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권정생 선생님

아낌없이 주는 나무 / 권정생

야야선미 2006. 9. 12. 20:28

아낌없이 주는 나무 / 권정생

   한 소년이 사과나무 밑에서 놀고 있다. 그러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면 따먹고, 소년이 자라 청년이 되어 결혼을 한다. 청년은 사과나무 가지를 잘라서 신부와 함께 살 집을 짓는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청년은 장년이 되어 이번에는 아예 사과나무 둥치를 베어 배를 만들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세월이 또 흘러 소년은 늙은이가 된다. 이제 기력이 다해버린 소년은 여태까지 아낌없이 모든 것을 준 사과나무의 그루터기에 와서 조용히 앉아 쉰다.
   이상은 실버스타인의 그림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줄거리다. 많은 사람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이 이야기 속에 어떤 내용이 사람들을 그토록 감동시켰는지 나는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간다.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준 사과나무의 희생에 감동했다는 것은 알지만, 과연 그것이 소년을 위한 희생일까? 다른 이야기 하나를 보자.
   바닷가 오두막에 노부부가 살았다. 할아버지는 고기를 잡아다 할머니와 둘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데, 어느날 할아버지의 그물에 용왕의 딸이라고 하는 금고기가 잡힌다. 할아버지는 살려달라고 우는 금고기를 불쌍해서 놓아준다. 집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할머니께 들려주자 할머니는 "왜 그냥 살려줬나요. 깨진 물동이라도 새걸로 바꿔달래잖고." 이에 할아버지는 다시 바다에 나가 금고기에 부탁해서 새 물동이를 얻고, 다시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새 집을 얻고, 하인들과 온갖 살림살이, 금은보화를 얻는다.
   욕심많은 할머니는 그것도 모자라 나중엔 자신이 여왕이 되어 금고기까지 신하가 되라 한다. 할아버지가 그 말을 금고기에게 전하자 금고기는 아무 말 없이 물속으로 사라진다. 집에 돌아오니 으리으리하던 기와집도 하인들도 다 없어지고 원래의 오두막과 깨진 물동이와 함께 할머니가 초라하게 앉아 있었다.
  책은 읽고 나서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책 속에 무언가 찾아내어 내 것으로 간직하고 싶은 게 있을 것이다. 그게 당연한 것이며 그래야만 책이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책 속의 내용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너무 다르거나 거리가 멀면 읽고 난 다음 그리 개운치가 않다. 백 퍼센트 일치하지 않더라도 어느 한 부분은 실생활에서 느끼고 삶에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몇 해 전에 이곳 교회 언 집을 뜯고 새로 지었다. 훨씬 크고 넓어진 예배당엔 서른 개가 넘는 큼직큼직한 의자가 놓였다. 의자는 모두 두꺼운 원목으로 튼튼하게 짜 5, 6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긴 의자다. 이만한 의자를 만들려면 원래 나무의 크기는 대단했으리라는 걸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수입해온 나무라는데 그곳 숲에서 수백년간 자라온 나무는 이렇게 한국의 조그만 시골 교회까지 와서 의자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의자가 생기고부터 예배시간이면 불편하다 못해 불안하기까지 하다. 우리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어온다.
   옛날 초가집 추녀에는 제비가 집을 짓고 두꺼운 이엉 속에는 참새 둥지가 있었다. 제비와 참새는 사람 사는 집에 함께 얹혀서 산다. 사람들은 구태여 제비나 참새를 쫓아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대단한 적선을 하다고도 않는다. 제비와 참새는 각자가 만든 둥지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친다. 바로 그것이 소중한 것이다.
   농촌 아이들은 제비가 새끼를 쳐서 키우는 것을 보면서 자란다. 제비는 한 입 한 입 흙을 물어다 집을짓고 알을 낳고 여러 날 정성을 다해 그 알을 품어 새끼를 깐다. 그리고는 어미와 아비 제비는 번갈아 먹이를 물어 새끼들을 키운다. 여기서 농촌 아이들은 부모 역할이 어떤 것인지 일부러 가르치지 않아도자연스레 배운다. 참새나 제비는 절대 공짜로 사람 사는 집에 얹혀 사는 게 아닌 것이다. 목숨이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쳐 주고 아침 저녁 재잘대며 노래까지 불러준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사는 것,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초가집의 생태환경은 그대로 한 권의 생명 교과서다.
   이 세상엔 그 어떤 경우에도 한쪽에는 주기만 하고 한쪽에는 받기만 하는 것은 없다. 그런 일이 있어선 절대 안 된다. 자연은 그렇게 공생의 질서가 유지되어야만 모두가 살아남는다.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면 둘 다 끝장이 나버린다.   
   남미 안데스 산속에 사는 원주민 우와족은 벌써 15년간 하루하루 피를 말리며 싸우고 있다. 우와족 6천명이 살고 있는 마을 근처에 석유가 매장된 것을 알고 미국과 영국에서 개발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디언 우와족 사람들은 땅속에 묻힌 그 무엇도 파헤쳐서는 안된다고 싸우고 있다. 그들에게 땅속에 묻힌 모든 것은 대지의 어머니 핏줄인데 그걸 파내게 되면 그것으로 세상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석유 개발이 시작되면 6천명 우와족 인디언은 집단자살을 하겠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의 자연에대한 경외심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인디언들은 수만 년간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연과 더불어 모든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고 함께 살아왔다. 그런데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백인들은 불과 몇백 년만에 그 넓은 대륙을 황폐화시켜버렸다. 끝도 없이 파헤치고 긁어내고 학살해오지 않았던가. 울창한 숲과 그 속에 살아가는 동식물을 아예 씨를 말리고 있다.
   나는 한 가지 나대로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가 아닌 '아낌없이 주는 소년' 으로 바꾸어 본 것이다.
   한 그루 나무를 위해 한평생 보살피는 소년이 있었다. 그 나무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거름을 주고 가지를 치고 열심히 가꾸었지만 꽃도 안 피고 열매 하나 맺지 않았다. 나무는 소년에게 아무 보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소년은 오히려 병든 나무를 불쌍히 여겨 더욱 알뜰히 보살폈다. 소년은 늙어 더 이상 나무를 보살펴주지 못해 병든 나무를 쓰다듬으며 "미안하구나, 끝까지 돌봐주지 못해서…" 그러고 나서숨을 거둔다. 나무는 눈물을 흘리며 "아니야, 오히려 미안한 건 나였어. 정말 고마워" 하고 말하면서 조용히 소년을 따라 죽음을 맞는다.
   우리는 여태까지 자연에서 너무 많이 빼앗아왔다. 이제는 그 자연을 위해 우리가 희생할 차례가 아닌가. 바닷가 오두막 할머니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금고기는 할머니한테 줬던 새 물동이도, 기와집도, 금은보화도, 살림살이도, 하인도 다 거둬가버렸다. 할머니는 본래대로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원래의 깨진 물동이와 할아버지가 잡아오는 몇 마리의 물고기로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모두 지나치게 많이 가지려 하다가 몽땅 망하기 전에 지혜로운 금고기가 나타나서 원래의 오두막과 깨진 물동이만이라도 남겨줬으면 다행이라고 본다. 정말 몽땅 망하기 전에….

▷경북 안동의 깊숙한 시골에서 한 칸의 집을 짓고 청빈과 겸손의 삶을 사는 동화작가 권정생님. 5개월간 「작은이야기」의 첫 페이지에 진정한 가르침의 글을 보내주셨던 님께서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휴식에 들어가게 되었다. 뜨거운 한 여름이 지나면 다시 님의 향기를 맡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작은 이야기》 이레, 2001. 8 · www.smallstor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