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권정생 김수업 선생님

흔들리는 지구 / 이오덕

야야선미 2010. 7. 27. 20:22
흔들리는 지구 / 이오덕

시를 가르치면서
시를 믿고
시에 기대어 살아가도록
나는 가르쳤다.
모두가
한 포기 풀로 한 그루 나무로
꽃으로
순하디순한 짐승으로
자라나기를 빌었다.

그리고 헤어진 지 30년.
또는 40년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소식은 무엇이던가?
그들은 모두 어디서 어떤 사람이 되어
무엇을 하는가?

이른봄
할미꽃 잎이 말라서
파 보니 노란 맹아리가 올라와
풀로 덮어 주었다는
그 아이는 국민학교를 4학년도 못 마치고
남의 집에 가서 식모살이를 하더니
소식이 끊겼다.
지금은 나이가 쉰쯤은 됐을 것인데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청개구리가 올라 앉아 울고 있는 나무를
장난삼아 돌로 쳤다가
그 청개구리가 놀라 발발 떠는 것을 보고
죄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
하늘 보고 절했다는 시를 쓴 아이.
깊은 산골에서 겨울잉면 하루 나무를
두 짐씩 하고
여름이면 또 풀을 몇 짐씩 베고
방학 때는 감자를 스무 짐씩 져 날라
그렇게 부지런하고 착하던 아이.
그 아이는 자라나면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이라
믿었더니
여러 해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슨 일로
세상이 얼마나 괴로웠기에
얼마나 또 큰 장난을 했기에
지은 죄 갚는다고 목숨까지 버렸을까?

"내가 군대에 가서 총에 맞아 죽을까 봐
걱정이 난다. 무서운 군대, 내 꿈에는
고마 군대 안 가고 고마 나쁜 나라와 우리 나라가
같이 동무가 되었으면..." 하고 글을 쓴 아이도
그렇게 착하고 일을 잘 하더니
30 몇 년이 지난 오늘은
어디서 또 무슨 괴로운 꿈을 꾸는가,
어제는 동창회 모임을 알리려고
10년 전에 살던 ㄱ시의 114를 돌려 전화번호를 물었더니
"XXX란 사람이 XX면에 꼭 한 사람 있는데
전화번호를 알리지 않으려고
번호부에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했다.

이른봄 담 밑에 돋아나는 새파란 풀싹 같고
가을날 개울가에서 실비단 하늘빛으로 눈부시던 달개비 꽃 같던
그 고운 마음들 다 짓밟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시도 말도 죽어버린 이 쓸쓸한 땅 거친 벌판에
다만 약빠른 재주꾼들만 살아남아 선진 복지 관광 문화 국가를 외치면서
활개치고 다니는 세상.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잿빛으로 덮인 이 낯선 거리를
쫓기는 짐승처럼 엉금엉금 기어가듯 하는 나
이제는 마지막으로 남은 우리들의 오직 하나뿐인 목숨
목숨을 지키자고 말을 살리자고
지팡이 짚고 걸어가는 길이 왜 이다지도 어지러운가
멀미가 난다.
땅이 흔들린다.
지구가 흔들리는구나.     (1998.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