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워준 책들
나를 키워준 책들
3월부터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혼자 지낸다. 처음 며칠은 손끝도 얄랑 안 하고 막 놀고 싶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천정만 바라보다가, 베란다 화분만 뚫어져라 보고 앉았다가, 뿌연 봄 하늘을 올려다보고 멍하니 앉아 이런 저런 쓸데없는 생각에 잠기다가.
음악 틀어놓고 흥얼거리다가, 책장 앞으로 가서 이 책 저 책 만지작거리다가 ‘이 책은 뭔 마음으로 샀을까? 참 돈 아깝구먼.’ 갑자기 마음에 안 드는 책은 재활용 상자에 던져 버리고. 너무나 조용한 집이 이상해서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다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전에 써놓았던 글을 읽어보다가, 다른 사람 블로그 기웃거리다가 카페 몇 군데 들락거리면서 댓글을 단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씻지도 않고 밥도 아무 때나 배고플 때만 되는대로 몇 숟갈 떠먹고.
아이들 말처럼 완전 폐인처럼 살다가 ‘아, 이오덕 선생님!’하고 제정신을 찾았다. “급해요!” 숨넘어가는 듯한 조혜원 선생님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그 폐인 짓거리를 하고 있을 거다, 아마도.
‘이오덕 선생님’ 속엣말로 중얼거리기만 해도 너무나 많은 것이 한꺼번에 밀려와서 이런 저런 말을 풀어놓기가 벅차다. 선생님 책을 만나고, 글쓰기회에서 선생님을 뵙고 배우고 깨우치면서 아이들 보는 눈을 뜨게 되고, 지금까지 선생 노릇해 온 세월을 생각하면 말로 다 하지 못하게 고맙고 고맙지. 그렇지만 나는 그 깨우침대로 제대로 잘 살아왔는지 생각하면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없다.
이오덕 선생님 책을 모아 놓은 칸 앞에 선다. 오래 되어서 누렇게 빛바랜 책들이 있다. <삶과 믿음의 교실>, 대학 졸업하고 처음 아이들 앞에 서서 막막하던 시절에 샀으니 30년이 다 되어 간다. 아주 누렇게 뜬 책을 여는데 오래된 책 냄새가 확 풍기면서 눈물이 왈칵 쏟는다. 서럽고 막막하던 그 때가 한꺼번에 되살아난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은 났지만 아이들 앞에서 어떤 선생이어야 할지, 어떻게 공부하고 아이들하고는 어떻게 지낼지 막막하기만 한데 학교에서는 그런 것 따윈 관심도 없었다. 그때 만난 책이 <삶과 믿음의 교실>이었다. 읽고 또 읽었다. 교육대학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것들, 어느 선배 교사도 보여주지 않는 것들에 조금씩 눈을 뜨게 해준 책이었다.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 <이 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 <아동시론>, <거꾸로 사는 재미>…… 책방을 돌아다니며 사 모았던 이 책들은 요즘 다시 엮어낸 것 보다 더 살갑고 귀하다.
어정쩡하게 선 채로 <삶과 믿음의 교실>을 펴서 밑줄 긋고 별까지 그려놓은 부분을 찾아 읽는다. 어찌나 줄을 그어놓았던지, 아예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읽는다.
‘여기서 거듭해 하는 말이지만 농촌 아이들의 순박한 느낌과 생각, 괴로운 농사일과 가난한 생활의 솔직한 표현을 통해 나는 그들에게 삶의 진실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도시의 것, 화려한 것에 정신을 팔지 말고 땅을 파고 짐을 지면서 살아가는 생활의 귀함을, 인간스러움을, 자랑스러움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 교육이 물론 성공한 것도 아니고 쉽게 상공할 리도 없지만 그런 노력만이 교육이 되고 글짓기가 된다고 믿는다. 아동문학도 삶의 진실을 깨우쳐주는 문제를 떠나서는 결국 거짓이 되리라 생각한다.’ <삶과 믿음의 교실>1980. 한길사. 163-164쪽
‘아이들이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를 깨닫고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다. 아이들의 시가 자란다는 것은 아이들의 생활이 자란다는 것이다. 생활을 키워가지 않고, 인간을 키워가지 않고 시를 쓰게 할 수 없다. 교육이 없이, 교사가 없이 아동시가 씌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 같은 책 186쪽
‘아이들에게 시를 쓰게 하는 것은 자기의 느낌과 생각과 생활을 아끼고 귀하게 여겨 그것을 키워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일하는 생활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남의 흉내를 내지 말고 겉보기 화려한 것을 따르지 말고 정직하게 자기 생활을 창조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꾀부리고 재주 피우는 것보다 우직하고 순박한 것을, 세련된 것보다 투박하고 야성적인 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지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교육만이 우리 민족을 살릴 수 있다.’ 같은 책 213쪽
25년 그 긴 세월 아이들 앞에 서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겠다고, 어설프게나마 제대로 된 선생되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가르침들은 모두다 이 책들 속에 살아있다. 이 책은 꽂아두고 얼마 전에 부산글쓰기회 선생님들과 함께 공부했던 <아동시론>을 편다. 이런 저런 주고받은 말, 생각한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여기서 또 옆길로 새는 것 같지만, 서너 해 전에 어느 지역 카페에서 회원들이 한 해 공부할 거리를 정해 놓은 걸 보고 한참 생각에 잠긴 적이 있다. 짧게 간추리면 ‘올해 글쓰기 공부는 한 갈래씩 정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고 교실에서 지도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갈래의 전문가가 되자.’는 말이었다.
‘한 갈래씩 정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교실에서 아이들을 지도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글쓰기 공부를 하는 것이 한 분야 한 갈래의 전문가가 되어 글쓰기 지도를 하려는 것일까?’ 그 질문이 한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글쓰기 회보나 연수에서 글쓰기 지도 사례를 만났을 때 고민하던 것 하나. ‘어느 선생님이나 다 참 열심히 붙잡고 지도를 한 것 같은데 어떤 글은 정말 감동스러운데 또 어떤 글에는 왜 전혀 감동이 없을까? 우리가 무엇을 빠뜨리고 있을까?’
그 고민에 대한 답을 <아동시론>공부하면서, 이 책 저 책 이오덕 선생님 말씀을 만날 때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의 삶을 놓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아프고 힘든 아이들, 소외되고 힘없는 아이들, 불행한 아이들 그 아이들 뿐 아니라 나와 함께 숨 쉬고 함께 지내는 모든 아이들의 삶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아픔을 보듬어 함께 나누어 가진다는 말일 것이다.
아이들과 하나 되어 아이들 마음자리에서 함께 할 때 그 아이가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마음에 담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겠지. 그리하여 아이들이 황폐하고 생각이 없어져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황폐하여 가는 마음을 끈질긴 인내와 노력으로 아이들을 사람다운 마음을 가진 아이들로 자랄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글보다 먼저 삶이라고 했다. 비 개인 하늘을 보았을 때 그 아름다움에 놀랄 줄 아는 사람, 발에 밟힌 한 마리의 곤충을 마음 아파하고, 절름발이 거지 아이를 보고 비웃고 놀리고 돌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불행한 사람이 있는 까닭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
괴로운 일을 하면서도 그냥 괴로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부모 형제와 남들과의 관계에서 그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 그리하여 생활을 창조해 가는 그런 사람다운 사람이 되자고 끊임없이 함께 노력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생각도, 글도 영글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이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헤아리지 못하면서 글만 붙잡고 본다면, 아무리 훌륭한 전문가다운 지도방법이란 걸 갖다 댄들 글에 감동이 살아날까.
사람다운 마음으로 살면서 마음에 남아있는 것, 가슴에 맺혀있는 것, 그런 것들을 살짝 튕겨만 주어도 아이들 가슴에서 봇물 터지듯 글이 되어 나오는 걸 많이 봤다.
그래서 글보다 먼저 삶이 중요하고 우리는 그 아이들의 삶을 가꾸어 가는데 힘을 쏟아야한다는 것이겠지. 글이 되든 안 되든 그 속에 드러나는 아이들을 보려고 애써야겠다. 글을 쓰는 동안에 사람다운 삶을 함께 생각하고 올곧은 삶을 함께 가꾸어 가야겠지. 글에만 매인 채 어떻게 훌륭한 글 한 편 써내게 할 것이냐는 고민보다 앞서야 할 것이 무엇인가 또 한 번 새겨보게 된다.
책들을 펴서 여기 저기 읽다 보니, 20년이 훨씬 넘도록 아이들과 지내면서 제대로 된 선생이 되고자 애쓰게 만든 건 이 책들, 아니 이오덕 선생님의 가르침을 만난 덕이란 걸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