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밑줄긋기

<가을밤> - 이승희

야야선미 2010. 10. 13. 10:52

가을밤

밤이면 풀벌레 세상이다. 반딧불이 두세 마리 보이기도 하고, 옆 산 칡꽃 향기 간간히 마당을 가로질러 간다. 달이 점점 몸 불려가며 마당으로 내려오고, 골짜기 내려가는 개울물 소리 어둠속에서 가늘게 가늘게 이어진다.

낮이면 그리도 뜨거워 사람을 쩔쩔매게 하더니 밤이 되자 선들선들한 게 꼭 딴 세상 같다. 어디 날씨만 그런가. 하루 종일 소란과 번잡함에 정신없이 끌려 다니다가 지금, 고요한 어둠과 편안한 풀벌레 소리, 촉촉하고 향긋한 산 냄새 앞에 서 있으니.

깜깜한 밤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킨다. 온몸 구석구석을 느슨하게 풀어준다. 마음도 따라 헐렁해진다. 그래, 좀더 가볍게 살 일이다. 시끄럽고 즉흥적인 가벼움이 아니라 단순하게 생각하고 빨리 털어내는 가벼움. 어떤 문제를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주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계속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것이다.

밤이 없다면 인간이 어찌 되었을까? 해 지면 바로 어두워지는 밤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인간이 지금처럼 살고 있지는 않겠지.

밤이 깊어지도록 풀벌레 소리가 이어진다. 인간이 피워내는 빛과 소리가 하나도 없는 가을밤, 주인공 따로 없이, 제각기 존재하는 저 목숨들로 조화를 이루는 이 가을밤이, 더 없이 완벽하다. <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 201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