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먹으며 / 이오덕
감자를 먹으며 / 이오덕
뜨끈뜨끈한 감자를 먹으며
젓가락 끝에 꿰어
후우 후우 불어 먹으면
그 어릴 적 생각난다.
네 살이던가 다섯 살이던가
그러니까 70년이 지나간
그 때도 꼭 이렇게 감자를 먹었지.우리 어머니 아침마다 저녁마다
정지에서 밥을 풀 때
솥뚜껑 열고 밥에 얹힌 감자
맨 먼저 한 개 젓가락 꽂아 나를 주셨지.
겨울이면 정지 샛문 열고 내다보는 내 손에 쥐어주며
꼭 잡아 꼭!
봄 가을이면 마당에서 노는 나를 불러
김 무럭무럭 나는 그 감자를 주며
뜨겁다 뜨거, 후우 해서 먹어!후우 후우
나는 그 감자를 받아 먹으면서
더러 방바닥이나 마당에 떨어뜨리고는
울상이 되기도 했을 것인데
그런 생각은 안 나고
일찍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얼굴도 안 떠오르고
후우 후우 불다가 뜨거운 감자를 입에 한 가득
넣고는 하아 허어 김을 토하던 생각만 난다.후우 후우, 하아 허어, 냐음 냠
감자를 먹으면서 나는 자라났다.
밥을 먹기 전에 감자부터 먹고
가끔은 삶은 것을 점심으로도 먹고
논 매시는 아버지 새참으로 갖다 드리고는
논둑에 앉아 아버지와 같이 먹고
겨울에서 봄까지 소죽을 끓일 때마다
아궁이 잿불에 구워 먹고
여름날 삼묻이굴에 묻어 놓았다가 먹고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감자묻이 놀이.
꼴 베러 간 냇가에서 여러 동무들과 땅을 파고
거기다가 나무를 쟁이고 나무 위에 밤자갈을 깔아 덮고
불을 붙여 자갈돌을 달구었지.
저구리 벗어 두 다리 새로 활활
바람을 부쳐 넣으면 나무는 후루룩 타올라
자갈돌이 벌겋게 달았다. 그러면 재빨리
모래쑥을 깔고 모래쑥 위에 감자를 놓아 다시
모래쑥으로 싸덮고 흙으로 덮고
얘들아, 어서어서, 빨리빨리
고무신으로 냇물을 떠다가 파놓은 옆구리에 부으면
쿵쿵쿵 따닥따닥 쿵쿵 따닥...... 천둥 터지는 소리!
뜨거운 김이 터져 나오고 터져 나오는 김과 함께
모래쑥 냄새 감자 익는 냄새.....
이윽고 쑥 향기 물씬 밴 뜨거운 감자를 파내어
후우 후우 불면서 먹던 그 맛
잘 익어 터진 북해도 흰 감자
껍질을 훌훌 벗기면서 아이 뜨거!
야무진 자주감자 껍질을 벗기면서 아이 뜨거!
뜨거워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공 받듯이 받다가
한입 가득 넣으면 입안에 녹아드는 그 향기 그 맛
팍신팍신 달고소한 그 감자 맛
아른아른 여울물에 헤엄치는 피라미들의 이야기까지
들어있는 그 모래쑥 향기 밴 감자 맛
그 맛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쳐다보는 머리 위 미루나무에선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이초강
보리매미들이 온통 신나게 울어쌓고.....
그렇게 사시사철 감자로 살아 내 몸도 마음도
이런 감자빛이 되고 흙빛이 되었다.후우 후우 감자를 먹으면서
나는 또 책을 읽었다.
감자를 먹으면서 글을 썼다.
감자를 먹고 학교 선생이 되어서는
감자 먹고 살아가는 산골 아이들을 가르쳤다.
나는 지금 할아버지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어린애처럼 후우 후우 감자 먹기를 좋아해서
감자 먹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감자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 가서
오두막집 지어 사는 꿈을 꾼다.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뜨끈뜨끈한 감자를 쟁반에 담아 놓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 감자를 먹으면서
그 날의 들 이야기를 하는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농사꾼들이 사는 마을
그런 마을에 가서 사는 꿈을 꾼다.
내가 믿는 하느님도
그렇다.
감자를 좋아하실 것이다.
맑고 깨끗하고 따스하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감자 맛을 가장 좋아하실 우리 하느님.
내가 죽으면 그 하느님 곁에 가서
하느님과 같이 뜨끈뜨끈한
감자를 먹을 것이다.
무너미 모임집에서, 여름연수를 마칠 무렵.
선생님이 쓰신 시 한편을 읽어 주셨다.
그 때 읽어 주신 시가 '감자를 먹으며'
많이 편찮으시던 그 때,
선생님의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를 들으려 모두들 숨죽여 듣고 있는데
선생님이 정말 어머니가 쪄 주신 감자를 머ㅗㄱ던 순하고 여린 어린 아이로 돌아가시는구나 싶어서
가슴이 찌릿하게 아팠던.... 그 날.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부끄럽고 어렵고 그런 것 다 팽개치고 선생님 품에 한번 안겨 보고 싶다.
아니 그렇게는 못해도 선생님의 야윈 손 꼭 한번 잡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