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가 만나는 아이들

아, 나도 말 쫑 합시다 <학교 참 좋다 선생님 참 좋다(보리/박선미)>에서

야야선미 2006. 9. 19. 14:11

아, 나도 말 쫑 합시다.


 한 며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고, 한낮에는 여름처럼 더워서 옷을 어떻게 입어야할지 모르겠더니 마침내 감기에 걸렸다. 하루 이틀 앓고 나면 말 줄 알았더니 웬걸 몸살까지 겹쳤는지 며칠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두 눈은 벌겋게 열에 들떠서 앞이 침침한 것 같기도 하고, 머리는 무슨 약에 취한 듯이 멍한 것이 감각이 없다. 무엇보다도 아침에 일어나기가 정말 어렵다. 온몸을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리고 손가락 마디마디부터 온 뼈마디에 힘이 다 빠져버린 듯하다. 칫솔을 쥐기도 힘이 든다. 오늘 아침도 어렵게 어렵게 일어나 학교를 들어서는데 이미 아침방송 조례를 시작했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겨우 교실로 가는데, 창 너머로 보이는 우리 교실 풍경은 참 대단하다. 
걸상 위에 올라가서 배꼽 앞에 두 손을 맞잡고 “하아느님이 보우하사~” 하고 고래고래 노래하는 녀석들, 지훈이는 아예 책상 위에 올라가서 지휘를 따라하고 있다. 석우랑 한빛이 귀현이는 한 가운데 동기를 눕혀놓고 간지럼 태우고 동기는 못 참는다 소리 지르고. 
에구구 이래 흐린 날에 불도 켜지 않았다. 교실문을 열고,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켜는데 스물여섯 가운데 움직이기 싫어하는 몇몇 녀석들 빼고 모두 튕기듯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온다.
“쌤, 지각이예요.”
“왜 이렇게 늦었어요?”
“쌤 어디 아파요? 머리 안 감았어요?”
한꺼번에 달려드니 아픈 머리가 더 지끈거린다. 몸이 아프면 이래 반갑게 맞이해주는 아이들도 살갑지가 않다.
“너거들 이래 소리치면 내 지각한 것 다아 소문난다. 조용히 하고 좀 앉아라.”
“아아, 할 말 있단 말이예요.”
“그럼 할 말 있는 사람만 남고 다른 사람은 좀 들어가 앉지.”
그런데 서넛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다들 그대로 우르르 모여든다. 스물은 되지 싶다.
“꼭 할 말 있는 사람만 하세요.”
“꼭 할 말 있어요.”
“진짜 중요한 이야기만 해.”
“진짜 중요한 이야기 맞아요.”
“중요한 이야기 아니면?”
“억수로 중요해요.”
오늘따라 이렇게 할 말 있다고 달라붙는 것도 힘겹고 짜증스럽다.
“내가 들어보고 중요한 이야기 아니면 혼내도 돼나?”
그 말에는 아무도 대답을 않는다. 한 줄로 주욱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녀석들이 우습기도 하다. 어디 얼마나 중요한 이야긴지 어디 들어나 보자.
“그럼 앞에 있는 지훈이 부터 해봐라.”
“오늘 수학 시험 또 칠거에요?”
“그럼, 오늘 쪽지 시험친다고 토요일에 말해줬잖아. 다음 혜린이.”
“받아쓰기 시험도 쳐요?”
“어. 다음 종근이는?”
“내 탬버린 안 가져왔어요.”
조금씩 짜증이 올라온다. 모두다 알림장에 적어주고, 말로도 몇 번씩이나 했던 이야기가 아니냐. 조금씩 목소리에 날이 설려고 한다.
“연희는?”
“내 알림장 안 가져왔어요.”
“그런 거는 니가 잘 챙겨와야지. 맨날 쓰는 걸 안 가져오고는 안 가져왔다고 그라노?”
“홍대는 뭐어."
“내 이빨 빠졌어요.”
아이고 머리야. 이러다가 마침내는 아이들한테 소리를 지르고 말 것 같다. 숨을 조금 돌리고,
“너거들 이래 중요한 이야기를 다 들으려면 종도 몇 번이나 치겠다. 한꺼번에 다 듣지를 못하겠으니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 주면 안 되겠나?”
“네에”하는 녀석은 서넛, 모두들 시무룩하게 대답이 없다. 그걸 보니 좀 미안하다.
“내가 억수로 아프거든. 머리가 너무 아파서 머리를 들고 있으니까 눈물이 날라고 그래. 너거들 이야기를 다아 듣고 싶은데 정말로 힘이 들어서 그래.”
아프다는 말에는 저희들도 어쩔 수 없는지 슬슬 자리로 들어간다. 정민이는 기분이 아주 나쁜 얼굴이다.
“정민이, 화났나?”
“내 말은 안 들어주고.”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고 자리로 들어간다. 
“지금 내한테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써 주세요. 내한테 지금 하고 싶었던 그대로 써 주면 돼요.”
정민이는 여전히 입이 쑤욱 나왔다. 곱지 않은 눈길로 나를 한참 보고 앉았더니 쓰기 시작한다. 아직 마음먹은 대로 쉽게 쓰지 못하는 녀석이라 미안하긴 미안하다. 정민이는 말로 하는 것이 훨씬 좋을텐데. 그래도 오늘은 안 되겠다.
조금 전에 줄 맨 끝에 서서 까치발로 내 얼굴을 넘겨다보던 성희도 글을 쓰고, 덩치 큰 하영이는 글을 벌써 다 쓰고 옆에다가 그림까지 그리고 있다. 글자를 빨리 익힌 석우는 글을 쓱쓱 쓰더니 맨 먼저 가져왔다.
<왜 내 말은 안 들어줘요. 선생님 토요일에는 사기꾼이지요. 내 69 맞았는데 틀렸다고 했잖아요. 사기꾼이잖아요. 하석우올림>
<선생님 토요일에 내 생일이예요. 송가은>
<선생님 내 실내화 샀어요. 상훈올림>
<선생님, 나는 인자 하영이랑 안 놀아요. 사이종게 놀라고 화해 했는데 그래도 안 놀거예요. 토요일에 짝지랑 젓가락으로 콩먹여주기 했짠아요. 그때 나는 짝지 입에 콩 넣어주고 짝지가 내 한테 먹여주고 하니까 꼭 연애하는 거 같았어요. 조금 부끄러웠써요. 그런데 그 말 하니까 하영이가 우리 연애한다고 소문 다 냈잖아요. 하영이하고 화해 하라고 하지 마세요. 진자로 화났단 말이에요. 성희가>
<나는 수학이 너무 어려워요. 옛날에는 좋았는데 인제 시러요. 규칙찾기가 시러요. 나는 규칙은 업스면 좋겠어요. 신윤지>
<성희하고 화해했어요. 그런데 또 안 놀아요. 그래도 괘찮아요. 나는 가은이하고 놀거예요. 하영>
하나둘 써오는 글을 읽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렇지만 제 딴에는 얼마나 심각하고 진지하게 쓴 글들이냐. 아이들 글을 읽다가 정민이를 본다. 지웠다가 썼다가 하면서 영 마뜩찮은 얼굴이다. 뜻대로 잘 안 써지는 게지.
이번에는 옆에 앉은 예진이랑 뭐라뭐라 하더니 종이를 예진이한테 넘겨준다. 정민이는 뭐라고 소곤거리기만 한다. 아마 정민이 말하는 걸 예진이가 받아쓰는 모양이다. 예진이가 조금 받아 적더니 이번에는 읽어준다. 정민이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제 뜻대로 씌어진 모양이다. 또 정민이가 말하고 예진이가 받아쓴다. 그러고 나서 또 예진이가 읽고 정민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에구 예쁜 녀석들. 한 학기를 함께 지내더니 이젠 이렇게 서로 손이 되어주고 입이 되어주기도 한다. 드디어 정민이가 종이를 들고 나왔다.

<아 낭도 말 쫑 항시다. 내가 말 하랑꼬 항는데 드어가라고 행다. 나는 슬펑다. 나는 인자 성생님항테 하낭다. 나는 징짤로 기붕 안 종다. 나는 인자 박선미 실다. 왜냐하면 나는 말로 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잘 못 쓰는데 글로 써라하니까 화가 난다. 그래서 나는 할 말이 많아도 쓰기 싫다. 그런데 인자 예진이가 써 준다. 나는 예진이를 사랑한다. 나는 선생님보다 예진이가 좋다. 예진아 고맙다. 주정민 씀>


정민이가 내한테 꼭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그것보다 이 순간에는 이 말이 꼭 하고 싶었을 것이다. 글도 잘 못 쓰는 아이한테 이야기 듣기 힘들다고 글로 쓰라 했으니. 이 말이야말로 정말로 정민이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이다.

“아 낭도 말 쫑 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