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있어 따뜻한 아침
오늘은 다른 학교 선생님들까지 모셔다 연수회를 해야 한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 마음이 바쁘다. 아침에 일을 좀 하자 싶어 일찌감치 출근했다. 아직 햇살이 퍼지지 않아 바람이 차다. 너무 일찍 오지 말라고 해도 학교 언덕길에는 이른 아침부터 가방을 달랑거리고 올라가는 녀석들이 더러 있다. 올라가는 모습이 신나고 힘차다.
‘저렇게 신나게 학교로 가는데, 오늘도 교실에서는 줄곧 저렇게 신나고 재미있을까?’
‘저 가벼운 발걸음이 하루 내내 이어지도록 하고 있나?’
문득 나 스스로 자신이 없다.
오호, 오늘은 우리 반에서 내가 일등이다. 나지막한 책상만 놓인 교실은 좀 심심하다. 아이들 자리를 휘이 둘러본다. 어제는 수업만 마치고 부랴부랴 출장을 간 탓에 책상이 삐뚤빼뚤, 여기저기 어질러 놓은 곳이 많다.
수연이 자리는 여전히 정신없다. 필통도 책도 공책도 공부시간에 하던 학습지도 온데 널려있다. 교실 바닥 여기저기에 크레파스가 떨어져 있다. 밟혀서 부스러진 것도 있고, 싸놓은 종이가 벗겨져 알몸으로 나뒹구는 것도 있다. 하나씩 주워든다. 열 개 가운데 예닐곱이 영창이 이름이 쓰여 있다.
‘이러니 주인을 기다리는 학용품 상자에 영창이 물건이 넘쳐나지.’
‘에이구, 이건 또 뭐꼬?’
양말도 한 짝 떨어져 있다. 이것도 영창이 것이겠지? 영창이는 몸에 열이 많은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양말부터 벗어 던진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온종일 맨발로 산다. 어제도 짝 없이 돌아다니는 양말을 주워 줬는데 오늘 보니 또 다른 색깔이다.
지수 자리에는 어제 하던 학습지가 그림을 다 그리지 못한 채 반듯하게 놓여있다. 글씨는 찍은 듯이 반듯반듯 한 획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크레파스 칠도 선 밖으로 하나 튀어나간 게 없다. 이러니 언제나 시간을 놓친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땋아 다니는 지수, 하는 것도 그 모습 그대로다.
그 옆에 정원이 그림하고는 영 딴판이다. 한 자리에 오 분을 앉아 있지 못하는 정원이는 그림도 자유롭다. 언제나 한 가지 색이다. 정해진 색깔도 아니다. 처음 크레파스 하나를 잡으면 끝날 때까지 그걸로만 칠한다. 밑그림 그릴 때 열심히 그려놓은 선도 필요 없다. 선에 얽매이는 게 싫은 정원이다. 그냥 손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칠한다. 한 자리에 가만 못 있는 정원이가 그림에도 그대로 보인다. 정원이 그림을 보면 가끔은 가슴이 탁 트인다. 편안해서. 그러나 모자라는 담임은 아직도 정원이 그림 속으로 온전히 다가가지 못한다.
떨어진 연필도 줍고, 흐트러진 책도 챙기고 있는데 복도 쪽에서 다다다닥 뛰어 오는 소리가 난다. 교실 문을 확 열어젖히며
“일등!” 하더니,
“어어 아니네? 쌤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재욱이다.
“어, 나도 일등 한 번 해 볼라꼬.”
“에이. 내가 일등 할 뻔했는데.”
코가 빨개진 재욱이가 영 실망한 얼굴이다.
또 문이 확 열리더니 “강재욱!” 하고 소리를 친다. 원재다.
“와?” 재욱이 대신 내가 대답을 한다. 원재 녀석 그 동그란 눈을 더 커다랗게 뜨고 바로 달려온다. 볼이 빠알갛다.
“재욱이요오 저어 저 복도에서 마막 뛰었어요.”
“…….”
“내가 마막 불렀는데 그래도 마막 뛰던데요.”
안 그래도 성질이 급한 녀석이 무척 흥분했다.
“처언처이, 처언천히 숨부터 좀 쉬어라.”
원재 등을 쓸어내리는데, 아직도 얇은 홑잠바를 입고 있다. 아침 찬바람이 그대로 묻어 옷이 차갑다.
“니이 안 춥더나?”
“빨리 뛰면 안 추워요.”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무릎 다 까지는데.”
“나는 절대로 안 넘어져요.”
하긴 원재는 조그만 몸에 몸놀림이 재빠르고 다부져서 잘 넘어지진 않을 거다.
“그래도 그래 막 달리다가 옆에서 오토바이라도 나오면 우짤래?”
넘어져서 다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지. 오토바이가 많이 다니는 좁은 골목길로 마구 뛰어 올 원재를 생각하니 겁이 더럭 난다. 그렇지만 녀석은 딴 소리다.
“쌤, 오늘 왜 이래 일찍 왔어요? 밥은 먹었어요?”
도리어 내 걱정을 하고 있다.
“그런데요, 오늘 아침에 억수로 춥지요?”
“막 뛰면 안 춥다메?”
“아니요. 문을 딱 여니까요오, 코에 찬물 들어간 것 같이 찡하던데요.”
“나는요, 학교 올라올 때 귀가 없어지는 줄 알았어요.”
재욱이도 옆에서 거든다.
“맞아맞아, 아침에 문을 열고 나설 때 찬바람이 쌩 불면 코가 째앵 하니 그랬지. 그래서 우쨌노? 추워서.”
“코가 찌잉 하더마는 머리가 또 찌잉하데요. 그래 코를 딱 쥐고 막 뛰었어요. 그런데 인자는 손이 차가워서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어요.”
“재욱이는?”
“귀가 없어지는 것 같더마는 잡아보니까 있던데요. 만지니까 진짜로 차갑더래요.”
그새 아이들이 많이 왔다.
“쌤, 뭐해요?”
주영이가 눈부터 먼저 웃으면서 다가온다.
“으으? 날씨가 너무 춥다고. 주영이도 마이 춥더나?”
“나는 추우면 코가 자꾸 나와요. 오늘도 또 아이들이 코찔찔이라 할 걸요?”
그러면서도 또 웃는다. 언제나 이렇게 웃는 주영이다.
“날씨 추우면 나도 콧물이 나는데. 어른도 코찔찔이 될 때 있다.”
연수회 준비고 뭐고 이러다가 아침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마침 날씨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늘 아침에는 날씨가 추워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써 보자고 한다. 읽을 책을 펴들고 앉던 녀석들도 죄다 종이를 한 장씩 들고 간다. 머리를 책상에 쿡 박고 열심히 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불러 줄 테니까 선생님이 좀 써달라는 아이는 언제부턴가 없어졌다.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연필을 잡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녀석들인데. 추운 겨울날 아침, 오늘 아침 날씨를 쓰느라 머리를 수그려 열심히 쓰는 모습이 가슴 저쪽부터 참 따뜻하게 만든다. 오늘 아침에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는지 없는지도 고만 잊었다. 아이들이 써 준 글이 날 붙잡아 앉힌다.
문 열고 나오니까 코에 찬물을 너은 거 같아요. 그런데 코가 찌잉하더마는 머리도 찌잉해요. 손으로 코를 쥐었어요. 그런데 인자 손이 차갑어요. 왼손으로 또 잡았어요. 왼손이 얼음물에 들어간 거 같았어요. (원재)
나는 아침에 엄마가 호주머니에 손 넣어주었어요. 엄마 호주머니에 들어가니까 기분도 좋아요. 그런데 호주머니가 작아서 엄마 손은 다 못들어가요. (경령)
학교 올라오는데 귀가 없어진 거 같다요. 손으로 만져보니까 귀가 있었어요. 그런데 억수로 차갑던데요.(재욱)
나는 추우니까 코가 자꾸 나와요. 아이들이 코찔찔이라 해서 울라했는데, 선생님도 추우면 코찔질이 된다 해죠? 아이들이 코찔찔이라고 놀리면 선생님도 놀리는 거니까 안하겠지요? (주영)
엄마가 아침밥 안 먹고 군고구마 주었어요. 어제 팔다가 남은 거 먹고 왔어요. 그런데 밖에 있어서 고구마가 찹아요. 누나가 고구마맛 아이스크림이니까 묵어라 해요. 나도 맛있다했는데 잘 안 넘어갔어요. 물을 마이 마셔야 넘어가요. 엄마가 보리차를 뎁펴줘서 고마웠어요. 나는 우리 엄마가 조아요. (서정민)
아빠가요, 어제도 술 먹고 와짠아요. 엄마가 밉다고 밥을 안했어요. 내 학교 오니까 그래도 내 한테만 컵라면 해줬어요. 춥은데 배고프면 더 춥다고요. 나는 뜨신 거 먹어서 하나도 안추워요. (준현)
엄마 호주머니에 손 넣고 오면서 엄마손 걱정하는 경령이, 차가운 군고구마를 아침밥 대신 먹으면서도 엄마가 데워주는 따뜻한 보리차 한 잔에 감사하는 우리 정민이, 뜨거운 컵라면을 먹고 오면서 하나도 안 춥다고 얘기하는 우리 꼬맹이 준현이, 이 아이들이 나를 춥게도 뜨겁게도 만든다. (2004.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