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할매를 불러보세요 14 - 불가사리가 마늘 까는 날

야야선미 2010. 9. 30. 17:21

불가사리가 마늘 까는 날

“야야.”

할매가 낮잠이 든 사이에 야야도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할매가 부르는 소리에 화다닥 놀라 깨어 보니 환한 대낮이다.

“저어기 담에 깻대 세워놓은 거 좀 뒤집어라.”

“예에.”

아직도 잠이 덜 깨어 무겁게 대답한다.

“야야, 저어 저기. 달구새끼가 호박 오그락지 말리는 거 엎었다. 담아야 되겠다.”

“예에.”

“야야, 요강 좀.”

“야야, 저거 짚소쿠리 갖다가 사랑방 아궁이 좀 막아라. 고양이 들어가면 큰일 난다.”

“야야, 수건 좀 빨아 온나. 손바닥이 와이래 끈적거리노.”

야야는 할매가 부를 때마다 대답을 하고 일어섰지만 속으로는 정말 죽을 맛이다. 무슨 일을 시키려면 한 번에 좀 시키지. 쉬지 않고 불러대었다. 날이 갈수록 할매는 더 심하게 불러댄다. 잠깐이라도 야야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불러댔다. 그럴 때마다 야야는 속이 끓다 못해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러다가 정말 큰병이라도 드는 것 아닌가 싶어 겁이 날 지경이다. 할매가 애타게 찾으면 찾을수록 야야는 자꾸 멀리 도망가고 싶어졌다.

‘할매 눈앞에서 진짜로 확 사라져버릴까?’

‘아아 정말 미칠 것 같아. 이러다가 내가 내 정신 가지고 못 살 것 같아.’

이제 할매 목소리도 듣기 싫다. “야야, 우리강생이!” 하는 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벌레가 기어드는 것처럼 스멀거린다. 아무래도 얼마 가지 않아 얼이 다 빠져버릴 것만 같다. 야야는 되도록 멀찌감치 자리를 잡는다. 작은방 쪽마루에 엎드려 숙제하고 사랑방에 건너가서 드러눕고.

“야야, 이리 와서 놀아라. 어데로 가고 얼굴도 안 보여 주노.”

시키다가 시키다가 더 시킬 일이 보이지 않으면 인제 할매 눈앞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게 했다.

“야아야, 어데 있노?”

“숙제합니더, 숙제.”

야야는 이제 달려 나가지도 않고 소리만 크게 대답한다.

“여어 나와서 하지. 우리 강생이 얼굴 좀 보자.”

‘아, 할마씨. 얼굴 봐서 뭐하게? 하도 봐서 얼굴 닳겠네.’

꿈쩍도 하기 싫다.

“야아야, 할매 등 근지럽다. 등긁이 좀 찾아 온나.”

“에에”

야야는 대답부터 크게 해놓고 느릿하게 일어난다. 마루 이쪽저쪽 큰방 작은방 천천히 다니면서 등긁이를 찾는다.

“아이구우, 야야. 할매 등 근질거려 죽겠다. 못 찾겠으면 고마 손으로 긁어라.”

야야는 할매 몸에 손대는 것도 싫어졌다. 등긁이를 찾아 던지듯이 놓고 돌아서는데 할매가 거의 우는 소리로 말한다.

“야아야, 손에 쥐어 주지. 거어다 던지면 할미가 어쩌라고?”

돌아보니 한참 아래 발치에 떨어져있다. 허리를 굽혀 주워드리고 다시 돌아서 나오다가 야야는 또 한숨을 쉬었다.

‘아, 내가 자꾸 왜 이러지?’

날이 갈수록 모질게 변해가는 것 같아 스스로 봐도 겁이 난다. 잠깐 조용하다 싶더니 할매가 또 불러댄다.

“야야, 여기서 책 읽어라. 우리 강생이 책 읽는 소리 좀 들어보자.”

“예에.”

등긁이를 아무데나 집어 던진 게 미안해서 이번에는 순순히 할매 앞에 엎드렸다. 일부러 영어책을 꺼냈다. 영어책을 펴서 중얼중얼 읽기 시작한다.

“아이구구, 우리 강생이 책 읽는 소리도 곱네.”

못 들은 척 소리를 더 크게 내어 읽는다.

“너거 오래비들도 영어를 잘 했대이. 작은 오래비는 미국넘들하고 말도 잘 한다.”

한 마디 대꾸도 않고 책만 들여다보는데 한번 시작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요새는 시집간 아낙들도 공부하러 댕기더라. 우리 강생이는 공부 마이 해서 박사까지 해라.”

“너거들 크면 여자 박사도 많을 게다. 여자 군수도 나오겠지? 우리 강생이 밀양군수는 한번 해라.”

“할배는 너거 아버지가 국회의원은 한 번 할끼라 캤는데.”

할매 이야기는 끝이 없고 야야 눈에는 이미 아무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야야는 더 엎드려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와? 또 사랑에 내려가나?”

할매는 야야가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다급하게 묻는다. 화들짝 놀란 듯한 얼굴을 보니 조금 누그려진다.

“아니예. 오줌 누러 갑니더.”

별로 마렵지도 않는 오줌을 억지로 누고 야야는 슬그머니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할매 옆에 더 오래 있었으면 분명히 할매 말끝에 소리라도 지르고 말았을 것이다. 사랑방에 누워 숨을 돌리고 마음이 가라앉도록 기다리는데 할매는 또 염불을 시작했다.

“나무관세음보살.

강생이 강생이 우리 강생이.

어여쁜 우리 강생이.

내 무슨 죄를 받아

저 어린 애를 파 먹는공?

나무관세음보살.”

‘아아, 또 시작이다. 저 염불 같잖은 염불. 이놈의 지옥체험학습은 와 이래 기노?’

할매는 염불이라고 하지만 야야는 들을 때 마다 귀를 틀어막고 싶다. 들으면 들을수록 머릿속에 불이 날 것처럼 뜨거워지고 가슴이 화닥화닥 터질 것같이 답답해졌다.

가정체험학습을 시작하고부터 야야랑 할매는 더 나빠졌다.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둘이만 붙어 있으니 서로서로 상처만 더 주고받는 꼴이다. 어쩌다 안장실 할매가 오면 조금 나은 듯하다가 결국에는 불만 더 지피는 꼴이 되고

‘어서 나가서 할매 눈앞에 어른거려야 저 염불을 그칠 텐데.’

그래도 야야는 버티고 누워 있었다. 할매 염불에 지고 싶지 않았다.

“대동강물 꽁꽁 얼어도

 봄이 되면 풀어지고

미나릿강 저 얼음도

봄이 되면 녹더마는

다리다리 내 다리는

하마 언제 풀릴란지.

이 다리 풀린 날에

우리 강생이 업고지고

동네방네 춤을 추지

암만 춤을 추고말고.”

‘치이, 그 다리가 풀린다고? 내를 업고 춤을 춘다고? 그 다리 풀리는 거 기다리느니 불가사리가 마늘 까는 날 기다리겠다.’

“다리 다리 수산 다리.

이영범이 적선다리.

다리 다리 내 다리

이 다리는 어데 쓸꼬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아무리 그래 봐라. 오늘은 절대로 안 나간다.’

야야는 온몸을 더욱 동그랗게 옹그려 아랫목 쪽으로 숨어들었다. 아무리 문을 열어놓아도 할매 앉은 마루 끝에서 절대로 보이지 않도록 안쪽으로 안쪽으로 옹그리고 누웠다.

“영감 영감, 무정한 영감

인자 고마 날 데려 거소

이 할마이 안됐거든

날 좀 데리고 가소.

영감 영감 박광봉이 영감

살아생전 버린 할마이

저승엘랑 데려가지.”

‘아아아악!’

야야는 하는 수 없이 다리를 쭉 뻗었다. 두 다리로 벽을 박차고 방바닥에 쭉 미끌어져 방문까지 치올라갔다. 할매한테 머리끝만 겨우 보이도록 누워서 귀는 꼭 막았다.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어서 이제 건성으로 들을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들을 때마다 야야는 온몸이 부르르 떨리도록 싫다. 할매는 야야 얼굴을 보더니 조금 누그러진 듯 담뱃대를 찾아 들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할매가 다시 야야를 부른다.

“야야, 오줌 누자.”

“예에”

요강을 가져다 놓고 할매를 끌어안았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면서 허리를 천천히 굽히고 할매를 살살 내려놓아야하는데 이번에는 어정쩡하게 서서 한 번에 털썩 놓아버렸다. “아이쿠우, 아야야” 할매가 비명을 질렀다. 오줌을 다 눌 동안 한눈을 팔고 섰다가 할매를 끌어안았다. 할매가 한 손으로 바지를 힘겹게 끌어올릴 동안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지 않고 할매 두 팔을 잡은 채 뻣뻣하게 서 있으니 할매 팔이 바지에 닿지도 않는다. 결국 바지를 다 올리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야는 할매를 요 위에 털썩 옮겨놓고 요강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애꿎은 요강을 새밋가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동댕이쳤다. 요강에 든 오줌이 튀었다. 입이고 얼굴에 튀어 올라 뒤집어썼다.

“아이 씨. 퉤퉤”

할매 보란 듯이 요강을 집어던진 스스로에게도 화가 나고 냄새나는 오줌을 덮어쓴 것도 화가 나서 못 참을 지경이다. 바가지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구고 찬물을 퍼 올려 ‘푸르륵푸르륵’ 얼굴도 씻었다. 괜시리 ‘부욱 푸루룩’ 펌프를 잣는다. 물을 두 통이나 퍼 올리며 힘을 빼고 나니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속이 좀 가라앉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기모터를 달지 않고 펌프를 그대로 남겨 놓은 건 잘한 것 같다. 숨을 돌려 화를 좀 가라앉히고 돌아섰다. 할매가 울퉁불퉁한 요 자리에 쓰러지듯 누워 아직도 다 올리지 못한 바지를 추스르느라 애를 쓰다가 한숨을 흘렸다.

“아이구우 내가 어서 죽어야 저 어린 거 고생을 안 시킬 건데. 갈 사람은 가야될 건데, 어째 이래 모진지.”

‘할마씨, 인자는 저 수법이야. 마음 약해지구로.’

할매가 저렇게 마음약한 소리를 하면 야야는 더 삐뚤어졌다.

‘아, 어서 내일 아침이 되었으면.’

오늘로 끝이다. 올해 가정체험학습 아니 지옥체험학습은 너무 길었다. 할매하고 둘이서만 지낸 닷새가 두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들게 만들었다. 야야는 길고도 긴 가정체험학습이 정말 지옥처럼 여겨졌다.

‘아, 드디어 내일! 학교에 간다.’

일찌감치 학교 갈 준비를 해 놓고 야야는 저녁상 보러 부엌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