로 여러 번 헹구어 낸다. 마른 행주로 물기를 말끔히 닦고 밑술을 넉넉히 부어서 정지간 한 옆에다 세워 두었다. 여기저기 진달래가 피어나면 먼저 진달래꽃을 한 줌 따다 넣었다. 그렇게 엄마의 백화주 담그는 일이 시작된다.
백화주. 백가지 꽃을 따다 술로 담근 것이다. 메주콩 백 개를 세어 종지에다 담아서 술독 옆에다 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진달래부터 시작해서 꽃을 한 가지 따서 넣고 콩 하나 덜어내고, 또 꽃 한 가지 따 넣고 콩 하나 덜어내고. 한 열흘만에 아니 두어 달 안에라도 백가지 꽃이 다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엄마는 그렇게 콩을 덜어내면서 가짓수를 채워갔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 가면 줄어들 것 같지 않던 콩도 많이 줄어들었다. 철따라 피고 지는 꽃이 바뀔 때마다 엄마는 잊지 않고 꽃을 한 줌씩 따다 넣었다. 밭에서 들에서 큰일을 하나라도 꿰어 차고 거들어주는 사람도 없이 상머슴 일을 혼자서 해내야 하는 엄마였지만 새로 핀 꽃을 따오는 일은 잊지 않았다. 어느 날은 늦게까지 들일을 하고 어둑할 때 들어오면서 낮에 보아둔 꽃을 따러 산에 올라갔다가 팔이고 다리가 다 긁혀서 오기도 했다. 어두워진 산에서 꽃을 하나하나 따지를 못하고 주루룩 훑어서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에 싸서 오기도 했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온 몸이 물먹은 창호지겉이 방바닥에 차악 달라붙는 것 같다고 하면서도 엄마는 불빛아래서 꽃잎을 고르고 앉았다. 막내 고모가 엄마 옆에 앉아 꽃잎을 고르면서 한 마디 했다.
“언니도 차암 희안한 사람이다. 날마다 술 먹고 오는 오빤데, 술약 해대기 신물도 안나나? 아침마다 쌀무리 갈아주고 재첩국 끓이주고 하지 말고 술 해주지 말지.”
듣고 보니 그랬다. 아버지는 정말 술을 안 드시는 날이 별로 없었다. 이날 이때까지 그렇다. 술에 취해서 마루 끝에 드러누워서 꼼짝도 않는 아버지를 겨우겨우 방에까지 끌어다 눕히고 넥타이를 풀어주고 양말을 벗기면서 엄마는 혀를 끌끌 차대었다. 그러고 다음날 아침이면 재첩국을 끓여대었다. 재첩이 나는 철이면 아침마다 재첩국이 끊이질 않았다. 자고 일어나 재첩 끓이는 냄새를 맡으면서 문을 밀고 나가면 엄마는 조리로 조갯살을 다 일어내고 남은 재첩껍질을 사구째로 우리한테 내밀었다. 우리는 눈꼽도 안 떨어진 눈으로 재첩껍질을 뒤집어가면서 살을 골라내었다. 조리로 아무리 잘 일었다 해도 껍질 안쪽에 붙어있는 살은 만만치 않게 나왔다. 살을 떼어내 입에 넣어가면서 종지에 모아도 제법 한 종지씩은 나왔다. 껍질을 이리저리 뒤집으면 차르륵 차르륵 나는 조개껍질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아이쿠 이야기가 또 재첩국으로 샜다.
아버지는 그렇게 몸이 상할 만큼 술을 드셨고, 엄마는 죽어라 약이 된다는 것은 해 대었다. 막내 고모가 그런 말을 할만도 했다. 암말 않고 꽃을 고르던 엄마가 입을 열었다.
“애기 너거 오래비가 보통 사람이가. 저 속이 속이겠나.”
“……”
“저래 일 욕심도 많고 포부 큰 사람이, 저래 날개를 꺾이가 안 사나. 속에 일어나는 그 불을 우예 삭히겠노.”
“……”
“술을 묵어가 불을 끌 수 있다카믄 술을 묵어야지 너거 오래비한테는 술이 약이다. 이왕에 묵는 술, 쪼께이라도 좋다카는 술을 묵으라꼬.”
고모나 나나 아무 말도 못했다.
올해도 산에는 진달래가 피었다 지고 복사꽃도 화안하게 피고 좀 있으면 감꽃도 피겠지. 이렇게 환하게 핀 꽃잎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꽃잎 사이로 콩알을 덜어내는 엄마의 등허리가 어른거린다. 몸도 못 가누게 취해서 들어오신 아버지의 넋두리도 들린다. 그리고 어느새 꽃잎에 녹아있는 술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진달래 꽃잎에서도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이파리에서도 남들이 말하는 사과냄새 나는 박태기 꽃에서도 모두 술 냄새가 난다. 그러면 나는 술이 그냥 좋아진다. 그냥 좋다. 엄마가 그래 신물이 난다는 그 술이 좋다. 술을 한 잔 마시고 나면 어느새 술잔에는 갖가지 꽃잎이 동동 떠다닌다. 술 취해 쓰러진 아버지의 냄새나는 양말을 벗기는 엄마 얼굴도 술잔에 잠긴다. “그래 사는 기 아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쉰 목소리도 잠긴다. 그리고 나는 05539 어쩌구 저쩌구 전화번호를 누른다.
“엄마 미얀데예. 저녁 자싰습니꺼? 별일 없지예? 아아들예 아아들이사 다아 잘있지예. 아버지는예? 오늘도 약주 하싰습니꺼? 그래도 그래 드실 수 있으이 됐습니더.” 맨날 하는 그 소리, 똑같은 그 소리를 하고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