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 언니》의 작가 권정생 선생님을 만나고
《몽실 언니》의 작가 권정생 선생님을 만나고
온통 사과밭이었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정신병자가 된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필준이 이야기가 나오는 그의 동화 〈사과나무밭 달님〉이 떠오른다.
달 밝은 밤 이곳 어디에선가 착하디 착한 필준이의 정겨운 음성이 곧 들릴 것만 같은 그런 마을이다.
선생님이 머무르고 계신 동네 안동시 조탑동은 안동시내에서도 버스로 30여분을 더 달려서야 다소곳한 모습을 나타내는 그런 시골 동네였다. 아직 철이 이른 탓에 푸른 빛을 띄고 있는 사과들은 가지가 휘어지도록 매달려 있었다. 저만큼 자라도록 자식처럼 애지중지했을 손들을 생각했다.
낯선 사람이 서넛이나 들어서도 오히려 반갑다 꼬리치는 선생님의 유일한 가족인 뺑덕이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서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마을 청년들이 마련해 주었다는 토담집은 두어 평 남짓되는 곳으로 사방이 책으로 그득했고 선생님 방에는 곳곳에서 아이들이 보내온 글과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쪽에 놓인 둥그런 밥상에 필경은 그의 먹거리를 장만하는데 쓰일 간장병, 식용유병, 고춧가루통 등이 볼품없이 놓여 있다.
비료 푸대를 오려서 만든 비닐 부채를 내 놓으며 더위를 식히기를 권하시던 선생님은 방 어디에선가 센베이 과자를 찾아 내 놓으셨다. 오랜 투병생활로 인해 쇠잔해 질대로 쇠잔해진 선생님의 모습은 꼭 새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풀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천진한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자면 그는 지지리도 못난이다.
동화가 텔레비전으로 그것도 연속방송극으로 방영되고 많은 출판업자들이 그의 동화를 출판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적당히 타협만 하면, 그러면 정말이지 남부럽지 않게 살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세속적인 것에는 애시당초 관심이 없다.
이 비좁은 토담집을 지키며 그는 무엇을 고민하며 살까. 인간의 끝없는 욕심으로 인해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지 또한 그 끝없는 인간의 욕심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를 안타까워 하며 그런 것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알려 줄까가 40킬로 안팍되는 그의 육신이 감당해야 하는 고민이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은 이웃집 할매가 불쌍하고 농사 지어 몽땅 팔아도 품삯조차 건지기 어려운 이웃이 불쌍하고 맑은 강물을 모르는 아이들, 이런 시골 아이들조차 시내에서 들어오는 학원 차에 실려가는 아이들이 불쌍한 선생님이다.
“요 웃마을에 자주 놀러 오는 아이가 있는데 얼마 전에 와서는 그래요. 아저씨, 우리 아버지가요 돈 드린다고 공부 좀 가르쳐 주래요.” 그래 내가 그랬어요.안된다. 내한테 공부하면 더 못하게 된다 카고 돌려보냈어요.” 하며 웃는 그의 얼굴은 그대로 어린 아이이다.
“선생님, 요즘은 별로 신작을 안내시던데요.” 하는 말에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대답한다.
“동화를 쓸 수가 없어요. 사람 살아가는 모든 일이 돈으로 귀결되고 있어요. 일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모두 돈 때문이예요. 아이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옳다 말할 수가 없어요. 내가 하라는 데로 하면 모두 낙오자가 될 터인데 그럴 수야 없지 않아요? 삶의 주제가 없어요. 교회도 그렇고 절도 그렇고 돈으로 인해 사람을 소외시키고 있어요. 이웃집 가난한 할머니가 절에 다니는데 늘 쌀을 가지고 다녔대요. 그런데 절에서 쌀 가져오지 말고 돈으로 가져와라 하더래요. 그래 이 할머니가 돈을 얼마나 가져가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삼 만원을 내고 왔는데 쌀값보다 몇 배나 들더랍니다. 절에 다니는 즐거움 마저도 마음 놓고 누릴 수가 없어져 버린거지요. 나는 하느님을 믿지만 토정비결도 보고 불교책도 보고 그래요. 내가 나가는 교회 장로님이 그래요. 어째 권집사 동화에는 하나님 얘기가 하나도 안나옵니까. 동화에서도 예수님 이야기를 잘못 다루면 신성모독이라는 말이 나오고 스님 이야길 잘못 다루면 항의 전화가 뒤따른다” 는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의 닫혀있는 마음과 삶의 주제 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거듭하신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까.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갖게 할까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고 한평생 가슴에 든 멍을 쓸어 내리는 우리의 수많은 할매 할배들 어떻게 그 한을 풀게 할까 가 그가 늘 생각하는 ‘삶의 주제’이다.
그러한 그의 삶의 고뇌는 동화를 통해 형상화된다.
우리 민족이 겪은 뼈아픈 수난의 아픔을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 《몽실 언니》, 그와 견주어 몽실오빠라고도 불리우는 《점득이네》,〈무명저고리와 엄마〉, 〈우리들의 5월〉, 〈할매하고 손잡고〉등 일련의 작품들은 그가 우리 역사와 민족에 대한 끈질기고도 뜨거운 애정만으로 한올한올 엮어낸 삼베처럼 그렇게 엮어서 우리에게 내놓은 작품이다. 여느 작가에 의해서는 여간해 다루어지지 않는 주제들을 그는 그가 짊어진 짐처럼 끌어안고 있다.
어느 한번도 그 자신을 위해 염려하지 않는다. 온통 그의 눈에는 불쌍한 사람 천지이고 불쌍한 아이들뿐이다.
그래서 일까? 그의 동화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토끼가 되었건, 송아지가 되었건, 풀이건 심지어 똥까지도 너무도 착하고 어질다.
〈사과나무밭 달님〉의 필준이, 〈황소 아저씨〉에 나오는 황소 아저씨, 〈하느님의 눈물〉의 아기 토끼 돌이, 〈빼떼기〉에 나오는 순진이네 식구들, 〈앵두가 빨갛게 익을 때〉나오는 상민이 아저씨 등 끝이 없다.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사랑하고 자연을 닮은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게 우리의 살아가는 본 바탕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럴 수 있게 하는 그것은 무얼까? 그의 동화에 나오는 바보스러울 만치 어질고 착한 모습을 한 인물들을 떠올리면서 드는 생각이다.
그를 볼 때마다 심히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가 너무 많이 지니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욕심을 부리고 사는 것 같아서 말만 앞세우는 것 같아서 부끄럽고 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안동 시내까지 나와서 우리에게 보리밥을 사주고 그도 한 그릇을 맛나게 비우는 모습을 보고 그의 건강에 대해 조금은 안심을 하고 싶었다. 여러 곳에서 아이들이 편지를 보내며 ‘선생님 아프시니까 답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하는 말을 써넣는다고 한다.
선생님에게 보리밥을 얻어먹고 버스정류장까지 배웅을 받고 하면서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우리에게 이렇게 맑은 영혼을 지닌 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이 글은 《동화읽는어른》1992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