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권정생 선생님

[인물탐구]동화작가 권정생 / 김용락

야야선미 2007. 4. 2. 20:43

[인물탐구]동화작가 권정생  / 김용락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의 필자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내가 적격이 아닌 것 같다. 첫 번 째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주 권정생 선생님을 찾아뵌다는 점이고 두 번 째는 나는 이미 여기 지면에 권정생 선생님에 관련된 글을 수 차례 쓴 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대 초반에 선생님을 만난 이래 불혹을 넘긴 지금까지 때론 가까이서 때론 멀리서 선생님을 지켜보고 모셔오고 있는데 '가까우면 경멸한다'는 서양 속담도 있듯이(물론 내가 선생님께  감히 경멸이라는 불경스런 언어를 입에 올릴 수도 없지만) 아무래도 가까이서 자주 보게 되면 선생님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떨쳐버릴 수 없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도 이젠 이런 인물 탐방류의 글보다는 선생님에 관련하여 제대로 된 작가론이나 작품론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내가 선생님과 마주 앉아 인물 탐방식의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것도 민망한 일이고 선생님 자신이 이런 형식의 대화나 취재에는 절대 응해주지 않으신다.
  애초 이번 취재(취재랄 것도 없지만)에도 결코 응하시지 않겠다는 것을 『우리교육』 독자들이 선생님의 근황을 궁금해 하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정도만 짧게 전해드리자고 설득하여 이 글의 근간이라도 될 만한 이야깃거리를 몇 개 애써 주워 모았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래도 잡지가 교육과 관련된 『우리교육』이라는 게 덕을 본 것 같다.
  다음 에피소드는 이 점을 우리에게 실감케 해준다.  월간지 『신동아』 지난 2월 호에 봉화 전우익 선생과 권정생 선생의 우정이 10 년이라는 식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를 보고 나서 내가 조탑에 들러 선생님 기사 보기 좋던데요 하면서 알은 체를 했다. 전우익, 권정생 두 분의 우정과 특별한 관계를 곁에서 지켜 보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그 기사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가사였다. 그런데 선생님의 반응이 약간 의외였다. 선생님도 그 기사에 굳이 불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하시는 말씀으로 "봉화 전 선생님이 어떤 젊은이를 데리고 왔는데 서울에 중학교 선생님이라 카더라. 그래서 반갑게 맞이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무래도 꼬치꼬치 묻는 게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전 선생님보고 선생님요 이 사람들 서울서 온 학교 선생님이 맞니껴? 하면서 물었더니 봉화 전 선생님은 그냥 웃기만 하시더라. 며칠 뒤 서울에서 전화가 왔는데 그 날 온 사람들이 선생이 아니고 잡지사 기자라고 하면서 그 날 대화 내용을 소형 녹음기로 몰래 녹음했다고  허더라 참! 그게 아마 그 기사인 모양인데 나는 아직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는 그 젊은이들이 사람을 감쪽같이 속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마 내 짐작으로 그 분들이 서울의 잡지사 기자라는 신분을 미리 밝혔더라 면 아마 그 글은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잡지뿐만 아니라 언론 매체들은 조금이라도 장사가 된다 싶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쓴다. 이런 상업주의 필봉에는 선생님은 좋은 먹이감이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도 권 선생님을 가리켜서 우리 나라에서 가장 근대화가 덜 된 사람이라고 말한 적도 있지?  아동문학계에서 주목받을 만한 문학적 업적을 남기고 산골에서 토끼장 만한 집에서 결혼도 못하고 평생을 병마와 싸우면서 주옥같은 동화를 쓰시는 선생님은 뭔가 선정적이고 상업적인 것을 좇는 사람들에게는 눈요기감으로도 분명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선생님께서도 이런 사정을 대강 눈치채셨는지 어디 더 먼 산 속으로 들어 갈 수 없나 사람 찾아오는 것이 이젠 너무 싫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선생님 몸 상태로는 한두 시간만 앉아 있어도 곧바로 몸에 열이 나고 다시 누워야 할 정도로 상한 몸이다.  언젠가 한번 선생님 몸이 어때요 하면서 물었더니 상태가 좋을 때가 보통 사람이 지게로 짐을 한 짐 가득지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이오?  선생은 다른 사람은 잉크로 글을 쓰지만 권 선생님은 자신의 피를  찍어서 글을 쓴다고 말할 정도로 힘들게 작품활동을 하고 계신다.
  이런 건강 상태인 선생님에게 손님이 찾아온다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고통스러운 이율배반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끊임 없이 손님들이 찾아오고 언론매체에서 못살게 군다. 성한 사람이라도 이 정도면 지칠 법한데 몸도 불편하신 선생님에게는 어떻겠는가.  내가 처음 선생님을 찾아뵙던 80년대 초반의 선생님 거처는 하얀 탱자꽃이 피던 탱자나무 울타리가 쳐진 낡은 양철지붕의 조그만 시골 교회의 아랫채 문간방이었고 동네 또한 가난한 시골마을의 전형이었다. 그러던 동네 모습이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변했다.  특히 선생님이 사시는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은 동네 어귀에 대구에서 춘천까지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인터체인지가 생기면서 특히 많이 변했다.  
  고개를 들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앞산 중턱으로 고속도로 진입로가 새로 생겨 쉴 새 없이 차들이 왕래하고 있고 밤이 되어도 가로등 불빛 때문에 마을 전체가 희뿌연 전등불빛과 소음에 휩싸여 있다.  이곳에서는 칠흑같은 어둠이란 이미 옛이야가 된 지 오래이다. 문명의 혜택이라 해야할지 아니면 폐해라  해야할지. 또한 최근에는 마을 전체를 붉고 푸른 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치장했다. 마치 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 때 지붕 개량하고 난 뒤 지붕 위에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마을의 지붕이란 지붕에는 모두 페인트칠을 했다. 선생님 집의 지붕도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길래 여쭤 봤더니 마을 앞으로 고속도로 진입 도로가 생기면서 외부인들에게 마을의 모습이 아름답게 비쳐지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보여주기 위주의 전시행정이라고 하더니 관에서 하는 일이란 게 수십 년이 지나도 그야말로 변하지 않는 구태의 연속이다.
  동네의 모습만 변한 게 아니다. 80년대 중반 소년소설 『몽실언니』의 인세 60만원과 동네 청년들의 조력으로 지은 토끼장 같은 선생님 집 처마에 가작(비가리개)을 달았다. 여름날 햇볕이 드는 것과 비바람 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집의 모양새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그 가작 밑의 작은 이동식 마루에 앉아 바라보니 앞 개울에는 그저께 내린 봄비로 개울물이 제법 불어나 있었고 선생님 댁 울타리의 개나리를 비롯해 꽃들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들판에는 농사일로 분주하게 오가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바로 앞 들판에 있는 사과나무 밭의 과수들이 모두 베어진 채 밑둥치가 땅 위로 나뒹굴고 있었다. 보니 이제 한창 열매가 열릴 만한 수령의 나무들인 것 같았다.
  "아니, 선생님 저건 사과가 한창 열리겠는데 왜 베어내지요?" 하고 물었더니 "이젠 농부도 없고 농촌은  없다" 하고 대답하신다. 무슨 말씀인가 하니 농민들도 해마다 손익을 계산해보고 조금이라도 손해가 된다 싶으면 곧바로 폐작을 한다는 것이었다. 베어진 사과나무를 심은 지가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 지난해 사과값이 한 상자에 5천원에서 7천원 정도 가니까 과수원 주인이 나무를 베어내고 다른 작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선생님께서는 이미 농부가 없다 단지장사꾼만 있지, 농사란 짓다가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 어떻게 매년 손익만 따질 수가 있노라고 하셨다. 인간에 대한 좀더 크게는 자연에 대한 교감과 애정이 없이 오로지 이익만을 좇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자 시속과 세태에 따라 급변하는 세상 인심에 대한 무거운 질타로 들렸다.
  나와 함께 간 『우리교육』지의 프리랜서 사진기자가 『우리교육』을 한 권 내놓으면서 의례적으로 "선생님 『우리교육』 어때요? " 하고 물으니 "며칠 전에 한 권 우편으로 보내줘서 봤더니  온통 사진뿐이더라, 뭐 읽을 만한 내용이 있어야지. 내용은 없고 사진뿐이더라" 하시며 아주 야박하게 평을 하셨다. 곁에서 듣고 있던 내가 민망해서 "그렇지 않을 걸요 『우리교육』이 좋은 잡지로 소문 났는데……" 하니까 곧바로 받아서 "『우리교육』도 거품을 빼야돼" 하면서 거품이란  단어를 몇 번 되내이면서 되받아 치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며칠 전에도 대구에 있는 어떤 은행의 사보 제작 대행자가 와서 대구 경북 출신 유명 작가들의 이야기를 꾸민다면서 다짜고짜 인터뷰하고 사진도 찍으려고 해서 화를 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사람 이야기로 사보 만드는 데 3억이 책정되었다고 했다. "이런 아이엠에프 시대에 사보 만드는 데 3억이  뭐꼬. 차라리 그 돈으로 실업자들 일자리를 만들든지 아니면 시, 소설 써놓고 출판 못해 애태우는 사람들의 출판비나 공연비 지원하는 것이 훨씬 문화에도 도움이 되겠다"고 했다 (뒤에 대구에서 우연히 그 은행사보 책임자를 만나 봤더니 예산이 3억이 아니고 1억이 채 못된다고 말하면서 전달자가 뭔가 착오를 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권 선생님 댁을 3월 22일과 31일 두 번 방문했다. 처음에는 내일신문 안동사업부에서 일하는 김상현 시인과 직원들과 함께 갔다. 이 날은 이 지역에 건설하려는 골프장을 두고 지역 주민들의 반대운동과 골프장 건설에  앞장서는 지역유지들의 갈등을 화두로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지난해 녹색평론사에서 펴낸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생태문제에 대한 관심을 집중적으로 표명하신 적도 있지만 이 날도 골프장 건설을 주도하고 있는 몇몇 유지들의   행태와 세수입만 노려 무분별하게 골프장을 건설하려는 당국의 입장에 대해 언짢아했다.
  문학이야기를 꺼내자 요즘은 작품도 제대로 쓰지 않고 있다는 말씀과 함께 일본에서 『핵과 전쟁이 보인다』는 제목으로 세계 아동문학 가운데서 핵과 전쟁을 다룬 작품의 목록을 모은 책을 보여주었다 그 책에는 선생님의 작품도 소개되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팔리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책을 기획해서 내는 안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 책을 보면서 잠깐 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번역문제로 옮겨갔다.
  흔히 번역은 반역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이네 같은 시인은 프랑스 말로 번역된 자기의 시를 두고 '지푸라기로 채워 놓은 달빛' 같다는 말로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도 있지만 아동문학에서도 번역문제는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선생님의 작품 가운데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있는데 이 작품을 일본의 소인사에서 번역을 해서 작품집에 실었다. 번역위원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금단의 땅』의 작가 이회성씨도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작품 속에 나오는 제비를 참새로, 금복이라는 아이 이름을 금붕어로, 물레를 물레방아로 각각 번역해 놓았더라고 말해 그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포복절도하였다.
  선생님은 "시는 시대가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시면서 러시아의 비극적 시인 마야콥스키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울러 요즘 우리 시가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 어렵고 지나치게 상업적이 아닌지 하면서 우려를 나타냈다. 아마 시를 쓰는 나와 김상현 시인이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방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밖으로 흘러나오는 대화 내용이 자연스레 귀에 들렸다. "섣불리 이래라 저래라 말 못한다. 본인이 알아서 하라. 엄마가 혼자라도 사랑할 수 있고 키울 수 있으면 낳아라"  통화가 끝난 후 무슨 전화냐고 여쭈었더니 어떤 미혼모가 애를 낳을지 말지를 물어왔다는 것이었다.
  수년 전만 하더라도 방 안에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심심찮게 어린이들이 문 밖에 와서 "집사님요, 동화책 빌리러 왔니더" 하곤 했는데 근래에는 그런 일이 통 없었다. 간혹 동네 할머니들이나 다녀갈 뿐. 선생님이 계시는 조탑리에는 모두 89가구가 살고 있는데 초등학생은 겨우 두 명뿐이라고 했다. 인근 30리 안팎에 있는 구계·어담·명진·일직초등학교를 합하여도 올해신입생은 19명에 불과했다.  과거 같으면 수백 명은 족히 되었을 텐데 농촌 고령화 현상의 한 극단을 보여주는 수치이다.
  아동문학은 어린이와 함께 있어야 할 텐데 과연 선생님은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했다. 요즘 어떤 작품을 쓰시느냐?  물었더니 수녀들이 주관하는 『바오로의 딸』이라는 잡지에 장편 동화를 연재하고 있는데 그것도 힘에 벅차다고 말씀하신다.
  두 번째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날은 낯선 손님을 한 분 만났다.  이 분은 선생님의 동화 『강아지똥』에 그림을 곁들여 펴낸 출판사에서 일하시는 분이었다. 그 출판사에서 낸 책에 실린 그림에는 달구지 바퀴가 네 개로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이 문제가 된 것 같았다. 우리 풍물이나 농기구를 보면 일반적으로 달구지에는 큰 바퀴 두 개뿐이다.  그런데 삽화를 그린 화가가 큰 바퀴 두 개에다 작은 바퀴 두 개 해서 모두 네 개로 그려 넣었다. 초판이 나온 후 그림을 정정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계속 고쳐지지 않길래 정히 그러면 작품집을 그만 내겠다고 하니까 책임자가 부랴부랴 시골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선생님 뜻은 최근 일본에서 그 책을 번역하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사실과 다르게 그려진 것을 계속해서 그대로 둘 수는 없잖은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세 문제도 다소 있는 것 같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님께서 직접 대구로 전화를 해서 절대 쓰지 말라고 해서 더 이상 상술은 하지 않지만 수년 전 몽실언니를 드라마화할 때 방송국에서 소위 원작료라면서 말도 안 되게 쥐꼬리만한 고료를 지불해 주위 사람들을 분노케 했던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해보면 나는 출판사들이 선생님을 조금만 더 배려해서 일들을 처리해주었으면 한다.  사실 선생님은 평생 사시는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는 분이라 세상물정에 밝지 못하고 더구나 돈 문제라면 더욱 그러하신 분이다.  노파심에서 밝힌다면 선생님만큼 물욕이 없으신 분도 아마 드물 것이다.  그러나 앞의 이야기는 물욕 운운 이전의 원칙과 예의에 관한 문제이다.
  선생님 가족은 뺑덕이와 두데기이다.  뺑덕이는 토종에 가까운 개로 오래된 사이고 두데기는 애완견의 일종이다.  털이 복스럽고 이국적인 놈인데 누군가가 길거리에다 내다 버린 것을 주어와서  키우고 있다.  집 앞 살구나무는 올 해 새싹이 트지 않았다.  아마 청석위에 지은 집이라 흙이 좋지 않은 때문인지 개나리꽃도 예년같이 많이 피지 않았다.  혼자서 외롭게 사시는 선생님에게 꽃이라도 많이 피고 나무라도 주변에서 잘 자라주면 좋을 텐데…….
  선생님은 5년 전에 이 란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근황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이 글의 미덕일 텐데 과연 제대로 소임을 다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과 관련한 몇몇 이야기들에서 눈밝은 독자들은 선생님의 근황과 그 분의 삶과 문학을 읽어냈으면 좋겠다.▣ (《우리교육》1998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