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나한테 하는 말처럼 절절이 와닿는 글이 있습니다.
혹 나처럼 느낄 분이 있을 거 같아 옮깁니다.
나는 이 글을 정말로 마음에 새기고 싶어
오늘 아침에 공책에 천천히 옮겨썼습니다.
원문에는 '당신'이라 호칭이 되어있는데
'나'로 고쳐 썼습니다.
그러니 더 생생합니다. 바로 나한테 들려주는 말입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택도 아닌 저런 인간이 '대통령'이 되는,
이런 어이없고 남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들 집단의식을 영적으로 쪼꼼이라도 높이는데에 힘쓰는 것도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 아닐까 합니다.
<폭력을 쓰는 사람>
안소니 드 멜로(신부)
막 피어난 장미의 싱싱하고 아름다운 모습과, 긴장 속에서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내 삶을 견주어 본다. 장미에게는 나한테 없는 선물이 있다. 장미는 자기 자신으로 완벽하게 만족한다. 사람처럼 태어나면서 입력된 프로그램도 없고 자신한테 아무 불만이 없는 지라, 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 사람 가운데 어린 젖먹이들과 성인들한테나 겨우 발견되는 천진무구와 내적 갈등의 부재(不在)를 장미가 지니고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내 딱한 처지를 보자. 나는 늘 내가 못마땅하고 그래서 어떻게든지 나를 바꾸고 싶어한다. 그 결과, 나를 바꾸려는 모든 노력에 따라오는 폭력이 조바심과 함께 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바뀌어도 내적 갈등은 따라다니게 되어있다. 거기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거나 내가 되지 못한 것이 된 다른 사람들을 보면 배가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
내가 저 장미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하고 나 아닌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그래도 남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괴로울까?
그런데, 만약 나를 바꿔보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면, 나는 내 안팎의 모든 것을 수동으로 받아들이면서 멍청한 상태로 잠을 자게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자신을 못살게 들볶지 않으면서 멍청한 피동태로 살지도 않는 '제3의 길'이 있다. 자기 이해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길은 쉬운 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를, 나 아닌 무엇으로 바꾸려는 욕망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야 하니까.
개미를 변화 시키려는 마음없이 개미의 습성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와 개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개의 습성을 연구하는 조련사의 태도를 견주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고 그냥 있는 대로 나를 관찰한다면, 스스로를 판단하거나 비난하거나 고쳐보려는 마음 없이 사람과 사물에 대한 나의 반응을 연구한다면, 그런다면 내 눈길은 무엇을 취사선택하거나 변명하거나 굳어진 결론을 내리는 대신 언제나 순간순간 신선하게 열려있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들을 보게 될 것이다. 나 자신은 어느 새 밝은 깨달음의 빛으로 충만하여 투명하게 변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과연 일어날까? 물론이다. 내 안에서도 일어나고 당신 둘레에서도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교활하면서 분주하기만한 나의 에고가 일으키는 변화가 아니다. 내 에고는 끊임없이 겨루고, 비교하고, 강요하고, 설교하고, 조급한 욕심으로 무엇을 꾸며 만들고. 그리하여 나와 대자연 사이에 끝없는 긴장과 투쟁과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야말로 브레이크를 잔뜩 걸어놓고 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기운만 빠지고 아무 이루어지는 게 없는 헛수고일 뿐이다.
반면에, 깨달음에서 오는 변화의 빛은, 내 에고의 온갖 계획과 시도를 옆으로 밀쳐두고, 대자연이 한 송이 장미한테서 이루는 천진스럽고 우아하고 온전하고 속에 아무 갈등도 없는 변화를 내한테서 그대로 이루도록 나를 대자연에 내다 맡긴다.
모든 변화에 힘이 필요하니까 대자연도 힘을 써야겠지. 그렇다. 대자연도 힘을 쓴다. 그러나 대자연의 힘은 에고가 쓰는 힘과 달리, 조급함과 자기-불만 또는 자기-혐오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다. 홍수로 모든 것을 쉽쓸어버리는 폭우나, 우리가 모르는 생태계의 법에 따라서 새끼들을 삼키는 물고기, 더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세포들을 파괴하는 세포들 안에는 분도도 증오도 없다. 대자연이 무엇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거나 자기-확장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부분의 존속과 안녕 대신 전체 우주의 선(善)을 지키려는 신비스런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장미를 싫어하는 사람 면전에서 한 송이 장미를 당당하게 피워내는 것도 바로 이 힘이다. 한 송이 장미에게 꽃잎을 활짝 펼쳐 화려한 빛깔 뽐내며 향기를 떨치다가 때가 되면 그 수명을 한 치도 연장하려는 기색없이 그야말로 미련 없이 가차 없이 시들게 하는 것도 바로 이 힘이다.
그런즉, 이 힘으로 사는 사람은, 깨달음의 꽃을 피우는 것으로 만족하며, 모든 변화를 대자연 속에 있는 하느님 힘에 내어 맡기고, 공중의 새들처럼, 들의 꽃들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그들한테서는 오늘의 인간세상을 특징짓는 불만도, 불평도, 쉴 새 없이 무엇을 추구하는 분주함도, 남에 대한 질투도, 남과 겨루어 이기려는 경쟁심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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