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목고에 가려는 서인이에게
서인아, 네게 편지 써 본 지가 언제였더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네.
오늘은 바람도 없네. 파란 하늘가에 몽글몽글 하얀 양떼구름이 흐른다. 가을하늘이다. 새하얀 양떼구름이며 새파란 하늘빛을 보니 이제 정말 가을이 맞구나 싶다.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송도바다도 잔잔하고 맑구나. 맑은 날은 저 끄트머리에 대마도도 보인다고 하던데 아무리 봐도 그것까진 모르겠다. 수평선 언저리에 거무스름한 게 가끔 보이는데 그것이 대마도인지, 구름인지, 바다인지 모르겠어.
운동장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다가, 조금씩 노란빛도 비치고 불그스름한 빛도 도는 벚나무 잎을 보다가, 우리 서인이 생각도 하다가. 그러면서 한참 서 있다. 요새 너거들 말로는 멍 때리고 있다고 하지? 그렇게 멍 때리면서, 운동장에 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네 어릴 때 생각도 나네. 초등학교 다닐 때 말이야.
‘머리를 길게 묶은 걸 보면 분명 여자아이 같은데! 운동장이나 꽃밭 울타리나 스탠드 층층대나 겁 없이 휙휙 날아다니며 설쳐대는 저 선머슴아겉은 딸래미는 도대체 누구지?’ 하고 보다가 우리 딸 서인이라는 걸 알아보고는 깜짝 놀랬던 일. 그 뒤로 점심시간마다 짬만 나면 널 찾아보게 되었지. 창가에 붙어 서서, 휙휙 날아다니는 네 모습을 찾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번졌거든. 그 때부터 그 시간도, 널 키우면서 얻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 중에 하나가 되었지. 넌 그때부터 우리가 아무리 ‘공주, 공주’하고 불러도 얌전하고 다소곳한 공주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었어.
선머슴아처럼 씩씩하고 털털하게 자라주는 ‘우리 작은아들’ 김서인! 오늘은 더 늦기 전에 네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뭐 우리한테 늦은 것은 없다고 하지만 이건 더 미루고 싶지 않아서 ‘더 늦기 전에’ 써야한다고 마음먹은 거다.
네가 어느 날 문득 “나 민사고에 가고 싶어요. 이 책 보니까 민사고 너무 멋져!” 했을 때 사실 난 참 놀랬거든. 그리고 고맙기도 하고. 고마웠던 건, “나 지금부터 하면 갈 수 있지? 한 번 해 볼래!”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야. 가고 싶은 학교가 생겼다는 것이 고맙고, 어렵다고 뒤로 나앉지 않고 ‘어디 한 번 해 보지 뭐’ 하는 의욕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지. 그런 마음을 먹고 그런 의욕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서인이가 공부에 지치지 않고, 학교생활에도 지치지 않았다는 말이니까. 너 만한 나이에 무슨 무슨 일을 해 보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그걸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건 참 소중하니까. 그래서 고마웠던 거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은 엄마가 참 놀랬다고 한 부분에 대해 좀 길게 말하고 싶어. 먼저 사과할 것부터. 언제부턴가 내가 이런 말을 자주 했지?
“우리 서인이 대학가면 그날로 부산생활 정리하고 시골로 가고 싶어. 뭐어 기숙사 있는 고등학교 들어가면 더 빨리 갈 수도 있고.”
“기숙사 있는 학교면 특목고 밖에 없는데?”
“거기 가면 좋고.”
네가 “민사고 간다.” 했을 때 엄마가 놀라고 미안했던 건, 우리끼리 가볍게 주고받은 그 말들 때문에 서인이가 특목고에 가야한다는 부담을 가진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랬다면 정말 엄마가 사과할게. 난 그냥 농담으로 끝냈던 것인데, 그게 아주 조금이라도 서인이한테 부담스런 말이 되었다면 정말 잘못했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움직여 일하면서 소박하게 살고 싶은 내 꿈이 소중하긴 하지만, 그래서 어서 빨리 시골로 가서 살고 싶긴 하지만, 우리 서인이나 오빠한테 그런 부담을 주면서까지 갈 일은 아니거든. 혹시라도 ‘엄마가 바라는 일이니까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특목고에 가야지.’ 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더라면, 내 마음이 그게 아니었다는 걸 지금이라도 꼭 밝히고 싶어.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이 말은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지. 내 걱정과 달리 그런저런 이야기들을 서인이도 농담처럼 받아들였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고.
그 다음에 민사고나 특목고에 가고 싶다는 네 말에 대해서 내 생각을 좀 말하고 싶어. 처음에 네가 민사고 가보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물었지? 왜 민사고에 가고 싶으냐고?
“동아리가 너무너무 다양하고요, 맘에 드는 게 많아요. 민사고 가서 동아리활동 재미있게 해 보고 싶어요.”
그래, 민사고나 특목고를 홍보하는 책이나 홈페이지를 보면 동아리활동이 참 다양하고 알차게 보이더라. 나도 마음이 끌리는 것이 많던 걸. 그래, 네 생각처럼 민사고나 특목고에 가서 고등학교 시절을 재미있고 유익한 동아리활동도 마음껏 하면서 보낸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여러 가지 걱정이 생기는 걸 말 안할 수가 없어서.
서인이가 하고 싶은 일은 참 많지? 프로듀스가 되어서 좋은 프로그램도 만들고 싶고, 훌륭한 다큐멘터리 작품을 만들고도 싶다고 했지? 디자인 공부를 해서 멋진 건축물도 만들고 싶고, 언젠가는 애니메이션도 하고 싶다고. 뭐 작가도 되고 싶고, 농사도 짓고 싶다고 했지? 기타도 멋지게 치고 싶고, 드럼도 땀나도록 두드리고 싶고. 그래, 한창 꿈이 많을 때야. 세상에 보는 일은 다 해 보고 싶고,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모두 다 잘 할 것 같고. 그지? 나는 서인이가 지치지 않고 재잘재잘 꿈을 얘기하고 있을 때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네 즐거운 에너지가 내 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거든.
그런데 말이야. 서인이가 민사고, 특목고를 목표로 정하고 나서 한 달쯤. 진짜 세월 빠르네. 벌써 한 달이나 되는구나. 그 한 달쯤 되는 시간을 지켜보면서 자꾸 마음이 아파지는 거야. 사실 처음에 네 결심을 들었을 때 바로 얘기할까 했거든.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얘기할 수 없었던 건, 네가 마음먹고 하겠다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의욕을 팍 꺾어버리면 되겠냐? 싶었던 거지. 둘째로는 한창 이런저런 꿈을 꿀 나이니까 한 달쯤 지나면 또 다른 멋진 꿈을 꿀 수도 있을 텐데 여기서 바로 김새게 하지 않아도 되겠지 싶기도 했어.
이제 보니 그런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 싶어. 한 달 동안 네 생활을 보면서 더욱 잘못하고 있구나 싶어서 이제 정말 ‘더 늦기 전에’ 이 말을 하고 싶어. 민사고, 특목고들의 입시정보를 보느라 인터넷을 뒤지다가 네가 “허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데요.” “와우, 이거 미친 거 아니예요? 스펙 모으는 것도 장난 아닌데요” 할 때마다 나는 네가 “나, 안할래.”하고 물러설 줄 알았어. 그런데 웬걸, 넌 그때부터 야무지게 계획을 짜기 시작하더구나.
국어능력시험은 겨울 방학 때 엄마하고 공부 좀 해서 봄에 시험치고, 수학 과학은 특목고 전문 학원에 등록해서 올림피아드 공부 하고, 기회 두 번 있으니까 지금부터 죽어라 해야 하고, 영어는 텝스하던 거 내년 일학기까지 기회 있을 때 마다 쳐서 최대한 점수 올리고, 내신 중요하니까 지금부터 예복습 열심히 하고…. 그렇게 빡빡하게 계획 짜고, 어서 학원가서 상담해보자고 재촉하고, 서점가서 책 사오고!! 그런 널 보면서 흐뭇한 점도 있었어. 하고 싶은 일을 정하면 저렇게 파고들어 매달리기도 하는구나! 암, 뭘 하려면 저 정도 집념이 있어야지. 맨날 덜렁거리는 선머슴아같더니 하고픈 일이 생기니까 애살도 좀 부리는구나. 그런 점에서는 널 보는 동안 잠깐 기특하기도 했어.
그런데 서인아, 시간이 갈수록 그게 아니란 생각이 자꾸 들어. 네가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그동안에 잃어버리는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이거든. 중학교 1학년, 2학년을 보내면서 넌 참 소중한 시간을 많이 보냈어. 엄마도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너한테는 정말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싶어.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께 도시락 배달을 하던 경험, 그래서 거기서 얻은 네 소중한 생각들. 그렇게 봉사활동 하던 시간은 지금 너 만한 나이에, 너한테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거든. “엄마, 내 방보다 작은 방 하나에 식구들이 다 살고 있더라고요.” “골목을 걸어가는데 어깨가 양쪽 담에 스치는 거예요. 얼마나 길이 좁으면. 그 골목에 방 하나하나가 붙어 있어요.” “그 할머니들 이야기도 재미있게 잘 하고요, 굉장히 밝아요.” “엄마 거기 갔다 오면 마음이 많이 그래요. 우리는 너무 부자로 사는 것 같아요.” “다음에는 엄마도 꼭 같이 가요, 네?” “의정이 어머니는 자주 가서 목욕도 시켜드리고 빨래도 해드리고 한대요. 엄마도 인자 학교 안 나가니까 내하고 같이 가요, 네?” 어려운 이웃들을 보고 와서 마음 무거워하고, 조금이라도 더 도와드리고 싶어 하는 널 보면서 나는 우리 딸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어.
그리고 얼마 전에 ‘사대강’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아, 저 돈으로 감천 그 동네 지원 좀 해주지. *바기는 지금 뭐가 더 중요한지를 몰라.” 했을 때 난 가슴이 더워지더라고. ‘아, 우리 서인이가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씩 열리는구나.’ 하고 말이지. 네가 어르신들 찾아다니는 봉사활동을 마음을 다해 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는 생각이지.
지지난해인가? 여수동에 감 따러 가면서 그랬지. “와아, 엄마 저 벼 색깔들 보세요. 노랑인가 하면 연두색이고, 연두색인가하면 또 그게 아니에요. 진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가 저런 색깔을 만들 수 있겠어요.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가을색이예요.” 벼가 익어가는 논길을 달리면서 네 입에서 쏟아지는 그 감탄들! 난 그때도 비록 작은 한 마디 말이지만 가을을 느끼고, 자연의 힘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네가 기특했어.
어디 그것만 있겠니. 억지로 시키지도 않은 도서관 도우미를 신청해서 네가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볼 수도 있다고 좋아하던 모습, 책을 한꺼번에 몇 권씩 빌려와서 밤늦도록 읽고는 그 감동을 이기지 못해 내한테 달려와서 종알종알 얘기해 주던 모습, 너무 좋은 책이니까 엄마도 일단 읽고 내하고 얘기 좀 해요 하던 네 모습, 그때마다 네 얼굴에는 빛이 나는 듯 했어.
“엄마, 우리 친구가요오, 고등학교 같이 가서 고등학교 때는 열심히 공부할라 하거든요. 그런데 내하고 고등학교 같이 갈라하면 일단 인문계 갈 실력이 돼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번 시험부터는 공부같이 할라고요. 갸들 모르는 것 내가 좀 가르쳐주기로 했거든요.” 학교 가서 동무들하고 정말 재미있게 잘 지내고, 이렇게 동무들 걱정까지 하면서 지내는 것도 난 참 자랑스러워.
그런데 서인아. 그렇게 빛나고 예쁘던 네 모습들이 특목고를 목표로 하고 나서부터 점점 빛을 잃어가는 거야. 왜 안 그렇겠니?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4학년 때부터 스펙인지 뭔지를 쌓아야한다는 그 경쟁의 구덩이에 뒤늦게, 중학교 2학년 2학기인 지금 시작을 해야 하는데. 네 마음이 얼마나 쫒기고 힘이 들겠니. 한 학기에 모든 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해야 하고, 자격시험인지도 봐야하고, 내신은 내신대로 올려야한다며. “뭐어 그렇게 해서 특목고 못 가더라도, 공부한 게 있으니 그게 어디 가겠냐.” “일반 고등학교 가더라도 그게 밑천이 되어서 잘 하겠네.” 어떤 선생님은 그냥 너 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선생님도 있더라만…. 내 생각은 달라.
좀 전에 말했지만 지금까지 네가 해오던 봉사활동, 도우미활동, 동무들과 지내는 소중한 시간들, 하늘도 보고 들도 보며 눈길을 줄 수 있는 여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생각해서 가끔 어리광도 부리는 네 따뜻한 마음. 그것들은 뒤로 미루거나 접어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꺼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 누구에게나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네가 하던 그 모든 것들도 특목고에 밀려 뒤로 젖혀둘 일이 아니라 싶거든. 우리가 살면서 특목고가 삶의 목표는 아니잖아? 특목고를 졸업하면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 따뜻한 마음도 가지고, 소중한 경험도 하고, 동무도 사귄다고? 그건 아닐 거라고 서인이도 생각하겠지.
서인아!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들, 그러니까 프로듀스니 작가니 건축디자인이니 음악가니 농부니….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 봐. 꼭 특목고를 나와서 서울 2호선 지하철권에 있는 대학을 나와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니? 꼭 아이비리그를 가야하는 것도 아니지? 특목고를 가기 위해 지금 버려야하는 네 소중한 경험과 삶. 그것들이 지금 서인이에게 더 소중하고, 우리 서인이가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라 생각하거든.
책상머리에서 책만 죽어라 파고들어 언론고시라는 시험을 통과해서 프로듀스가 된 사람보다는, 어릴 때부터 온몸으로 온 마음을 다해 이웃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 더 따뜻하고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 더 따뜻한 작가가 되겠지. 또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농사를 지어도 사람을 귀하게 생각할 것이고 하늘을, 자연을 거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 음악을 해도 사람을 더 감동시키는 음악을 하지 않을까. 작은 집 하나를 짓더라도 겉멋만 잔뜩 부린 집이 아니라 정말 사람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집, 자연과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집을 지을 거라 생각해.
너무 길어져서 편지 읽다가 자는 거 아닌가 몰라. 엄마가 서인이 손잡고 앉아서 소곤소곤 말하고 싶었는데, 사실 할 말이 너무 넘쳐나서 말로는 다 못하겠다 싶어서 편지를 시작했거든. 근데 너무 늘어지긴 했다 그지. 다음에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닌데 한꺼번에 너무 욕심을 낸 것 같기도 하다.
엄마 생각만 길게 말했는데, 우리 서인이! 엄마 말 좀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래. 그리고 서인이의 말도 듣고 싶어. 서인이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우리 또 얘기 좀 하자. 우리 딸, 아자!
2009년 가을 어느 날.
이렇게 귀한 선물, 서인이를 주신 하늘에 감사하는 박선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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