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가 만나는 아이들

종현이 시험지

야야선미 2005. 3. 9. 13:27

"쌔엠~"
종현이가 아주 걱정스런 얼굴로 내 옆에 섰다.
"저어기요오. 저거어 시이험 보는 거예요?"
칠판에 붙여놓은 시간표대로 책을 뽑아 들다가
첫째 시간, 둘째 시간에 시험이라고 적힌 걸 보고 걱정이 된 모양이다.
조금 있다 아이들이 다 오면 오늘 시험에 대해 이야기할려고 했는데
종현이가 먼저 본 것이다..
"그래, 오늘 시험 두 시간 친다."
"진짜요?" 그러고 암말 않고 자리에 들어가서 앉는다.
'진짜요?'하는 그 말이 그냥 확인만 하는 게 아닌 듯 하다.
종현이는 제자리로 가더니 필통을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가만 있질 못한다.
책을 폈다가 넣었다가 다시 필통을 열고 지우개를 꺼내더니
책상을 여기저기 마구 문지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살살 문지르더니 나중에는 지우개가 휘어져 끊어지도록 콱콱 힘을 주어 문댄다.
"팔 아프겠다." 가까이 가서 말을 붙여도 그냥 문질러댄다.
"종현아, 고마해라. 팔 안 아푸나?"
"아이씨, 몰라요."
종현이는 나하고 더 말하기 싫다는 듯 얼굴을 두 팔 사이로 더 쑤셔박는다.
종현이하고 더 말을 할라는데 첫 시간 종이 울리고 옆 반에서 시험지 뭉치를 들고 왔다.
시험지 뭉치를 받아들고 내 자리로 가는데 갑자기 종현이가 '와아악' 소리를 지른다.
아이들이 놀라서 다들 종현이 쪽으로 쏠린다.

이제 갓 삼학년이 된 이 아이가 이렇게 시험에 대해 걱정이 크다니.
갑자기 내 가슴이 콱 막힌다.
집에서 어머니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하다. 집안 분위기까지 걱정이 된다.
"야아들아, 종현이가 시험 친다고 해서 많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너거들도 걱정 많이 되나?"
여기저기서 너댓이 '네' '네' 한다.
"오늘 시험은 점수 매기고, 너거들 등수 매기는 시험이 아인데."
아이들은 '그러면요?' 하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칠판에다 '기초학력평가'라고 크게 쓰고 돌아섰다.
"오늘 시험은 학교에서는 이렇게 말해. 이거는 너거들 등수 매기는 시험이 아니고, 의사 선생님이 진찰하는 거 하고 같아."
아이들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빤히 올려다본다.
"환자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잘 진찰해야 알맞은 처방을 해서 잘 치료할 수 있겠지?"
"오늘 치는 시험이 바로 진찰하는 거하고 같아.
아하, 이 동무는 글을 읽고 내용은 잘 알아내는데 부르는 말을 쓰는 게 좀 안 되는구나,
이 사람은 물건을 셀 때 쓰는 낱말을 잘 아는데, 편지 쓸 때 필요한 내용을 다 모르는 구나.
이렇게 진찰하는 거야."
몇몇 녀석은 어서 손에 있는 시험지나 줄 것이지 하는 얼굴이다.
"이 동무는 천까지 숫자를 잘 아는데 크기 비교가 잘 안 되는구나.
이 사람은 뛰어세기를 잘 하는 걸 보니 곱셈은 쉽게 잘 하겠는데.
이렇게 여러분에 대해서 잘 알게 되면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한테 꼭 필요한 것을 더욱 힘써서 도와줄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잘 알고 있는 것은 자신있게 답을 쓰고,
잘 모르겠으면 그냥 두어도 돼요.
조금만 알겠으면 조금 아는 것까지만 쓰고.
여러분 시험지를 보고 나중에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한테
내가 어떻게 도와줄지 잘 계획을 세울 거예요. 마음 푹욱 놓고 시험 보세요오!"
"그라면 엄마한테 안 보여줘도 돼요? 싸인 받아 오는 거 아니지요?"
"그렇지. 이거는 진찰하는 거니까 내만 보면 돼요."
"진짜지요?" 종현이가 다짐을 받는다.
"걱정하지 말래도. 이거는 여러분이 잘 모르는 거를 치료해 줄라꼬 하는 거라니까."
아이들은 시험지를 받아들자 진지하게 써 나간다.
언젠가 건강진단 받을 때, 정말 진지하게 문진표를 썼던 생각이 난다.
아이들이 시험이라 생각하지 말고 정말 문진표 쓰듯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종현이 시험지부터 찾아 들었다.
아주 걱정스런 반응을 보이던 놈이라 그 녀석 시험지가 제일 궁금했지요.
그런데 걱정했던 마음과는 달리 첫 문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이런 시험 답안 은 처음 본다.
<나는 안 가벼습니다.> '발걸음도 가볍게'를 받아쓰는 문제.
<빨리 오면 종켓습니다.> "아버지가"를 높임말로 바꿔 보라는 문제.
<지금은 하늘이 꺼머습니다.> "놉고 푸른 하늘"에서 틀린 낱말을 고치는 것이다.
갈수록 종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다 싶다.
모든 문제를 자기 걸로 만들어 자기 답을 쓰고 있다.
<모르미다>
<잘 모름니다>
<나는 이게가 아픔니다. 가르처주새요> 일기쓸 때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을 고르는 문제
<자신있께 - 3번> 일기글을 읽고 답을 찾아 번호를 쓰는 문제,
<쪼 어려게 - 태극기> 늘어놓은 홀소리 닿소리를 모아 낱말 만드는 문제다.
드디어 마지막 문제다.
나무 한 (번만 올라 가)
연필 한 (번 쓰께>
생선 한 (번 먹자요)
운동화 한 (200쯔 되요)
시험지를 매기면서 나는 오늘 충현이를 한 번 안아주지 못하고 보낸 것이 마음 아프다. (2005.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