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써 주세요
내 말 좀 써 주세요
우리 2학년은 이미 다 돌아갔고 다섯째시간 공부 시작했나? 시끌시끌하던 학교가 조용해졌는데 복도에서 ○○선생님 목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웬 아이 소리도 나지막이 들리다가 야단치는 듯한 ○○선생님 소리에 묻힌다. 무슨 일인지 ○○선생님 소리만 제법 커지더니 잠잠해졌다.
“샘, 오늘 일기 쓸 거죠?”
“으응, 쓰으으겠지이?”
문을 열면서 다짜고짜 묻는데 대답을 더듬거렸다.
“일기 쓸 거 맞죠?”
“근데, 와?”
“일기 쓸 때요오오 내 말 좀 써 주세요.”
“응? 뭔 말?”
“그니까요오 내 말을 좀 듣고요오 샘이 일기에 좀 써 달라고요오오.”
오호, 흥미진진해진다. 뭔 말이길래.
“니 말은 니가 쓰면 되지. 왜 내보고 써 달라카노?”
“아참, 나는 잘 못 쓰잖아요. 샘이 내보다 잘 쓰잖아요.”
“그래도 니 일은 니가 젤 잘 쓸 텐데. 한번 들어보기나 들어보자.”
“아, 진짜.”
정말 답답한지 말을 꺼내다가 주먹으로 가슴을 몇 번이나 친다.
“내, 진짜 억울하거든요. 나는 오늘은 진짜 안 그랬거든요.”
“천천히 해 봐라. 그라고 여기 앉아서 하자.”
옆으로 밀어주는 의자를 보지도 않는다.
“아까 전에요 교실에 들어올 때요, 신발을 널짰거든요. 신발 주울라고 하는데 ○○샘이 막 소리를 지르잖아요. ‘또 니네, 전에도 혼나 놓고 또 그라노? 하지 마라 하면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요. 아, 진짜.”
숨도 쉬지 않고 솰솰솰 쏟아놓더니 한꺼번에 숨을 몰아쉰다고 씩씩거린다. 지딴에는 억울하고 속상해서 그러겠지만 보는 나는 우습다.
“아, 웃지 마세요. 진짜 기분 나쁘단 말이에요.”
“미안미안, 그래가아 어찌 됐는데?”
“○○샘은 내 말도 안 듣고 들어가잖아요. 아, 진짜. 샘이 꼭 일기에 써 주세요. 나 진짜 너무 억울하단 말이에요.”
“신발 좀 널짰는데 와 그리 심하게 혼을 내시는데? 이상하네.”
“그게 아니고요, 신발 가지고 슬라이딩 하는 거 했는 줄 알고요 근데 막 ‘거짓말 치지 마라, 안 봐도 다 안다. 전에도 내한테 걸렸다 아이가’ 하면서요. 자꾸 혼만 내잖아요. 내 오늘은 안 그랬거든요.”
“니가 안 했는데 그러면 억울하긴 하겠다. 근데 요렇게만 말해주고 일기 쓰라고? 난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다 말했잖아요. 방과후 가야 돼요. 오늘도 안 가면 엄마한테 혼나요.”
말을 끝내지도 않고 몸은 이미 뒷문을 나선다.
“갈게요. 꼭 쓰세요. 알았죠? 내일 읽어줘야 돼요오오.”
녀석한테 당한 기분이 살짝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녀석일세. 오늘 오후 할 일 없이 빈둥거릴까봐 숙제 하나 턱 던져주고 갔다.
경우 녀석, 보통 때 자주 그런다. 말로는 할 수 있는데 쓰라면 잘 못 쓰겠다고. 그럼 말로 해보라고 하면 말로도 띄엄띄엄 떼어먹고 대강 얘기해 버린다. 이만하면 제딴엔 자세히 말한 편이다. 억울하긴 했나보다.
‘쓰라면 써야지. 보자아아, 방금 이 장면을 그대로 쓰면 되겠네요오오’
들은 김에 써야지 싶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컴퓨터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자판을 끌어당기고 일기틀을 열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아, 요거요거 내일 한 시간 놀 꺼리는 되겠는데!’ (2012년 12월 5일 교실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