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이는 산마을에 산다

산마을고등학교 이야기 "자율과 방임, 그 사이에서"

야야선미 2010. 10. 15. 04:00

 

푹푹 찌는 더위에 진저리를 내며 가을은 언제쯤 오나 기다리던 것도 금방, 어느새 가을이 점점 깊어간다. 첫째시간에 아이들 영어실로 보내고 창밖을 내다보고 섰는데, 파란 하늘과 몽글몽글한 양떼구름이 얼마나 예쁜지.

 

소식 뜸한 옛 졸업생 한 아이를 생각하며 오랜만에 편지를 좀 쓸까하는데 전화가 울린다.

“서인이 어머님이시죠? 서인이 담임입니다.”

“아, 예에. 선생님!”

의자에 기대고 앉았던 몸을 똑바로 일으켜 앉는다. 아이들 선생님이라면 늘 긴장된다.

“아침에 서인이가 고입원서를 써 왔더라고요?”

선생님 말끝이 뾰족하게 올라가는 듯하다.

“엄머야, 그렇습니꺼?”

‘아이고, 쓰는 것도 못 봤는데 언제 써 갔지? 그래도 고입원서인데 어른 글씨로 써 가면 좋았을 걸. 하, 글마 그거…….’

 

혼자 생각을 굴리느라 우물쭈물 그 다음 할 말을 미처 찾지도 못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바로 말을 잇는다.

“보니까 서인이 지가 적어가지고 보호자 칸은 비워놓고 도장 찍는 칸도 비어 있더라고요.”

그 말까지 듣는데 낯이 화끈 달고 민망해진다.

“월요일부터 접수하니까 오늘 다 해야 한다면서 도장 찍어 달라고 내미는데, 보호자 확인도 안 돼 있고 해서…….”

목소리에서 섭섭한 듯 아니면 무심한 부모를 나무라는 듯 느껴져 어찌나 민망한지.

‘아직 자기소개서도 덜 쓴 거 같더니 어젯밤에 다 썼나? 가져간다고 말도 안하고, 야아가 와 그랬지?’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바쁘다.

 

어젯밤에는 글쓰기회 동무들하고 새 책 나온 거 이야기 하느라 아주 마음 풀어놓고 늦게까지 해닥거렸다. 가야금 타는 동무에, 기타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에, 동무들이 들려주는 따뜻한 말들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흠뻑 빠졌는데 서인이가 문자를 보냈더랬지.

“3개월 이내 사진을 붙이라고 해서 사진 찍으러 나왔어요.”

누군가 이야기하고 있던 중이라 답장은 짧게.

“늦었으니까 빨리 찍고 들어가.”

한참 있다가 또 문자.

“빛이 비쳐서 안경 벗고 찍었더니 너무 초췌하게 나왔어여 ㅎ흑”

“ㅋㅋ 원래 니 모습이 그런 거 아이가 ㅎㅎ”

또 그러고 말았다.

 

한 시가 넘어 들어가니 서인이도 자고, 아바이는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방에 들어가 자라고 깨웠는데, 얼마나 마셨던지 몸도 가누지 못하고 소주 냄새 막걸리 냄새 한데 엉켜 마주보고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잠깐 기절한  것 같았는데, 어느새 창밖이 훤했다. 7시가 넘었다. 온 식구가 허둥지둥 부랴부랴 겨우 눈곱만 떼고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 정신없는 통에 서인이는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써 간 모양이다. 초췌하게 나온 사진 오려붙이고 제 손으로 쓸 수 있는 것만 써 가지고.

“아,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어젯밤에 너무 늦게 들어갔더니 지 혼자 그리 써 갔는 거 같네예. 그냥 돌려 보내주시면 제대로 써서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그런데 날이 없습니다. 내일은 소풍날이라서 전교생 다 밖에 나가고, 토요일은 전일제 특활이라서 학교 안 오고. 오늘 결재받기는 받아야 합니다.”

“아, 오후에 제가 학교로 올라가겠습니다. 수업 마치자마자 조퇴하고 올라가겠습니다. 서인이 그 녀석이 지 혼자 마음이 바빠 철없이 그랬는갑네예.”

죄스런 마음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 담임 목소리도 조금 누그러졌다.

 

“아니예. 일단 결재를 올려보고요. 결재 받게 되면 서인이 편에 보내고 안 되면 점심시간에라도 서인이 보낼 테니까 다시 좀 적어 주십시오.”

“예에, 정말 죄송합니다.”

“산마을 고등학교 가는 거 맞죠? 부모님도 동의하셨고요? 그리고 여기 지원하면 다른 특목고나 전기고에 지원할 수 없다는 것도 아시지요?”

“예.”

입학원서 쓰기 전에 그런 것들을 확인받아 두어야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 합격하고 나면 그 학교 안 가고 싶어도, 다른 학교에 지원할 수 없다는 것도 아시지요?”

“예에.”

“떨어지면 후기 인문계고에는 지원할 수 있습니다. 뭐어 보통 말하는 일반 인문고입니다. 그 학교에 합격하면 거기 꼭 보내던가, 마음이 바뀌어서 대안학교 안 가겠다고 하면 재수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끊고 나서도 한참동안 무안해서 땀이 났다.

 

생각해 보니 처음 대안학교 간다고 할 때도 담임하고 의논 한 번 하지도 않았다. 서인이가 제 동무들한테 이야기하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담임도 알게 되고. 대안학교 둘러보러 간다고 체험학습 신청하느라 전화 통화 했을 때도 담임 반응이 좀 떨떠름했다.

“왜 그런데 보낼라합니까? 차라리 그 성적으로 특목고에 지원을 해 보지예.”

“지가 워낙 가고 싶어해서예.”

“아아들 아직 뭐 압니까. 저거 하고 싶은 대로 우예 다 들어줍니꺼?”

뒤늦게 참 미안하다. 담임이 볼 때는 섭섭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을 거다. 한 해 동안 아이를 데리고 살아준 담임인데.

 

‘대안학교 가고 싶어 해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데 선생님은 어디 좋은 곳 추천할 만한 곳 없습니꺼?’

하고 먼저 의논이라도 한 번 하든가, 산마을고등학교로 정한 뒤에라도

‘산마을고등학교로 가기로 했는데 원서는 언제까지 내야 한답니다. 서류가 이러이러한 게 필요하다니까 뭐 좀 잘 도와주십시오.’

하던가.

 

그런 말 한 번쯤 미리 해 주었더라도 덜 서운했을 텐데. 아무런 말 한 마디 없다가 아이 손으로 삐뚤삐뚤 적은 원서를 쓰윽 내밀면서 도장 찍어 달라고 했으니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고 서운했을 게다.

‘엄마아빠가 나 몰라라 내던져 두니까, 아이가 지 맘대로 원서 써서 들고 와서 도장찍어주세요 하고 내밀지. 둘 다 선생이라더마는, 부모라는 그 사람들 뭐하는 사람이고?’

가만 생각해보니까 어쩌면 우리 집을 아주 문제 가정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싶다.

 

저녁 먹고 서인이한테 말했다.

“그거 써서 가지고 간다고 말이라도 하지. 그래도 입학원서인데, 니 손으로 써서 보호자 확인도 없이 가져가니 담임 쌤이 좀 놀랬을 거라.”

“왜? 안돼요? 틀린 거 없이 썼는데. 학교에서 도장 찍는 거 먼저 찍고, 저녁에 엄마나 아빠 오시면 도장 받을라고 했지요.”

“순서가 있거든. 지원자, 보호자 확인이 있어야 그거 확인하고 결재를 하지. 그 도장 하나에 보호자와 의논하고 인정했다는 뜻이 들어있거든.”

“몰랐어요. 그리고 엄마 아빠 어제 1시까지 기다렸는데 안 왔잖아요.”

서인이는 뭘 먼저 찍든 도장을 받으면 됐지 뭘 그러냐는 눈치다.

“그래, 결재 받아왔으니 됐다. 그래도 선생님한테는 마이 미안하네.”

 

사실 서인이나 영우를 키우면서 늘 이래 왔다.

‘너거 힘으로 해라.’

‘너거가 할 수 있는 건 너거가 하고 안 되는 것만 쫌 도와 주께.’

다행하게도 서인이랑 영우는 우리한테 별로 기대지 않고 웬만하면 저희들 손으로 해갔다. 학교에서 아이들 무슨무슨 교실이다, 뭔 캠프다, 학부모교실이다 자잘하게 신청서 써 내라는 것들 오죽 많나? 그럴 때마다 저거가 하고 싶으면 ‘신청함’에 동그라미, 안하고 싶으면 ‘신청하지 않음’에 동그라미. 거의 한 번도 우리한테 ‘이거 어째요, 저거 어떡해요?’ 묻지 않았다. 어쩌다 저희들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큰돈이 드는 일이면 어쩌냐고 입을 떼었지만.

그러니 서인이는 이번에도 원서는 인터넷에서 출력했고, 제 손으로 쓸 수 있어 썼고, 자기 소개서 썼고. 제가 할 건 다 했으니 됐지 잘못 될 게 뭐 있냐 하는 듯한 얼굴이다.

 

집에 이것저것 좀 치우고 입학원서랑 함께 보낼 학부모 소견서를 쓰느라 앉았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간다. 학교에서 제법 중요한 것이다 싶은 걸 아이들이 제 멋대로 삐뚤삐뚤 적어 온 것 보면 가끔 그런 생각 한 적이 있었다.

‘이 집에 진짜 디게 바쁜 갑다. 이런 거 하나 안 적어주고. 아이들한테만 이런 걸 맡겨두고’

‘진짜 바빠서 그런가, 아이들을 너무 내삐리 두는 거 아이가?’

지금 생각해보면 웃을 일이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너거들 일은 너거 알아서 해라’고 내 버려두지 않았나. 그걸 남 듣기 좋게 말하면 자율이니 스스로 홀로 서기니 뭐 다들 거창하게 말하지. 그런데 조금만 비켜서서 다른 각도로 보면 아이를 방목하듯이 내버려두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자율과 방임! 그 둘은 아주 다른 게 아니라 살짝 비켜 선, 내 눈에 비치는 모습만 살짝 달리 보이는, 결국은 같은 모습이겠다.

 

학교에서 선생님들하고 이야기할 때도 이런 이야기는 더러 나온다.

“그 집, 사업은 잘 하는지 모르지만 아이는 엉망으로 키워.”

“부모만 똑똑하면 뭐 하노? 아이 하나 챙겨주지 않고 막 내놓고 키우는데. 아이들이 안 됐어.”

오늘 서인이를 보면서 정말 머리를 딱 한 대 맞은 것 같은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이 부분이다.

 

대놓고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나도 마음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이들 키우고 가르치는 생각도 사람마다 다르고, 아이들 키우는 사정도 집집마다 다를 텐데. 그런 것 헤아려볼 생각은 않고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내 잣대를 대 놓고 어쩌구저쩌구 단정 지어 버렸던 건 아닐까.

밤에 언뜻언뜻 생각 날 때마다 잠이 달아나서 아주 늦게까지 잠을 못 자고 있다.

 (2010. 10. 15. 창밖이 푸르스름해지는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