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를 불러보세요 8 - 외톨이가 되면 어쩌노?
외톨이가 되면 어쩌노?
“언니야, 내가 물 퍼 주께.”
야야는 튕기듯이 일어나 새밋가로 달려갔다. 안장실 할매집 숙이 언니가 정구지를 한 소쿠리 씻으러 왔다. 언니가 정구지 다 씻을 때까지는 말동무가 생겼다.
“언니야, 나도 같이 다듬으까?”
“괜찮다. 니는 쉬어라.”
속도 모르는 숙이 언니는 야야를 자꾸 밀어낸다. 온종일 할매하고 씨름하는 야야한테 정구지 다듬는 일까지 시키고 싶지 않은 언니 마음이야 안다.
“아니, 나도 하고 싶다.”
야야는 숙이 언니 옆에 꼭 붙어 앉아서 정구지도 다듬어 가려놓고 펌프질해서 물도 퍼주고 모처럼 생기가 넘친다.
숙이 언니는 통에다 물을 가득 받아 정구지를 일렁일렁 훌렁훌렁 흔들어 건져 올렸다. 조금씩 잡고 한 오라기라도 헝클어질세라 살살 어루만지듯 가지런하게 씻어놓던 엄마하고 영 딴판이다.
‘아하!’
보기만 해도 후련한 방법이다.
‘언니야, 나도 해보께, 나도 해보께.’
야야는 숙이 언니가 하던 것처럼 정구지가 둥둥 뜨는 통에 손을 넣고 흔들흘들 훌렁훌렁 한줌씩 건져내었다.
“언니야, 이거 너무 재미있다.”
“니가 엔간히 심심하기는 심심한 갑다. 그기 뭐가 그래 재미있노?”
숙이 언니는 야야가 하는 대로 웃으면서 보고만 있었다. 물을 그득하게 받아놓고 마구 헝클어가면서 흔들흔들 일렁일렁 건져 올릴 때마다 속이 후련하다.
‘엄마는 가지런히, 가지런히 괜히 그리 어렵고 갑갑하게 시키고.’
‘하여튼 할매나 엄마나 일 어렵게 시키는 데는 뭐 있다니까.’
야야는 자리에도 없는 엄마 흉을 보면서 마음껏 흔들어 씻었다.
“야야, 고만해라. 너무 씻으면 풋내난다.”
숙이 언니가 말리지 않았으면 야야는 자꾸자꾸 씻었을 거다. 숙이 언니가 가고 나니 또 집안은 잠잠해졌다. 할매 엎치락뒤치락 하는 소리만 들리고 가끔 돼지 “꾸우욱 꾸룩” 하는 소리만 들린다.
할매도 잠이 들고, 숙제도 다 했고. 야야는 몇 번이나 읽은 만화책을 뒤적거리다가 마당으로 내려섰다. 마중물을 붓고 괜히 펌프질도 해 보다가, 돼지우리 들여다보다가 구정물도 한 바가지 퍼 주고, 알자리 가서 달걀 있나 한 번 뒤적거려도 보고.
‘아아, 심심해.’
집안을 뱅글뱅글 돌아보지만 심심풀이로 가지고 놀만한 것 하나 없다. 지금쯤 아이들은 꿈동산이든 과수원 길에 모여서 춤 연습을 하고 있을 텐데.
‘춤 연습이나 해볼까?’
그러나 그것도 금방 시들해진다. 춤도 여럿이 모여서 추어야 재미가 있지. 노래도 안 틀고, 함께 하는 동무도 없이 혼자 펄쩍펄쩍 뛰다보니 춤인지 체조인지 아무 재미도 없다. 엄마는 할매 잠들고 나면 틈틈이 책도 좀 보고 공부도 좀 하라고 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무리 따분하고 온몸에 좀이 쑤셔도 책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아, 맞다. 엄마도 정구지 베어 왔던 거 같은데.’
아침밥 하러 들어올 때 엄마가 정구지를 베어온 게 퍼뜩 떠올랐다. 야야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갔다. 살강 밑에 소쿠리를 보니 정구지가 제법 많이 있다. 갑자기 할 일이 생기자 발걸음도 가볍고 손놀림도 빠르다. 축담 그늘진 곳에다 정구지를 쏟아놓고 진잎을 떼어냈다.
마중물을 한 바가지 붓고 펌프질을 했다. “부룩 부루룩” 거리더니 물이 쏟아져 나왔다. 야야는 물을 한 통 받아서 정구지를 풀어놓았다. 일렁일렁 훌렁훌렁, 정구지를 한 줌씩 건져 올릴 때마다 얼마나 시원한지. 손도 시원하고 일렁일렁 헐렁헐렁 속까지 시원했다. 손끝부터 머리끝까지 다 시원해지는 것 같다. 한 번 두 번 헹구고 이제 한 번만 더 해야지 하는데 할매가 부른다.
“야아야, 그래하면 못 쓴대이.”
‘아, 할마씨. 또 시작이다. 언제 일어났노?’
할매가 언제 깨었던지 일어나 앉아 야야를 내려다보았다. 담뱃대까지 들고 흔들면서 말린다.
“그거 그리 헝클어 씻으면 아무데도 못 씬다. 가지런히 얌전하이 씻어놔야지.”
‘아아, 할마씨 말 좀 하게 됐다고 인자 오만 데 다 입을 댄다니까.’
야야는 정구지 소쿠리를 살강 밑에 소리가 나도록 탁 놓고 밖으로 나왔다. 할매 들으라고 큰 소리로 “쯧쯔” 혀까지 차면서. 야야가 그러든 말든 할매 잔소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가지런히 씻어놔야 장떡을 구워놔도 반듯하지. 오이소박이에 넣더라도 길이를 똑같이 썰어서 넣어야 음식이 얌전하고 단정하지.”
‘치이, 입에 들어가면 똑같은데 뭘. 음식이 얌전하고 단정한 거는 또 뭐꼬?’
야야는 아무 말도 않고 손가락으로 마루 골만 후벼 팠다.
“정구지고 가랑파고 그리 헝클어 봐라. 음식이 상스럽지.”
‘치이, 그라면 숙이 언니 저거 음식은 상스럽다는 말이가? 맛만 좋더마는.’
야야는 할매 말마다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고 귓등으로 듣는 척만 했다.
“배울 때 잘 배워야 하는 기다. 너거 엄마만큼만 따라하면 어느 집에 가도 인사 듣고 산다.”
‘으이그으, 괜히 시작해 가지고. 내가 미쳤지.’
야야는 할매 잔소리가 다 제탓이라 생각하면서 ‘으이그, 으이그’ 속으로만 꿍얼거렸다.
“가랑파 씻을 때도 가지런히 씻어야 되는기……”
언제 끝이 날지, 숨을 한 번 돌리고 또 이어진다.
“파를 데칠 때는 뿌리부터 먼저 넣어야 뿌리하고 이파리하고 항꾼에 데쳐지거든. 뿌리가 굵으니 잘 안 익어. 그래서 가지런히 씻어 건져야 되는 기라. 정구지고 시금치고 나무새 씻을 때 그래서 가지런히 가지런히 하는 기다.”
“할매예, 빨래 걷어 오께예.”
할매 말을 이쯤에서라도 끊으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야야는 얼른 일어나서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침 먹고 엄마가 해 놓고 간 빨래가 까슬까슬 잘도 말랐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교실이 시끌벅적하다.
“니이 어제 혼 안 났나?”
“나는 아침부터 허락받았거든. 혼 안 나지 당연히.”
“나는 말도 안하고 늦게 갔다가 된통 당했다. 다음에는 아마 못 갈걸.”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해 하는데 영진이가 말했다.
“야야, 어제 우리 집에서 생일 파티 했다. 니는 어차피 못 갈 거 같아서 말 안했다. 미안!”
눈물이 핑 돌았다.
‘아참, 와 이래 눈물도 잘 나노?’
급하게 눈가를 훔치는데 영진이가 당황스러워 말까지 더듬는다.
“아아 야야, 니만 빼고 놀라고 그랬던 거는 아이다. 하 할매 땜에 니는 모 못 갈 건데 우리끼리 노 놀러 간다하면 서 섭섭할까봐.”
“아니, 괜찮다. 알았어도 못 가는 거 맞는데, 뭐. 그런데 선물도 못 줘서 우짜노? 내가 더 미안하지 뭐.”
애써 웃으면서 말은 했지만 자꾸만 가슴 저쪽이 비질하듯이 쏴아아 쓸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생일 파티 그것 좀 빠졌다고 울 일은 아니다.
‘가봐야 음식 차려주는 것 좀 먹고, 남의 이야기나 하면서 까르륵 댈 게 뻔하지. 남의 이야기도 뭐어 좋은 얘기는 하나도 없고 흉보거나 깔보는 얘기들이지 뭐.’
‘그러고 나서 뭐, 노래 부르고 춤 좀 흉내내다가 집에 갔겠지, 뭐.’
아무리 별 일 아닌 것처럼 넘어가려고 해도 가슴이 휑하니 빈 것 같이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집에서 날마다 할매랑 씨름하고 있는 동안 동무들하고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 진 것이다.
‘아, 이러다가 진짜로 외톨이 되는 거 아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