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권정생 선생님

새야 새야 / 권정생

야야선미 2006. 8. 10. 02:00

새야 새야 / 권정생  

지난겨울은 참 추웠다. 추위만큼 눈도 엄청 내려 온 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덮였다. 마당가 앵두나무 앙상한 가지에서 참새 한 마리가 오롱오롱 떨고 있었다. 언뜻 생각해보니 저놈이 먹을 게 없어서 저렇게 떨고 있구나 싶었다.
  마침 작년의 묵은 쌀이 있기에 한 바가지 떠서 마당 구석으로 뿌려놓았다. 하루 동안은 몰라서 그랬던지 조용하더니 이틀이 지나자 백 마리도 넘는 새들이 몰려왔다. 참새랑 까치랑 산비둘기랑굴뚝새, 양진이, 오목눈이… 갖가지 새들이 내려와 재재거리며 쌀을 쪼아먹는다.
  쌀을 먹는 데는 작은 새들이 훨씬 유리한 모양이다. 커다란 까치는 많이 굼뜨다. 부지런히 쪼아먹느라 모두 곁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토록 갖가지 종류의 새들이 몰려와서 함께 모이를 먹을까? 조금 신기했다.
  누가 제일 먼저 쌀이 있는 것을 알았을까? 참새일까, 산비둘기일까?
  어느 것이든 먼저 알아차린 놈이 누군가 데려왔을 게다. 누구한테 어떻게 전해줬을까? 자기들끼리 한테 만 알린 것이 다른 새들한테까지 들켜버려 이렇게 여러 가지 새들이 함께 몰려온 걸까?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모든 새들한테 소문을 퍼뜨린 걸까?
  새들은 어떻게 말을 할까? 내가 듣기엔 그냥 지지지, 찍찍, 깍깍, 이런 토막 소리밖에 안 들린다. 참으로 사람이란 무식하고 무지하다. 새들의 말소리도 알아듣지 못하니 말이다.
  저희들끼리는 그렇게 토막토막 내고 있는 소리로도 서로 대화가 되는 모양이다. 가끔가다가 뭐라 뭐라 지지거리면서 서로 흘끔흘끔 쳐다보는 걸 보니 그저 신기할 나름이다.
  “아이구, 맛있다!”
  “어떻게 이런 데 쌀이 있었을까?”
  “그래 말이지.”
  “눈이 내릴 때 하늘에서 쌀이 같이 내려온 걸까?”
  “그건 아니야. 하늘에서 쌀이 내려온 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럼 어디서 뿌려진 거지?”
  “아마 마음 착한 사람이 뿌려준 걸 거야.”
  새들이 조잘대는 것을 내 멋대로 해석해보았다. 그런데 이런 소리도 들린다.
  “이것 묵은 쌀이지? 어쩐지 맛이 없잖니.”
  “그래, 벌레 먹은 것도 있고….”
  “아마 누가 못 먹을 성싶으니까 이렇게 인심쓰는 척 뿌려준 걸 거야.”
  옛날에는 원래 사람도 짐승도 나무도 다 같이 이야기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노루실 할머니가 그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난다. 봄에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가면 새들이 와서 이렇게 가르쳐줬다고 한다.
  “저쪽 골짜기에 가면 산나물이 많단다.”
  한낮이 되어 목이 마를 땐 또 다람쥐가 나타나 이야기한단다.
  “저기 아래쪽 찔레덩굴 옆에 샘물이 있단다.”
  그래서 모두모두 사이좋게 살았다는 얘기다.
  그러던 것이 사람들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짐승들과 나무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일껏 머루 다래가 많다고 가르쳐주면 조금만 가져가야 할 것을, 혼자서 죄다 따가지고 사라져버린다는 거다.
  “에그, 다른 사람 몫도 남겨둬야지” 하면 “그래. 다음엔 그럴게” 해놓고서는 또 혼자서 다 가져가 버리곤 했다. 그래서 새들도 다람쥐들도, 노루나 오소리들도 사람하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딘가에 무엇이 있어도 절대 안 가르쳐주고 저희들끼리만 알아듣는 말로 바꿔버렸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요새는 아무리 귀담아 들으려 해도 짐승이나 나무들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했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만약 앞으로 우리 사람들이 자연 속의 동식물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지저귀는 새소리를 알아듣고, 사슴 노루 같은 들짐승들의 말을 이해한다면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민감한 그들에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고 정서적으로도 매우 유익해질 것이다.
  쥐, 돼지, 개미 같은 동물들은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감지해내는 특별한 감각기능을 가졌다고 하지 않는가. 옛날얘기에도 나오는 일화처럼, 어떤 마음 좋은 부자 노인이 쥐가 지진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려줘서 집이 무너지기 전에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만 봐도 그렇다. 개미가 높은 언덕에 집을 지으면 그해는 장마가 진다든가, 까치집이 높이 쌓였나 얕게 쌓였나, 그것을 보고 흉년 혹은 풍년의 여부를 알았다고 한다.
  사람이 풀과 나무, 새들과 물고기나 뛰어다니는 짐승들과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돌아다니는 라디오’라 불리는 임실댁 아주머니는 하루 종일 떠들어대며 다닐 테고, 욕심쟁이 고약한 사람은 뭔가 노다지라도 얻고 싶어 수작을 부릴 테고, 거기 따르는 부작용도 엄청 많을 것이다.
  사람이란 동물은 어쩔 수 없는 악마일지도 모른다. 악마니 마귀니 악귀니 떠들고 있지만, 알고 보면 그런 못된 것들이 모두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만 빼고는 다른 자연 속의 동물들은 자연을 파괴하거나 더럽히지 않지 않는가. 온갖 나쁜 짓은 사람들이 다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노루실 할머니 말씀이 맞는 말이다. 짐승들과 나무나 풀들이 사람들과 말을 안 하게 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러면 어찌해야 될까?
  지금도 산골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을지 모른다. 절집 스님들 중엔 새들이나 작은 다람쥐하고도 이야기를 나누는 분이 있다 하지 않는가.
  가난한 마음으로 사는 것….
  새야 새야, 정말 너희들이 부럽구나.

<필자 소개>
땅바닥에 볼품없는 모양새로 떨어져, 한껏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이 여기다가, 결국 푸른 생명, 향긋한 과일나무의 거름이 되는 뿌듯함으로 활짝 웃는 강아지 똥… 국내 동화의 영원한 명작으로 꼽히는 「강아지 똥」과 「몽실언니」의 저자인 권정생님. 경북 안동의 깊숙한 시골마을에서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꾸려가는 님이지만, 그의 터를 밟고 간 누구라도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고야 마는 순수의 힘을 님은 가지고 있다.   (《작은이야기》이레, 200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