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종만 아제
오늘은 우리 동네 종만 아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어릴 때부터 우리 동네서 같이 살았던 아젠데 어릴 때는 길에서 만나면 그냥 인사나 하고 지나치던 분이야. 젊은 부부만 사는 댁이라 놀러 갈 일도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계셔서 제삿밥을 이고 심부름 갈 일도 없으니 우리 같은 어린 아이들하고 가까워질 일이 없었거든. 동네에서 특별히 눈에 띄거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도 없이 묵묵한 분이었어.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왜 그런 분 이야기가 하고 싶냐고?
얼마 전에 우리 엄마 생신이 지나갔어. 개구리가 나온다는 우수경칩하고 가까운 봄날에 엄마가 태어나신 거지. 그 덕에 우리 식구들은 해마다 봄기운 가득한 날 생신을 축하드리고 모두들 밭으로 달려나갈 수 있어. 우리 형제들은 다들 도시에 사니 그 날을 핑계로 고향 들판에 온 봄을 마음껏 즐겨. 아침에 생신상을 차려 드리고 나면 집에 있는 칼이든 호미든 다 찾아 들고 밭으로 나가서 봄나물도 뜯고, 엄마댁 감밭에 거름도 내고 그래.
그날도 아침상을 차려놓고 주인공 엄마가 들어오시기만 기다리는데 마당에 계시는 엄마가 들어오시질 않아. 어서 아침 먹고 감밭에 거름 내러갈라고 준비하고 있는데 말야.
"엄마 어서 오시라고 해라. 너거 힘으로 거름 다 내고, 쑥도 좀 뜯고 부산 내려갈라카면 바쁘대이. 서둘러야 해 안에 집에 들어가지."
'보통 때 같으면 엄마가 더 서두르실텐데 오늘 따라 웬일이시지?'
아버지가 재촉하시는 것도 그렇지만 마당에 무얼 하시나 싶어 나갔더니 글쎄, 엄마는 아예 대문 밖에 떨어진 종이 박스를 깔고 처억 앉아 계시는 거라. 옆에 앉은 분하고 두런두런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내가 나가도 모르고 그냥 얘기만 하셔.
"아이구 청암 양반도, 넘들이 뭔 소용이 있능교?"
"그래도 인자 나이를 묵으이 넘들 말도 자꾸 귀에 들어오고, 딸아아들 치울 때가 되이 넘 눈도 자꾸 생각키고 그렇습니더."
"그래 말하는 그 삼들이 못났지. 내사 청암 양반이 높이 비더라."
"참산 마느래나 그래 카지 아무도 그래 생각 안합니더."
"요새 젊은 사람들 자존심 이야기 잘 하데. 고물쟁이라꼬 넘 낮차 보는 그 사람들이 자존심이 있는 기 아이고, 내사 넘한테 손 안 벌리고 지 힘으로 이래 떳떳하이 사는 청암 양반이 자존심 있는 기라꼬 생각한다. 뭣도 없으민서 체면치레하는 거 그거 아무 짝에도 씰데 없는 기라."
"지도 그래 생각했는데예. 인자 나 묵어가꼬 술자리서 고물쟁이 니는 저어 앉아라 카는 것도 웃으민서 안 들어지고 그렇습니더."
"그 삼들도 차암."
"딸래미 치알 때 고물쟁이 딸이라칼까봐 그기 젤 맘이 쓰입니더."
"그래도 그 고물이 저거들을 이래 참하기 키아준 기나 마찬가진데."
"맞습니더. 지가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어데 지 땅이 한 뙤기 있었습니꺼. 온 들에 고물 주우다가 저래 모다 놓고 학교 돈 가져 가야된다 카면 한 차 실어다가 돈 바까 오고, 옷 산다 카면 또 한 차 싣고 가지예, 병원 간다 카면 또 싣고 가면 되지 예. 이 날 꺼정 돈 한 푼 나올 데 없는 우리 형편에 저 고물이 우리 식구들 안 살맀습니꺼."
"그래, 아아들도 그걸 알 끼라. 그거 알면 저거 아버지 고물쟁이라꼬 부끄럽다 안 카구메."
"아아들이 그카는 기 아이고, 지 마음이 그렇습니더. 시집에서 친정이 고물하는 집이라꼬 아아들 업수이 볼까 싶어서."
"부모 마음이 와 안 그렇겠능교? 그래도 아아들 참하게 키아놨는데 어데서 그런 말 할끼고? 괜찮구메."
"이 날꺼정 친구들이 아무리 고물쟁이라꼬 업수이 여겨도 참고 살고, 동네서 지 이름 안 부르고 고물, 고물캐도 치아뿔라 생각 안 했는데. 딸아아들 앞길에 걸릴까 싶어 걱정입니더."
"그래도 청암 양반요, 이 나이에 저거 내삐리고 집 깨끗이 공단겉이 채리놓고 두 손 딱 놓고 산다고 생각해보소. 시집간 딸아아들이 아버지 생활비 걱정하민서 살구로 하는 기 그 아아들한테 좋겠나? 집이 고물 천지면 어떻노? 내 힘 있을 때 내가 움직거리민서 내 입에 들어갈 거 내 손으로 해 묵는기 편하겠나? 자석은 부모 벌어 논 거 편하게 받아 묵을지 몰라도 내사마 자석이 벌어 논 거 편하게 몬 받아 묵겠더메."
"지도 그래 생각은 합니더. 그래도 저것들 클 때 늘 헌 옷 받아다 입히고 학교를 가도 늘 헌 것 구해다 주고 했던 기 맘에 걸리서. 시집갈 때라도 고물쟁이 딸 소리 안 듣구로 하고 싶어서 그래서 이래 맘이 됩니더."
"그 맘이야 백 번 알제. 헌 거 입히는 거는 숭이 아이구메. 우리도 아아들 여섯 키우미 새거 한 번 몬 사주고 키아서 그 마음 백 번 알지러. 부모 마음이사 와 안 그렇겠능교? 그래도 우리 저 아아들 그래 커도 그거 한으로 생각 안 하구메. 요새는 저거들도 저거 새끼들 그래 얻어 입히고 키우는데 뭐. 지금도 우리 뒷방에 가보소. 큰 미느리부터 막내이꺼정 아아들 키우고 남은 거 다아 갖다 놨구메. 그래 갖다 놓으이 누구든지 오면 저 뒷방에 가서 맞는 거 개리 입고 안 가능교. 나는 그거 하나는 우리 아아들 잘 키았다 생각하구메."
"맞습니더. 지가 이래 마음이 되다 캐사도 또 들에 나가다가 쇳쪼가리 하나라도 보이면 또 주워 옵니더. 마당에 고물 있는 거 다 내다 팔고 깨끗하이 치울라꼬 마음 묵고는 도랑에 빈 병이 빠져있으면 못 지나가고 또 주워오는기라예. 하루는 지가 지 손목댕이를 막 때맀다 아입니꺼."
"나는 청암 양반이 그라는 기 높이 보이구메. 깨끗하고 편한 거 안 좋은 사람이 있겠능교? 그렇지마는 넘 눈에 깨끗하이 보인다꼬 속꺼정 다 그런 거는 아인갑더마는. 평생을 넘들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고개 숙일 일 안하고 사는 거 그기 진짜로 인품있는 기지. 속으로 다 썩은 사람들 많구메. 그 사랍들 불버할 꺼 하나도 없구메."
"............"
두 분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나는 내가 엄마를 모시러 나왔다는 것도 잊고 있었어. 어릴 때부터 동네에 같이 살았지만 나는 종만 아제가 그런 분인 줄 몰랐어. 엄마를 모시고 가야한다는 생각도 까맣게 잊고 나도 그 옆에 서서 두 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 뒤로도 한참을 서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