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선미 2014. 10. 7. 19:26

엄마 엄마, 저기 노을 좀 보라니깐

등 뒤에 하늘은 붉은 듯 푸른 듯 노을이 얼마나 고운데. 엄마는 아무리 불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미영만 따고 있어.

엄마아 아으아아아

허리 좀 펴고 한 번만 돌아보면 되겠구만.

노을이 홍시 색깔만 있는 게 아니고오, 보라색이 있는데, 그 옆으로는 회색이 있고. 얼마나 예쁜데

아이구우우우 호들갑은. 해 넘어가는 거 처음 보나?”

꿈쩍도 않던 엄마가 겨우 허리를 펴.

, 좀 쉬면서 하지예. 엄마는 지겹지도 않아예?”

지겹다고 안 따면 뭐, 누가 대신 따 주나? 언제 해도 우리가 할 꺼 빨랑빨랑 해야지.”

고작 대꾸한다는 게 퉁바리만 주고 또 허리를 굽혀. , 이 미영 따는 거는 언제 끝난단 말이냐?

그니깐. 어차피 우리가 다 할 건데. 천천히 하면 안 되예? 내일도 따고, 모레도 또 따면 되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또 아무 말도 없어.

아아아, 오늘은 인자 고만 하지예? 내일 또 하면 되지.”

저어 저 봐라, 니 뒤에는 안죽도 보오얗다아아.”

, 정말로! 아까 올 때 분명히 다 따고 왔는데, 언제 또 저리 폈노?”

미영은 참 넌더리나게 피고 또 피어. 점심 먹고 와서 한나절 내내 땄는데 돌아서면 저만치 또 보풀보풀 피어 있거든.

꽃 중에 꽃 복꽃이지. 따고 따도 피고 또 피나 얼매나 고맙노?”

엄마는 그렇게 말하지만 야야는 또 피고 또 피는 미영이 곱지만은 않아.

문익점은 만다꼬 목화는 갖고 왔노?”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를 몰래 들여왔댔지. 애먼 문익점을 타박하면서 활짝 핀 목화꽃, 미영을 따고 또 따.

가을볕 아래 톡톡 불거져 하얀 솜꽃을 탐스럽게 물고 있는 미영밭. 처음 딸 때는 얼마나 재미난지. 포근포근 솜꽃이 새하얗게 핀 미영밭에 들어서면 숨이 멎을 만큼 눈이 부셔. 처음 보는 그림도 아니건만 야야는 미영밭머리에 설 때마다 가슴이 발랑거려. 솜꽃 두어 송이 따서 얼굴에 가져다 대 보라고. 홀보드르르한 솜털이 간질간질 따뜻한 것이 하얀 아기 토끼를 안았을 때보다 더 보들보들 폭딱해.

그렇지만 사래 긴 밭에 한 두어 번만 왔다갔다 해 보라지. 다 돼 가나 싶으면 지나온 자리 여기저기 톡톡 벌어져 있는 미영! 따뜻한 가을햇살과 선들선들한 바람결에 어찌나 톡톡톡 잘 벙글어 터지는지. 고만하고 어서 동무들한테로 달려가고 싶은데 도무지 놓아줄 생각을 않고 자꾸만 벙글어 부르는 걸.

심심하면 다래나 몇 개 까 먹든동.”

지겨워서 몸을 비틀어대니 엄마가 미영 소쿠리에서 다래를 몇 개 골라줘. 너무 늦게 열려서 다 익지도 못한 미영 꼬투리. 처음 달렸을 때야 촉촉한 속살에서 달짝지근한 단물이 배어나오지. 뒤늦게 따먹는 다래는 별 맛도 없어.

목이 왜애애해서 더 못 먹겠어예.”

심심하고 출출하니 처음 두어 개는 참고 먹을 만하지. 몇 개만 먹으면 목안이 매캐하게 아리는 게 맛도 없고 쉬 물려.

인자 단물도 안 나오고 퍽퍽하기만 하고. 소캐 씹는 맛밖에 안 나네.”

엄마 혼자 두고 달아날 수도 없고 괜한 다래한테 핀잔을 줘. 엄마 말처럼 누가 와서 따 주는 것도 아닌 걸.

아아, 고모랑 따는 기 더 좋은데.’

야야는 깐깐한 엄마 대신 집에 있는 고모를 생각하면서 반도 안 찬 소쿠리를 들고 일어섰어. 엄마 소쿠리에 든 것까지 모아 담고 둔덕에 넓게 펴놓은 광목자리에 털레털레 가져다 부어.

한 소쿠리 다 차면 가지, 왔다리갔다리 하니라 시간 다 가겠네.”

엄마가 타박을 하지만 그렇게라도 왔다리갔다리 놀아야지, . 볕 잘 드는 쪽으로 깔린 광목자리에는 하얀 미영이 어느새 수북하게 널렸어.

에이구우 좀 누워보자아아아

광목자리에 널따랗게 펴놓다가 야야는 미영 위에 털썩! 네 활개를 펴고 드러누워. 목이며 얼굴을 살살살 간질이는 이 보드라운 솜털. 한 송이 한 송이 따 담을 때는 지겨웠지만, 이 기분은 최고지. 두 손 가득 미영을 끌어 모아 얼굴을 파묻어.

, 따가워.”

보들보들 폭딱한 솜털 속에 숨어있던 뾰족한 씨가 콕 찌른 거야.

치이, 니도 어서 일어나 일하러 가라카는 거가?”

몽글몽글 하얀 솜털을 밀어내며 네 쪽으로 벙글어진 미영을 보면 얼마나 눈부신지. 그 어떤 꽃보다 탐스럽지. 그렇게 보드라운 솜꽃에 감춰진 씨도 찔리면 제법 따갑단 말야.

, 저거는 겉은 보들보들하면서 속에는 가시를 가지고 있단 말이지. 진짜 엉큼하거든.”

뭐든지 순하기만 한 거는 없다. 순한 사람도 뼈가 있다고, 순하다고 시피 보면 안 되는 기라.”

흐음, 순하아안 사람도 뼈가 있다고오오오, 보드라우우운 미영 안에 가시겉은 씨가 있드으으읏이

처음 듣는 말도 아니지만 야야는 흥얼흥얼 노래처럼 되뇌며 미영을 따.

오늘 말카이 따면 한 사나흘은 안 따도 될 끼다.”

하도 몸을 비틀어대니 엄마는 이제 살살 달래.

그니깐. 어차피 우리가 할 건데 대강대강 하지예?”

해 좋을 때 따다 말려야지. 그라고 너무 늦추면 이파리가 말라서 티끌도 많이 붙고, 따기 상그랍지.”

따기 상그랍다니 아무 말도 더 붙일 수가 없어.

근데 새 이불을 해마다 만들 것도 아닌데 미영은 와이래 자주 심어예?”

헌 이불 털어서 새로 꾸밀 때도 넣고, 소캐를 오래 쓰면 숨이 죽어서 안 따듯하지럴, 새 소캐를 반 치라도 넣어야 폭따그리하이 따시지. 언제 또 새 이불 꾸미야 될지도 모르고. 소캐가 집에 안 떨어지게 하니라고 그라지. 올해는 너거 고모 큰일도 치라야 되고.”

카시미롱 이불도 좋다카더마는, 엄마는 지겹지도 않아예?”

그것도 해꿉고 좋다캐도 나이롱이나 그기나 몸에는 뭐 좋겠노. 몸에는 면이 젤 좋은기라.”

치이, 엄마는 뭐든 자기 손으로 맨들어야 되는 병이 들었는 기라.’

야야는 입을 살짝 삐죽거리면서도 엄마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아. 목내복을 입었다가 엑스란 내복만 입으면 더 가려지는 가려움증이 생각났거든.

옛날에는 옷도 집에서 만들어 입었다카더마는, 엄마도 옷 만들어봤어예?”

그라믄. 다 손으로 만들어 입었지.”

재봉틀질 말고. 옷감 짜는 것도 다예?”

야야는 옷감을 뜨다가 재봉질 해서 옷을 만들어 입히는 엄마를 생각하며 말을 고쳐 물어.

그라믄. 이 미영 따다가 씨아 잣아서 실도 뽑았지.”

실도 집에서 뽑았다고예?”

그라믄. 이 무르팍 우에 대놓고 실을 살살 꼬아. 얼매나 문질러댔으면 그때 처자들이고 젊은 새댁들은 무르팍이 매끌매끌 반닥반닥 해졌거덩.”

엄마는 미영 따던 손길을 멈추고 허벅지에다 살살 실 꼬는 시늉을 해 보여.

세월이 좋아져서 실 안 꼬아도 되고 삼베야 모시야 베 안 짜도 되고. 베장사 집에 가면 알록달록 고운 기 얼매나 많노. 여자들이 살판 났지럴

엄마는 다시 허리를 구부리더니 또 벙어리가 된 양 말없이 미영만 따.

노을이 붉은가 싶더니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져. 엄마는 그때서야 미영을 펼쳐놓은 광목자리를 매동그려 머리에 이고 일어섰어. 엄마 머리에 미영보따리가 앞산만 해.

 

고만 놓아도 되련마는

이듬아지매가 보다 못해 또 한 마디 했지만 엄마는 대꾸도 않고 솜뭉치를 얇게 펴서 한 켜 더 놓아. 손바닥으로 납신납신 눌러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한 뭉치 꺼내서 펴놓기를 몇 번째인지.

솜 너무 놓으면 안 무겁겠나?”

이듬아지매는 도무지 못 말리겠다는 듯 허리를 젖혀 기지개를 켜며 뒤로 물러나 앉아.

숨죽으면 얼마나 돼서.”

엄마는 손바닥으로 부푼 솜을 고루고루 눌러 앉히면서 겨우 입을 떼.

솜 놓는 깐이 있는데. 이만하면 마이 들어갔지. 세 채 꾸밀 꺼를 두 채에 다 놓은 것 겉구마는

이듬아지매는 솜을 많이 놓는다고 타박이지만 엄마한테는 반 마음에도 안 차는지 만져보고 들춰보고 또 눌러보고.

고초당초보다 맵다카는 시집살이, 밤에라도 폭딱한 이불 덮고 눕어야지. 시집 살다가 오매 생각은 얼마나 날끼고, 요이불이라도 뜨뜻하이 해줘야지

엄마는 딸같이 키운 막내 시누이 시집보내는 마음을 그렇게 달래는 모양이야. 꽤 두툼하게 놓였건만 그것도 못 미더워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가 자분자분 눌러 보다가 솜 한 덩이 더 꺼내다 또 한 켜 더 펴놓고. 몇 번을 들추어보면서 솜 더 놓고 살살 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더니 실바늘을 찾아 들어.

엄마는 굵은 바늘에다 길고 길게 실을 꿰어.

이불에 매듭 많으면 살면서 매듭지을 일 많이 생긴다카더라.”

한 땀 뜰 때마다 팔을 높이 뻗어 길고 기다란 실을 몇 번에 걸쳐 뽑아 올리자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불편할 텐데. 엄마는 이불 다 꾸미도록 그렇게 팔을 높이높이 치켜 올리며 실바늘을 뽑아 올려.

고초당초겉은 시집살이이이

에미가 끼미 준 요이불 찾아서어어

고단한 몸 뉘이고오오오

서러븐 맘 달래보지이이이

에미 만난 드으읏이 에미품 만난 드으읏이

눈물이라도 닦아보지이이이.”

한동안 잠잠한 방 안에 한숨처럼 노래처럼 엄마의 노랫가락만 끊어질 듯 이어져.

이 이불 폭딱하이 진짜 뜨시겠다 그죠?”

다 돼가는 고운 공단 이불을 쓰다듬으며 야야가 불숙 말을 꺼냈어.

그래, 낮에는 시집살이 눈치 보이고 고달파도 밤에라도 편하게 누우라꼬. 폭딱하이 뜨시야제.”

엄마도 야야를 돌아보더니 마음에 드는지 이불을 한번 쓰윽 쓰다듬어.

야야 니 시집갈 때도 이래 좋은 이불 해 줄끼다. , 저래 꼭닥시럽은 너거 엄마가 딸 시집가는데 어데 보통 마음으로 해 주겠나.”

이듬아지매가 웃으면서 말했지만 야야는 마주보고 웃지도 못하고 고개만 폭 숙여.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고 무어라 말도 못하게 가슴이 뭉클했거든.

포슬포슬 보드라운 미영이 코끝을 살살 건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운 두부 덩어리가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 같기도 하고. 뭐라 말할 수도 없이 눈가가 뜨뜻해지면서 코가 맹맹해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