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
“유방암, 맞네요. 크기도 꽤 크고, 5센티 좀 넘는데다 림프절 전이도 많이 된 편이고. 이 정도면 유방암 3기로 봅니다.”
좀 젊어 보이는 의사가 담담하게 말하는 얼굴은 웃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둡거나 무거운 것도 아니다.
“그리고 환자분 같은 경우엔 트리플 네거티브, 삼중음성유방암이라 합니다.
유방암 검사는 호르몬 수용체 검사와 허투 검사를 하는데, 이게 모두 음성반응이 나왔다는 거죠.”
“네…….”
딱히 못 알아들을 말도 아닌데, 머릿속이 우우웅 아니 흐릿해지는 건가? 그것도 아니고 그냥 머릿속 모든 게 막 엉키는 것 같다.
‘삼중음성 뭐라고?’
내 머릿속이 읽혀지기라도 하는 듯, 의사는 종이를 한 장 펴더니 열심히 써 가면서 말을 이어간다.
“여성호르몬 두 가지에 대한 반응검사를 하고, 그리고……”
호르몬 수용체 → 에스트로겐, 프로게……
허 투
“이 세 가지 반응검사에서 모두 음성이 나왔다는 겁니다.”
“…….”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치료가 비교적 쉽다고 볼 수도 있는 게……”
의사는 종이에 적힌 에스트로겐, 프로게 어쩌구하면서 글자 위에 동그라민지 줄인지 의미 없어 보이는 황칠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 세 가지는 수용체들이 호르몬이나 유전자와 결합해서 암세포가 크는 경우라서 이 결합을 끊어주면 되겠죠?
환자분처럼 모두 음성반응인 경우는…… 적을 모른다고 할까요? 정확한 치료 포인트를 잡기 어려운 경우라고 할까요? 그래서 호르몬 요법도 안 되고 좀 어려운 경우고요. 그리고 3기라면 병기도 가벼운 편이 아니라서……”
이럴 땐 할 말을 빨리, 그리고 자세히 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젊은 의사는 아주 빠르게 조근조근, 참 친절하기도 하다. 말하는 내용이 들리지 않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들을 본다면 아마도 참 다정다감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발바닥 아래 모래알들이 썰물에 확 쓸려나갈 때처럼 두 발 아래가 푸욱 패이는 것 같다. 남편이 슬그머니 등을 받치고 섰다.
그리고. 아까 뭔 말을 들었는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은 지금 이 글을 쓰는데, 뭔가 정리가 안 되네. 의사가 저렇게 말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기억력 좋다는 말 참 많이 들었는데, 하나 분명한 게 없고 흐릿하기만 하다.
“일 년 전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새 3기까지 진행됐다는 겁니까?”
얼어붙은 듯 서 있던 남편이 겨우 입을 뗐다.
“예, 이놈이 좀 그렇습니다. 상당히 공격적입니다. 진행이 빠르고 예후가 안 좋은 놈이라. 그래서……”
아무튼 의사는!
의사는 침을 삼키는 건지 숨을 돌리는 건지 잠깐 멈추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공격성, 진행 뭐든 빠른 편인데, 환자분은 림프절에 전이도 많이 된 상태라서 치료가 빠를수록 좋죠. 항암치료 먼저 하고, 수술하고, 수술은 또……, 크기가 커서 전절제해야겠고요, 림프절도 덜어내야 하고, 방사선치료도 꽤 여러 번……”
다른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더 꺼내 적으면서 부지런히 설명한다.
항암 - 8~12
수술 - 전절제, 림프절 절제
방사선……
“선생님, 서울에 갈랍니다.”
남편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흐흐’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온다.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보니 남편 얼굴이 더 우습다. 왜 나보다 자기가 더 혼이 빠져서는. 마누라 암 걸렸다는 걸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했는데 수술이다 항암이다 전절제니 어쩌니. 얼마나 놀랐으면 밑도 끝도 없이 그저 터져 나온 말이 “서울에 갈랍니다!”란다. 흐흐.
다짜고짜 서울 간다고 내지른 말 수습은 해야지. 이런 건 내 몫이지.
“선생님, 검사 좀 더 받아보고 숨도 좀 돌리고 치료 일정 의논드릴게요. 딱 1년 전에 했던 건강진단에서 아무것도 안 나왔는데, 하도 믿기지 않아서…… 검사가 잘못됐을 리는 없겠지만요.”
“예, 그러십시오. 필요한 서류 떼 드리겠습니다. 1층 원무과 앞에 기다리셨다가 받아 가십시오.”
이 또한 빠르다. 환자나 환자 보호자가 이 정도로 말할 때는 서울로 갈 게 뻔하다 싶은지 원래 성격이 그런지.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그러라고. 이건 참 맘에 든다.
진료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오는데, 남편이 팔을 콱 움켜잡는다.
“아아, 아파.”
괜히 남편한테 짜증을 내며 팔을 빼려는데 아무 말 없이 힘만 더 주어 꽉 잡는다. 옆에서 보니 금방 넘어질 듯 고꾸라질 듯 휘청거리더란다.
서울에 있는 유방암 전문가 친구에게 연락하니 어서 오란다고, 여고 다닐 때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그렇지, 나한테는 친구들도 있었다. 무엇 하나 또렷하지 않고 머엉한 채, 무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제 일처럼 나서서 알아봐 주는 친구가 있었네.
“까똑!”
그리고 또 다른 하나.
산정특례질환자
안녕하세요. 정성을 다하는 국민건강보험입니다.
***님의 산정특례 등록이 완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암, 5년 적용, 본인부담률 5%
공단은 과도한 의료비 지출로…… 어쩌구…… 저쩌구……
“와아, 여보 진짜 대단하죠? 이런 것도 있네. 우리나라 시스템 하나 끝내주네, 그쵸? 아직 병원문 나서지도 않았는데 이런 게 다 오네.”
문자를 보여주면서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갑자기 아득해진다. 그리고 한 몇 초 뒤에는 좀 괘씸하다.
“검사 한 번 더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니는 인자 암 환자야!”
그러고 못 박아버리는 거잖아.
드라마에서 본 듯한 법정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증인,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피고, 예 아니오만 하세요.’
뭐 그런 답답하고 막무가내였던 한 장면.
‘다시 검사받아보면 좀 다를 거야.’
‘뭘, 그렇게 5센티가 넘도록 컸을라고.’
‘뭐어 그렇게까지 전이가 되었을라고.’
‘요즘 아무리 암이 흔하다고 해도 암이 그렇게 쉽게 걸리냐고.’
그러면서 쉬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련 떨까 봐?
‘응, 아니야! 니 아무리 그래도 암 환자 맞어!’
쳇, 친절하기도 하시지. 아예 땅땅땅 선고를 내려주시네.
두어 달 전부터 오른쪽 젖가슴이 아프고 젖꼭지가 콕콕 쑤시듯 아프다가 딴딴하게 뭉쳤다가. 그럴 때부터 은근히 걱정도 하고, 혹시나 하고 검사를 받았다. 검사해놓고도 ‘암일지도 몰라.’ 하고 마음으로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따가운 듯 뜨거운 듯 화끈거린다. 꼭 방패연 신세 같아. 가느다란 연줄에 매달려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가 갑자기 획 고꾸라져 떨어지며 빙글거리는 방패연. 아, 그래, 방패연아 너 참 둥둥 어지럽고 울렁울렁 매스꺼웠겠다.
‘뭐어 그리 급하다고……. 겨우 검사 한 번 받았구만.’
괜한 ‘까똑!’이나 탓하면서 병원 문을 나서는데, 저 앞에 보이는 하늘.
“아아이 씨, 하늘은 또, 왜 저렇게 새파랗고 지랄이야!” (2021. 5. 10.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