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용구 삼촌 / 이승희
권정생 선생님 !
≪우리들의 하느님≫을 읽고 이 글을 씁니다. 이 책을 한 열 권쯤 샀지요. 미국에 있는 언니한테도 보내고 둘레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보았어요.
저는 선생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성 프란치스코 같은 분이라고 늘 이야기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모든 자연을 형제로 여기고 온갖 짐승들과 함께 살았지요. 자연과 함께 가난하고 소박하게 산 프란치스코가 기독교를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성인으로 대접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추운 겨울밤이면 새앙쥐가 이불 속으로 들어와 자고 가고, 개구리랑 닭이랑 방 안으로 뛰어들어오기도 한다는 선생님과 꼭 닮았어요.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선생님이 쓰신 동화 <용구 삼촌>에서도 나타납니다. 다복솔나무 밑에 웅크리고 고이 잠든 용구 삼촌 가슴에 회갈색 산토끼 한 마리가 삼촌처럼 쪼그리고 함께 잠들어 있었지요. 산토끼에게 용구 삼촌 품은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했을까요? 또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곽노순 목사님이 ≪녹색평론 19호≫에 쓴 글에서 인간이 속을 맑게 비우면 자연이라는 벗들 틈을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스승이 아마존 정글 안을 누비며 다닐 때 밀림에서 온갖 소리들이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나는 겁니다. 그에게서 밀림을 해치는 어떤 냄새도 맡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숲 속을 걸어다녀도 숲 속에서 오만 가지 소리들이 계속 난다면 그는 완전히 그 숲의 한 부분이 된 게 아닐까요?
요즈음 일하는 삶, 일 가운데서도 자기 먹을 것 스스로 가꾸고, 자기 살 집 스스로 짓는 사람, 또 그런 삶을 위해 농촌으로 가는 사람이 많이 보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흙으로 돌아가는 삶' '바보로 돌아가 살려는 사람' 들이지요. 흙 안에서, 흙 위에서 참으로 느긋하게 살아가려는 것이지요.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 삶에서 가장 기초가 되고 또 한편 가장 중요한 삶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늘 위에 군림하여 스스로 낳는다(生産)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선생님은 쓰셨더군요. 그러면서 인간이 다시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일하는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푸른 대지 위에서 당당하게 주인으로 일하는 노동자가 되어야만 한다구요. 이 땅에 사는 천재들은 머리로 살아가지만 바보는 몸으로 산다구요. 맞습니다. 간디가 그랬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랬고, 선생님이 그랬고, 용구 삼촌이 그랬지요.
그런데 선생님, 농촌에 가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냥 자연과 함께, 나 자신이 바로 자연이 되어 살겠다는 사람은 드물어요. '생태 마을을 만들겠다' '대안 학교를 만들겠다' 무슨 '공동체'를 만들겠다며 수없이 많은 말들을 내놓고 있더군요. 자연 안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기만 하면 굳이 이렇게 살겠다, 저런 걸 세우겠다 말하지 않아도 그런 건 저절로 된다고 믿어요. 그러한 삶의 파장은 저절로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언제나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고, '말'이 말썽을 피우잖아요. 적어도 자연처럼 살아보겠다는 사람이라면 '말'은 흐르는 강물에 다 흘려보내야지요.
선생님!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처음 '용구 삼촌'을 읽었을 때 그래, 바로 이거구나 싶었어요. 새처럼 깨끗하고 착한 마음씨를 지닌 삼촌은 소도 제대로 몰고 가지 못해 삼촌이 소를 데리고 간다기보다 소가 삼촌을 데리고 간다고 해야 맞다지요. 누렁이가 앞장 서서 가고 삼촌은 고삐를 잡고 그 뒤를 쫄쫄 따라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그런 삼촌이기에 산토끼가 그 품에 들어가 잠들 수 있겠지요.
누군가에게 "내 꿈은 용구 삼촌"이라고 말했더니, "어? 그러면 예수 되겠다는 소리네."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그렇데요. 그런데 예수 되겠다는 건 감히 꿈도 못 꾸겠는데 용구 삼촌이 되겠다는 건, 어쩐지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랬습니다. "몰라, 예수는 모르겠고, 어쨌든 나는 용구 삼촌이 될란
다." 저는 요즈음 용구 삼촌처럼 살기 위해 이리저리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거기서 그렇게 사시며 맑은 기운을 멀리까지 퍼뜨리고 계시니 제 삶이 그 기운 덕분에 조금씩 조금씩 용구 삼촌 가까이 가게 되리라 믿습니다. 우린 아무도 그걸 알진 못하지만 그저 우리가 모를 뿐 분명 그렇게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선생님, 늘 건강하십시오. (97. 8. 20)
(이승희 선생님은 한국 글쓰기연구회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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