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맞춤법으로 다시 읽는 백석의 노래 2 / 김수업
요즘 맞춤법으로 다시 읽는 백석의 노래 2 / 김수업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
3. 산지
갈부던 같은 약수터의 산거리
여인숙이 다래나무 지팡이와 같이 많다.
시냇물이 버러지 소리를 하며 흐르고
대낮이라도 산 옆에서는
승냥이가 개울물 흐르듯 운다
소와 말은 도로 산으로 돌아갔다
염소만이 아직 된비가 오면 산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 인가 근처로 뛰어온다
벼랑탁의 어두운 그늘에 아침이면
부엉이가 무겁게 날아온다
낮이 되면 더 무겁게 날아가 버린다
산넘어 십오리서 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산비에 축축이 젖어서 약물을 받으러 오는 산아이도 있다
아비가 앓는가 보다
다래 먹고 앓는가 보다
아랫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때가 많다 (조광 1권 1호, 1935. 11.)
▪말뜻 풀이
갈부던 같은: 어수선한. 갈잎을 이리저리 결어 만든 갈부던은 갈잎의 짜임새가 어수선하다.
산거리: ‘거리’는 ‘길’이 세 갈래 넘게 서로 얽혀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산거리는 산길이 여러 갈래로 얽혀 있는 곳이다.
다래나무 지팡이: 다래나무는 덩굴 식물이라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아주 가볍다. 다래나무로 지팡이를 만들면 가볍고 손잡이도 좋아서 안성맞춤이다.
된비: 되게 오는 비, 곧 세차게 오는 비
벼랑탁: 벼랑턱, 곧 벼랑 위쪽이 턱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
나무뒝치: 통나무 속을 파서 물을 담아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목을 가늘게 만든 뒤웅박
싸리신: 싸리 껍질을 벗겨 짚신처럼 삼아서 신는 신
애기무당: 큰 무당 밑에서 굿을 배우며 큰 무당을 돕는 작은 무당
작두를 타며: 큰 굿을 하면 무당이 작두의 날을 딛고 올라서서 춤을 추는 것을 작두 탄다고 한다.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면 사람들은 더욱 마음을 졸이며 영험이 크다고 믿었다.
▪군소리
노래이름 ‘산지’는 산골과는 다르다. 산골은 산이 갈라지면서 만든 골짜기를 이르지만 산지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평지를 뜻한다. 그러니까 산골보다는 산지가 들도 넓고 마을도 여럿이며 사람도 많이 산다. 그러나 노래는 산지 온통을 다루지 않고 약수터가 있는 한 마을만을 다룬다.
첫 도막은 ‘약수터의 산거리에 여인숙이 많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의 뜻은 그뿐이다. 그런데 약수터의 산거리 앞에서 ‘갈부던 같은’이 매김을 하고, 여인숙이 많다 사이에서 ‘다래나무 지팡이와 같이’가 꾸며 준다. 이들 매김과 꾸밈이 노래를 노래답게 만든다. 갈잎을 얼기설기 결어서 만든 갈부던의 얽히고설킨 갈잎 줄기들이 약수터의 산거리와 같다. 어수선한 약수터와 거기서 여러 마을로 퍼져나간 산길의 모습을 겹쳐서 절묘하게 드러낸다. 약수터의 모습에서 조그마한 갈부던의 짜임새를 떠올리고, 여인숙 많은 것에서 산골 마을에 집집이 널려 있는 나래나무 지팡이를 떠올리는 상상력을 백석 아니면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둘째 도막에서 넷째 도막까지는 약수터 언저리의 산지 모습을 시냇물, 승냥이, 소와 말, 염소, 부엉이 같은 자연, 산짐승, 집짐승, 날짐승의 움직임으로 고스란히 드러낸다. 사람의 말로써 드러낸 하나하나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이들의 있음과 삶이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하다. 자연인 시냇물은 목숨 있는 벌레 소리를 하며 흐르고, 목숨 있는 승냥이는 자연인 개울물 소리처럼 운다. 이들 자연과 목숨의 소리와 몸놀림과 움직임을 삶과 더불어 깊이 살피면서 들어 올려 사랑하지 않고서는 다다를 수 없는 솜씨며 마음자리다.
끝의 세 도막에 와서야 마침내 사람을 드러냈다. 약수터에 약물을 받으러 오는 산아이다. 자연인 ‘산’과 사람인 ‘아이’가 하나로 어우러졌다. 게다가 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산비에 축축이 젖었으니 자연에서 따로 떼어낼 수도 없다. 이곳 산지에는 모두가 이처럼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진 사람들만 살고 있겠지. 이들이 약물을 받으러 오는 까닭은 오직 하나, 누군가 앓고 있는 것이다. 산아이의 아비가 다래를 먹고 앓는가보다고 했다. 약물이 앓는 이들을 고쳐주지 못하면 이들은 무당을 부르는 수밖에 없다. 자연과 푸나무와 짐승과 사람을 모두 지어내신 하느님의 힘을 빌어야 하기 때문이다.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고 굿을 하는 그때 사람들은 모두 그런 하느님과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 노래는 그러니까 자연에서 짐승을 거쳐 사람으로 와서 마침내 하느님께로 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4. 주막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 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길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 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뵈었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조광 1권 1호, 1935. 11.)
▪말뜻 풀이
붕어곰: 붕어를 솥에 넣고 오래 곤 국물. 평안도에서는 ‘붕어를 알맞게 지지거나 구운 것’을 뜻한다고 한다.
팔모알상: 테두리가 여덟모인 조그마한 밥상
장고기: 잔고기, 곧 크기가 자잔한 물고기. 농다리와 비슷하다.
울파주: 울바자, 곧 대, 갈대, 수수깡, 싸리 따위로 엮어서 만든 울타리의 평안도 토박이말
엄지: 짐승의 어미
▪군소리
보다시피 이 노래는 한 줄을 한 도막으로 삼아 네 도막이다. 그리고 네 도막이 모두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풀이말로 끝났다. 붕어곰은 맛있었다, 잔이 뵈었다, 나와 동갑이었다, 망아지도 있었다, 이렇게 모두 지난날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지금은 텅 빈 집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는 주막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하겠다.
지난날 이 주막은 어떤 주막이었나? 첫 줄, 곧 첫 도막에서는 술안주로 호박잎에 싸서 내오는 붕어곰이 언제나 맛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언제나’라는 어찌씨에 귀를 기울이면 한 두 차례 먹어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래도록 시도 때도 없이 다녔고 갈 때마다 ‘언제나’ 호박잎에 싸서 내놓는 붕어곰을 맛있게 먹었다. 둘째 도막에서는 부엌에 팔모알상 위에 놓인 잔이 보이더라고 한다. 여기서 팔모알상은 빨갛게 길이 들었으니 수많은 장꾼들 손길이 닿았던 것이며 잔은 새파란 싸리가 그려진 눈알만한 것이니 비싸게 샀을 중국 고량주 잔이다. 셋째 도막에서는 주막집 아들 범이가 장고기를 잘 잡았고 앞니가 뻐드러졌으며 나와 동갑이었다고 한다. 이름과 장기와 모습이 참으로 순박한 조선의 어린아이다. 마지막 도막에서는 울타리밖에 장꾼의 달구지를 끌고 온 어미말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한다. 둘째 도막과 더불어 장날이면 손님이 득실득실하던 주막이었음을 알게 한다.
다만 넉 줄 네 도막으로써 입에 남은 붕어곰의 맛, 눈에 남은 부엌 안의 팔모알상과 잔과 울타리 밖의 망아지, 마음에 남은 동갑내기 범이를 이야기하여 텅 빈 주막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그러나 그것은 텅 빈 한 주막의 쓸쓸함을 이야기하고 말지 않는다. 장꾼들이 득실거리던 장터의 몰락을 떠올리게 하고, 나아가 곳곳에서 삶터를 버리고 흩어져버린 겨레를 떠올리게 하면서 우리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한다.
5. 비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어디로부터 물큰 개비린내가 온다 (조광 1권 1호, 1935. 11.)
▪말뜻 풀이
두레방석: 둥그렇게 짜서 만든 방석.
물큰: 냄새가 한꺼번에 심하게 풍기는 것을 나타내는 말.
개비린내: 장마철에 비를 맞은 개에게서 나는 비릿한 냄새.
▪군소리
아카시아는 콩과 식물이라 새끼를 잘 쳐서 여러 그루들이 가까이 어울려 살고, 꽃은 비가 많이 내리는 오월에 핀다. 꽃이 활짝 피어 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난 즈음에 바람 없이 비가 조금 세차게 내려주면 하얀 꽃들은 물을 머금고 곧장 땅으로 내려앉는다. 꽃을 단 가지들이 사방으로 벋어 있으므로 하얀 꽃들은 땅위에 둥그렇게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이를 ‘보고’ 백석은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하고 묻는다. 이 한 마디로 가까이 어울려 사는 아카시아 피붙이들이 그대로 하얀 두레방석을 깔고 둘러 앉아 잔치라도 벌이려는 세상이 되었다. 아카시아 꽃 냄새를 맡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장마철 개에게서 풍기는 개비린내로 맡아낸 백석의 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두레방석을 보아내고 코로 개비린내를 맡아내는 것은 실상 눈과 코가 아니다. 서양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상상력(이미지네이션)이라 부르는 정신의 힘이라 한다.
나는 이 한 마리 노래로 백석을 지난 20세기에 첫손 꼽히는 겨레의 노래꾼이라 부르고 싶다. 나는 이렇게 날카로운 눈과 코를 알지 못하고, 하늘이 만들어낸 자연을 이처럼 놀랍도록 우리말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솜씨를 알지 못한다. 이 노래에서 백석의 ‘비’는 아카시아 피붙이들에게 흰 두레방석을 하나씩 깔아주고 개비린내를 풍기며 잔치를 벌이도록 해주는 자연의 사랑이며 선물이 되었다.������
▪본디 노래 모습
3. 山地
갈부던같은 藥水터의山거리
旅人宿이 다래나무지팽이와같이 많다
시내ㅅ물이 버러지소리를하며 흐르고
대낮이라도 山옆에서는
승냥이가 개울물 흐르듯 우ᄘ다
소와말은 도로 山으로 돌아갔다
염소만이 아직 된비가오면 山개울에놓인다리를건너 人家근처로 뛰여온다
벼랑탁의 어두운 그늘에 아츰이면
부헝이가 무거웁게 날러온다
낮이되면 더무거웁게 날러가버린다
山넘어十五里서 나무뒝치차고 싸리신신고 山비에축축이 젖어서 藥물을 받으러오는 山아이도있다
아비가 앓른가부다
다래먹고 앓른가부다
아래ㅅ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타며 굿을하는때가 많다
4. 酒幕
호박닢에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빩앟게질들은 八모알상이 그상웋엔 새파란싸리를그린 눈알만한 盞이뵈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잡잡는 앞니가뻐들어진 나와동갑이었다
울파주밖에는 장군들을따라와서 엄지의젖을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5. 비
아카시아들이 언제 힌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디로부터 물쿤 개비린내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