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를 불러보세요 1 - 할매가 아프다
할매가 아프다
알림장을 다 쓰고, 선생님이 “통과!” 하기가 바쁘게 야야는 발걸음을 재우쳐 거의 반달음을 쳤다. 눈을 감아도 다닐 만큼 발에 붙은 길인데도 오늘은 자꾸 지뻑거리고 헛디뎌서 툭하면 앞으로 고꾸라진다.
‘할매는 인자 일어나 앉았는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까지 할매는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자꾸 까라지기만 했다.
‘아무리 아파도 우리 할매는 이렇게 사나흘씩이나 아픈 적이 없었는데.’
발길이 투둑투둑 걷어 채이면서도 할매 걱정이 자꾸 되살아났다.
‘아아참! 오늘 사육장 청소하는 날인데.’
학교 가서 고개 푹 숙이고 한참동안 혼날 생각을 하니 속이 답답하다.
‘아, 정말! 왜 이렇게 깜빡깜빡 하는지.’
요 며칠 자꾸만 할 일을 깜빡해서 담임선생님이나 동무들한테 미안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아, 그건 내일 가서 보지 뭐. 한 몇 분만 참고 서 있으면 지나갈 건데 뭐.’
마음을 그렇게 고쳐먹고 나니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 듯 했다.
“아이쿠쿠, 아후우 아, 아퍼!”
어서 집으로 가자고 걸음을 내딛는데 발길이 자꾸 걸채여 군드러진다.
‘밥물이라도 한 숟가락 넘어갔는가?’
오늘 아침에도 엄마는 밥물을 곱게 밭쳐 할매 입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할매는 그것마저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반 넘게 흘려버렸지. 야야는 옆으로 자꾸만 쓰러지려는 할매의 등을 받치고 앉아서 밥물이 흘러내리는 입만 애타게 보다가 학교로 왔다.
학교에 있어도 마음은 온종일 할매한테 가 있었다. 동무들은 쉬는 시간만 기다렸다는 듯 종소리 들리기 무섭게 사육장으로 운동장으로 꿈동산으로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놀았지만 야야는 관심도 없었다. 얼이 거의 빠진 채로 자리에 앉았다가 수업 시작종이 울리면 다음 시간 책을 꺼냈다.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기 무섭게 나갔던 동무들이 한 무리 들어와 자리에 앉으면서 재잘대었다.
“왕관 앵무 봤나? 밖에 나왔던데. 머리에 진짜 왕관 쓴 거 같제?”
“걔들 인자 완전 적응된 거 같제? 밖에 나오는 거 보니까.”
“야야, 토끼도 밖으로 나와서 뛰어다니더라.”
“야야, 토끼한테 손 한 번 깨물려 보는 게 소원이라 했제? 내가 오늘 물렸거든. 니도 있었으면 소원 이룰 수 있었는데.”
미진이는 야야 어깨를 두드리며 아주 아쉬워했다.
사육장 청소하러 갈 때마다 토끼가 얼마나 이쁘고 탐스럽던지. 조그만 이빨을 보이면서 풀잎이며 고구마를 오물오물 아그작아그작 갉아먹는 모습이 어찌나 깜찍한지 야야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사르르 떨었다. 만지기만 해도 포근한 털에 온몸이 파묻힌 것 같이 보들보들한 토끼털을 만지면서 야야는 신음하듯 말했다.
“아아아, 토끼한테 한 번 물려봤으면. 야아들아, 나는 토끼한테 한 번 물려보는 게 소원이다.”
아이들이 별별 소원이 다 있다고 웃었지만 야야는 정말 토끼한테 꼭 한번 물려보고 싶었다. ‘고 쪼꼬만 이빨로 손가락을 한 번만 깨물어 주면….’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렸다.
아이들은 다음 쉬는 시간에도 하나도 남지 않고 우르르 몰려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또 종알거린다.
“2반 선생님 있제? 맨날 순주만 좋아한다데?”
“순주가 시험 많이 틀린 날은 아무도 혼 안 내고 넘어가는 거 아나?”
“왜?”
“순주는 혼 안 낼려고 그러지. 다른 아이들만 혼 낼 수는 없으니까. 진짜 웃기제?”
또 다음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행자 자리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야들아, 2차 때는 우리가 응원상이라도 받아야 안 되겠나?”
“무슨 춤 할지 한 개씩 생각해 봐라.”
“전에처럼 너무 어려운 거 하지 말고 쉬운 동작으로 만들자.”
“응원복은 어떻게 할 건데?”
“지금 그게 문제가? 춤하고 노래를 정해야 거기에 옷을 맞추지.”
1차 체육대회 끝난 게 엊그제인데 아이들은 벌써 다음 달 2차 체육대회 걱정을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무슨 이야깃거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지. 날마다 어울려 놀 때는 잘 몰랐는데 혼자 떨어져 앉아 있어보니 동무들 이야깃거리가 끝도 없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안 되겠다. 오후에 꿈동산에 다시 모여서 노래랑 춤부터 정하자.”
“그래, 응원 모둠은 한 사람도 빠지기 없기.”
모둠장 행자가 한 번 더 못을 박았지만 야야는 선생님이 “통과!” 하기가 무섭게 튕기다시피 교문 밖으로 내달았다. “아으흐흐 아파라.” 마음은 벌써 저만치 앞서서 집 앞 골목을 들어서는데 다리는 저 뒤에서 지뻑거리다 앞으로 고꾸라진다.
그저께 아침에 할매는 무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야야를 불러 깨우는 것 같더니 그 자리서 까무룩 쓰러져 버렸다. 사흘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대로 누워만 있다. 침 잘 놓는 본동 양반이 다녀가고 인산의원 의사도 왔다갔지만 조금도 낫는 것 같지가 않다. 그저 몸살기가 좀 있겠거니 했는데 몸져누운 지 나흘째가 되어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지도 못한다.
여느 때 할매 같으면 미역찹쌀장국 한 양푼 먹고 거뜬하게 털고 있어났다.
“아이구우, 와 이래 으슬으슬 한기가 드는지 모르겠대이.”
할매 말이 떨어지면 엄마는 미역찹쌀장국을 끓였다.
“아침나절부터 자꾸 어질어질하네.”
그러면 엄마는 미역을 불리고 찹쌀반죽을 했다. 엄마가 미역을 잘라 물에 불리고 장국물을 우려내면 야야는 찹쌀새알을 비볐다.
“엄마 이번에는 두 알 해 볼게요.”
“한꺼번에 세 알도 할 수 있어요.”
찹쌀반죽을 조그맣게 떼어 손바닥에 놓고 동글동글 살살 비비면 구슬같이 동그랗게 새알이 만들어졌다. 반죽덩이를 조그맣게 두 개 떼어 놓거나 세 개를 떼어놓고 한꺼번에 비비면 두 알도 되고 세 알도 되었다.
뜨거운 찹쌀장국을 먹으면 할매 콧잔등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히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밑도 촉촉이 젖었다. 할매는 수건으로 콧등을 꼭꼭 눌러 닦고 입 언저리도 꼭꼭 눌렀다. 놋양푼이 빌 때쯤이면 이마에서 방울방울 땀이 흘렀다. 할매가 하얀 손수건으로 이마를 꼭꼭 눌러 닦을 때마다 ‘할매는 나이가 들어도 참 곱고 단정하구나.’ 싶었다. 야야는 저도 모르게 할매처럼 이마를 꼭꼭 눌러 닦아 보기도 했다. 할매는 땀을 흘리면서 찹쌀장국 한 양푼을 다 비웠다. 골을 메운다고 했다.
놋양푼을 들고 남은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면 구들목에 깔아둔 이불을 덮고 땀을 내었다. 할매는 그렇게 땀을 푹 내고 나면 거뜬히 털고 일어났다. 야야도 조금 남은 찹쌀장국을 얻어먹고 할매 옆에 누워 늘어져라 낮잠을 잤다. 할매가 으슬으슬 한기가 든다고 하면 야야는 ‘오늘도 찹쌀새알을 먹겠구나.’하고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처음 할매가 못 일어나던 날도 찹쌀장국 한 양푼이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줄 알았다. 야야뿐 아니라 온 식구들이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찹쌀장국도 소용없었다. 할매는 그토록 좋아하던 찹쌀장국을 한 숟가락도 먹지 못했다. 찹쌀새알 한 알 씹지 못하고 미역 한 오라기도 삼키지 못했다. 국물만 몇 번 받아먹었지만 그것도 반은 입가로 흘러내렸다. 반쯤 벌어진 입술로 국물이 자꾸만 새어나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할매는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자꾸 더 까라졌다. 들머리 본동 양반이 날마다 침을 놓았지만 좀처럼 낫지 않았다. 삼동네에서 본동 양반만큼 침 잘 놓는 사람은 없다더니 할매를 일으켜 앉히지는 못했다. 할매는 아버지가 껴안아서 앉혀놓으면 덜러덩 나동그라졌다.
집 앞까지 다 와서 고샅으로 들어서려는데 학교 뒷동산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이 둘씩 셋씩 서성대는 걸 보니 벌써 청소마치고 과수원 길로 모이는 모양이다. 야야는 머릿속이 또 뒤숭숭해지기 시작한다.
‘오늘 모여서 정하자고 하지만 사실 한 두 번 만에 다 정해졌던 적이 있냐고? 오늘도 시끌시끌하다가 흐지부지 끝날 게 뻔하지.’
‘춤이랑 노래랑 다 정해지고 나면 그때 연습하면 되지!’
동무들하고 함께 하지 못한 걸 애써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리며 집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은 제발 할매가 일어나 앉았다가, ‘우리 강생이 학교 갔다 왔능가?’ 하고 말해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