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감꽃 주워 봤어요?

야야선미 2001. 6. 29. 12:49

"야야, 감꽃 주울끼가? 인자 고마 마당 쓸란다."
길다란 마당비를 들고 아버지가 야야를 부르셔. 눈을 비비고 마당엘 내려서면 감나무 밑이 하얗단다. 감기는 눈을 비벼가며 감꽃을 꿰지. 아버지도 우리가 일어나길 기다리면서 벌써 한 줄이나 꿰셨어. 우리 집 꽃을 다 줍고 아직도 감기는 눈을 비비며 동생이랑 대문을 나서면 이집저집에서 동무들이 나와. 복사꽃이랑 살구꽃이 다 지고 한참이나 있어야 감꽃이 피거든. 감꽃은 다른 꽃이랑 달라서 아이들이 먹는 군것질거리가 되거든.
우리 집 감은 떨감이야. 그래서 꽃도 떫어. 그런데 참 희안하지. 빨랫줄에다 걸어 말리면서 오며가며 하나씩 빼먹으면 꼭 곶감 맛이 나거든, 쪼글랑하게 마른 꽃에서.
길고 깨끗한 짚을 골라 짚꿰기를 만들어서 달랑달랑 들고 맨 먼저 가는 집은 사춘댁이야.
"아제 안녕하십니꺼?" 하고 들어가기도 하지만 보통은 그냥 고개만 꾸우벅하고 감나무 밑으로 달려가. 언제나 빗자루나 낫을 한 손에 들고 있다가 우릴 맞이하시던 그 댁 어른 사춘아제는 한번도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너거들이 안 오면 내가 아침을 못 얻어 먹는데이. 마당이라도 씰어내야 밥을 얻어묵지. 어서 줍거라." 잠깐이면 다 쓸어낼 마당인데도 감꽃을 주우러 올 아이들을 기다리고 서성대시는 거야, 날마다 그렇게.
"아이구 야야, 니 눈꼽쟁이가 바우만하다. 발등 깨지겠데이." 놀래서 눈을 비벼대면 그게 이뻐 죽겠다는 듯이 껄껄대셔.
사춘댁 감나무는 보통 떨감하고는 좀 달라. 감이 아주 작고 씨만 많아서 홍시를 먹을 때는 달갑잖아. 그런데 꽃은 달짝지근한 것이 그냥 먹어도 떫지가 않아서 아이들이 그 감꽃을 젤로 좋아해. 꽃도 감처럼 아주 자잘해서 일일이 주워서 짚꿰기에 꿰려면 한참씩 걸려.
아이들은 사춘어른이 기다려주시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키도 해. 하나씩 주워서 꿰모으다가 마음이 바빠지면 치마를 벌려서 손바닥으로 살살 쓸어 담아 나무 밑에 나란히 앉아서 하나하나 꿰는 거야. 동무들이 서넛만 가는 날은 서너 줄도 꿰고 어떤 때는 한 줄만 달랑 들고 대문을 나서기도 하지.
다른 집들도 사춘어른럼 그렇게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건 아냐. 어떤 집은 아이들이 감꽃 주우러 달려올 걸 알면서도 마당을 싹싹 쓸어서 대문 밖 거름더미에다 붙여놓았어. 하얀 감꽃이 거름더미에 쓸려나간 걸 보면 얼마나 기운이 빠지는지.
어떤 집은 "아아, 뭐 먹고 살끼라꼬 식전부터 가쓰나들이 돌아댕기쌓노. 식전에 꼴이나 한 망태 뜯어오지." 그런 집에는 심부름도 가기 싫어. 가쓰나가 뭐 어쨌다고.
감꽃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집이 또 있어. 다완댁이야. 이 집은 서너 번을 가야 한번쯤 들어갈 수 있어. 감나무가 많아서 감꽃을 줍기는 좋은데 어른들이 매섭고 차가워. 높다란 대문은 늘 꼭 닫혀있는데 대문에는 커다랗게 '개조심'하고 붙여놨어.
개도 주인을 닮는 건지 그 집 개는 다른 개보다 훨씬 사납고 무서워. 어쩌다 심부름을 가면 난 할 일을 다 마치고 나올 때까지 다리가 저렸어. 그 집 아제가 줄을 붙들고 있어도 그래. 으르릉거리고 풀쩍풀쩍 뛰면 덩치 좋은 그 집 아제까지 움칠움칠 딸려 다니거든. 한번은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음복상을 이고 갔다가 개가 풀쩍 뛰어오르는 바람에 머리 위에서 다 쏟아 버렸어. 뜨거운 탕국이 쏟아져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데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뜨거운 줄도 모르고 달려나왔어. 그때는 개가 황소보다 더 커 보이더라구.
그 무서운 개 때문에 아이들은 그 집 감꽃이 아무리 탐이 나도 쑥 들어가질 못해. 어쩌다가 그 집 꼴머슴 상수 오빠가 개를 잡고 문을 살짝 열어주면 얼른 잘 안 보이는 뒷마당으로 뛰어가서 꽃을 줍거든. 그런데 그런 날은 드물어. 그 댁 어른들 기분이 나쁜 날에 대문 앞을 서성대다가는 괜히 우리들한테 날벼락이 떨어져.
"아침부터 가쓰나들이 들락거리이 재수없는 일만 생기제."
그 다음 말은 들을 필요도 없이 우린 나와야. 길게 들을수록 더 기분만 나빠지는걸 아이들도 알거든. 그런 날은 대문에 붙여둔 '개조심'만 아이들한테 욕을 보지. '개자석'으로 바꾸기도 하고, '개' 뒤에다가 '같은 놈'을 써넣기도 하고 그러거든. 그런데 그런 일은 우리보다 서너살 많은 오빠들이 해놓고는 냅다 달아나고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뒤에 남은 우리들만 잡혀서 된통 혼이 나.
우린 다음날 아침에 어김없이 또 사춘어른댁에 모여들어. 감꽃을 주우면서 누가 먼저 하는 말인지
"참 이상하재? 와 착한 사람은 못 사는공?"
"맞다, 옛날부터 그런 갑다. 옛날이야기도 봐라. 착한 사람은 다 가난하제?"
"맞다, 다완댁에는 가마이 있어도 자고 나면 살림이 저절로 분다카데."

그렇게 감꽃을 주우러 다니던 때가 삼십년이 넘었어. 얼마 전에 그 사춘어른 댁엘 가봤어. 아, 그런데. 안채는 다 허물어지고 축담이랑 부엌자리만 조그맣게 남았어. 멀찌감치서 그 댁을 둘러싸고 있던 대나무 숲이 우리가 꽃을 줍던 마당까지 뻗어 나와서 집터인지도 겨우 알아보겠대. 감나무는 밑둥도 남지 않았어. 터는 또 얼마나 좁던지 이런 곳에 어떻게 집이 있었을까 싶어. 군데군데 드러난 청석이 그 댁의 어려운 살림을 대신 말해 주는 듯 했어. 참 왜 그리 서운한지. 그 옛날 거름더미에 쓸려나간 감꽃을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겨우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그런 마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