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옛날 농촌에서는 집을 지을 때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일을 했다. 특히 지붕 마룻대에다 서까래를 걸치고 나면 알매를 치는데 이 일이 가장 힘이 든다. 수수깡이나 나무졸가리로 밑알매를 치고 그 위에 흙알매를 친다. 이럴 때면 동네 장정들이 다 모여 흙을 반죽하여 호박덩이리만큼 뭉쳐 지붕위에 올리는 일을 한다.
한쪽에는 밑알매를 치고 한쪽에서는 반죽한 흙으로 흙알매를 치는 일은 많은 사람들의 모듬손이 필요한 것이다. 혹시나 비가 내리면 알매친 것이 다 망가져버리니까 일을 느슨하게 시나브로 할 수도 없다. 흙알매를 치면 금방 마르기 전에 먼저 겨릅대로 엮은 이엉을 덮고 다음에 미둑새나 짚으로엮은 이엉을 덮는다. 이 일은 빠르면 한나절, 늦어도 하루에 다 해치워야 한다. 함께 하는 일, 그것 따뜻하게 살아갈 집을 짓는 일을 함께 한다는 것이야말로 평화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아무도 혼자서는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할 수는 없다. 일을 함께 할 때는 외롭지 않다. 오히려 즐겁고 절로 흥겨워진다. 사람이 외로운 것은 함께 일하지 못하고 혼자 외따로 처질 때이다.
흔히 잘사는 사람이 거액의 돈으로 자선을 베풀어 빈민을 구제하면 세상이 밝아지고 함께 평화를이룰 것 같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 정당한 부자는 없기 때문이다. 백명 중의 아흔 아홉은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은 것이다. 그 중에는 한두사람의 정직한 부자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부자는 빈민을 구제할 만큼 거액의 돈은 못 가졌다. 결국 이웃돕기는 같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아껴쓰며 나누는 길뿐이다.
평화를 만드는 길은 어느 한두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도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했다. 다만 예수는 평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만 가르쳐주고 죽었을 뿐이다. 이 방법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바로 성인(聖人)이라고 일컫고 싶다.
흔히 말하기를 따뜻한 봄날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넓은 풀밭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떼를 바라보면 그것이 평화로운 전원의 풍경으로 안다. 목동의 피리소리, 공중에서 노래하는 새소리, 따뜻한 햇빛과 보드라운 바람결, 이 정도면 평화로운 세상이라 일컬어도 틀린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잘 살펴보면 우리들의 꿈같은 평화는 산산히 깨어져버린다.양떼들은 거기 널려있는 풀밭을 무자비하게 갉아 먹어치우고 있다. 풀밭 사이에 간간이 피어있는 예쁜 꽃도 갓 돋아나려는 어리디 어린 새순도 사정없이 잘라 버린다.
결국 우리는 평화라는 환상을 어떻게든 현실에서 이루어 보려 하지만 안된다.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한 이후 결코 한번도 평화는 없었다.
인도의 가비라성 싯다르타 태자도 아름다운 궁정 앞에서 모든 영화를 누렸지만 죽음이란 절망 앞에서는 어쩌지 못했다. 일곱 살 때 들판에 나갔다가 벌레 한 마리가 새에게 잡혀먹히는 것을 보고 나서 인생에 대한 덧없음을 느끼게 된다. 싯다르타 태자는 스물아홉살 때 궁전을 나와 고행의 길에 나서서 참된 평안을 얻고자 수도를 하지만 지쳐 쓰러진다. 오랜 금식 끝에 기운을 잃게 되었을 때 시골 처녀 수자타에게 우유죽을 얻어먹고 기운을 차린다. 결국 어떤 방법으로도 평화를 얻지는 못했다.
일제 36년과 6·25를 겪은 우리 겨레는 가장 큰 소원이 전쟁없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는 평화통일이다.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남북이 하나가 되어 산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다. 어쩔 수없이 우리는 일하며 고달프게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니 되도록 닥치는 불행을 줄여가는 데 노력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성인의 삶의 방식이 있다.
들판에 자라는 보리는 봄보리와 가을보리가 있는데 가을보리를 봄에 심으면 절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가을에 심어 혹독한 눈보라를 견디며 자라야 이듬해 든든한 보리로 자라나서 알찬 열매를 맺는 것이 가을보리의 타고난 운명이다. 가을보리에겐 고통을 제외한 온실 같은 평화는 오히려 절망이며 죽음인 것이다.
골목길 막다른 곳에 살고 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평생을 말다툼 한번 하지 않고 살았다.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자 할아버지는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밤마다 혼자 잠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먼저 죽은 할머니를 부르며 외로워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죽은지 1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죽은 할머니한테 간 것이다.
두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열아홉 동갑시절 혼인을 하여 50년을 살았다. 아들 딸 낳고, 그 자식들이 징용에도 가고 군대도 가고,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먼저 저승으로 간 자식도 있었다. 긴긴세월 그래도 견디며 살아온 건 따뜻한 부부애였다. 함께 눈물 흘리며 함께 힘든 짐을 나눠져준 한쌍의 수레바퀴였다.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자 할아버지는 바퀴 하나로 수레를 굴릴 힘이 없었다. 서있는 수레는 함께 험난한 길을 굴러가는 수레보다 빨리 망가진다. 평화보다 더 소중한 건 이웃사랑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곳곳에 강대국 군대와 무기가 주둔하고 있다. 이른바 평화유지군이란 명목으로 우리나라의 휴전선에도 당당하게 그 외국군대가 진을 치고 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와 군대가 필요한 세상, 이것이 과연 진정한 평화로운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총칼로 위협하면서 노예처럼끌려다니며 말없이 조용히 산다고 평화로운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외국군대가 지켜주는 국방이 진정한 우리 국방이 되는 걸까?
어느 봄날, 나무꾼이 산에 갔더니 간밤에 산불이 나서 새카맣게 타버린 골짜기에 까투리 한 마리가 불에 탄 채 앉아서 죽어 있었다. 나무꾼이 까투리의 애처로운 죽음을 보고 곁에 가서 지게작대기로 건드려봤더니 놀랍게도 죽은 까투리 품속에서 새끼들이 뿔뿔이 나와 흩어졌다. 불에 타죽으면서까지 까투리는 새끼들을 불길 속에서 제 몸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 왕에게 두 여인이 아기 하나를 갖다놓고 서로 자기 아기라고 우겼다. 왕은 누구 아기인지 가려낼 수 없어 한가지 지혜를 짜내어 아기를 둘로 쪼개어 나눠주라고 했다. 그러자 가짜 어머니는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친어머니는 자식을 잃어도 좋으니 제발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한다. 결국 아기는 친어머니 품으로 돌아갔고 가짜 어머니는 벌을 받았다. 어떤 사랑도 상대를 위하여서는 목숨까지 내어놓는 것이 화평으로 이어준다. 그러나 정복자는 총칼로 상대방을 죽이고 다른 이득을 얻는다. 평화는 고요히 소리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나누고 힘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고로운 세상이다.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 동안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평화롭지 못했다. 아기 베개에다 좁쌀을 넣는 것은 난리가 나서 급할 때 가지고 가는 임시식량이라고 했다.
요사이는 모든 것이 싸워 이겨야 하는 세상이다. 입시경쟁, 취업경쟁, 수출경쟁에다 범죄와의 전쟁까지 벌여놓고 있다. 우리 마을 앞 여기저기에 '골프장건설 결사반대' 라는 현수막이 걸린 지도 반년이 넘었다. 재벌과 농민들의 싸움은 또다른 전쟁이 된 것이다.
그저께 시내에 갔다가 버스 안에서 우연히 혜영이를 만났다. 어머니를 따라 고향을 떠난 지 7년이되었고 지금 중학교 1학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혜영이가 7살 때 헤어졌는데도 잊지 않고 금방 나를 알아봐주었다. 하얀 얼굴에 두 볼이 붉고 눈이 초롱초롱한 혜영이 얼굴은 그대로여서 나도 금방 알아보았지만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혜영이는 자기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더니 머리글자 하나만 가르쳐주겠다면서 "혜" 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가까스로 혜영이 이름을 기억해낸 것이다.
혜영이는 혼자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일이 할머니 생신이어서 큰댁 가는 길이고, 오늘 학교에서 글짓기 시간이 있었는데 제목을 '우리집' 이라 해놓고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혜영이는 고개를 숙였다. 혜영이는 3살 때 죽은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참 뒤에 혜영이는 다시 명랑해지면서 시골 할머니께 자주 가서 어깨도 주물러드리고 싶은데 공부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 한시간만 놀아도 금방 뒤처져버린다고 한다. 여태까지 아무리 열심히 해도 1등은 한번도 못해 보고 계속 2, 3등밖에 못했단다. 방학 때 오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방학 때는 더 시간이 없다고 한다. 하루종일 독서실에 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 했다.
결국 혜영이는 이렇게 사이좋게 놀아야 할 한반 친구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하지만 앞으로 평생을 두고 혜영이는 같은 또래와 싸워야 할 것이다. 산다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고 거듭거듭 말해야 하는 것이 서글프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평화란 역설인지 모르지만 죽음이며 파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싸움이란 삶이 끝났을 때라야 우리는 제대로 안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불도 켜지 않고 걷지도 않고 마음대로 지껄이지도 않는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편히 쉬는 날이다. 그렇다면 시간도 흐르지 말고 돌아가던 지구도 멈춰 있어야 하는데 삼라만상은 여전히 쉬지 않고 움직인다. 해가 움직이고 지구가 움직이고 달과 별이 모두 움직인다. 사람이 걷지도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숨조차 쉬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참으로 어렵고 힘드는 것이 세상이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어야 되고 해와 달과 별이 돌지 않으면 모든 것이 정지되어버린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죽은 것이다. 안식일의 참뜻은 과연 무엇인가?
이 지구상엔 온갖 종교와 철학과 미신들이 널려있어도 그 아무것도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평화는커녕 오히려 종파간에 적대시하는 싸움이 있을 뿐이다. 수만권의 경전을 쌓아놓아도 우리는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해나가는 골치덩어리 인간이다. 밤새도록 기도를 하고 나와도 시장에 나가 악을 써대야만 살 수 있고, 아무리 고급 화장비누로 몸을 씻어도 뱃속에는 똥을 담고 있어야 한다.
스님도 신부님도 목사님도 뱃속에 뭣이든 집어넣은 다음에야 거룩한 설교를 하고 강론을 하고 설법을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 태어난 아기도 엄마젖을 빨다가 신통치 않으면 젖꼭지를 깨물기도 하고 악을 쓰고 운다.
성서에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 했다(마태 5, 9). 여기 나오는 평화의 개념은 어떤 것인지, 억눌린 사람의 해방,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 대한 자기몫 찾아주기, 정의가 살아나고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적 질서를 뜻한다면 분명히 정치권력과 대결이 불가피한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참여와 투쟁으로 맞설 때 일어나는 또 하나의 싸움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써 앙갚음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비폭력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화염병과 최루탄, 돌멩이와 곤봉으로 맞서는 대신 어떤 방법이 또 있는 것일까? 권력은 철저하게 총칼과 군대로 무장을 하고 있는데, 맨손의 백성은 무엇으로 우리의 권리와 빵을 찾는단 말인가? 노예처럼 숨죽이며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삶이 진정 평화인가?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이 세상 폭력에 대항하는 비장한 운명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먹이는 의식을 포도주와 빵으로 대체해놓았다. 포도주와 빵은 살이라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가장 단순한 체험적 가르침인데도 제자들은 아무것도 이해못했다. 빵과 목숨은 하나인데 다른 두 개의 개념으로 생각할 때, 이 세상의 평화는 요원할 것이다. 반대로 한덩어리의 빵을 곧 나의 살이며 나의 목숨이며, 내 이웃의 목숨으로 깨달을 때 온 세계는 적이 없어질 것이다. 적을 죽이는 것은 곧 나를 죽이는 것이며 빵을 버리는 것은 내 목숨을 포기하는 행위가 된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피가 되고 내 피가 내 이웃의 피가 되고 그래서 인류는 한목숨 한핏줄로 이어진 것을 알 때만이 평화는 가능해질 것이다. 어느 한사람, 그 어떤 위대한 몇사람의 힘으로도 평화를 만들지는 못한다. 다만 인류가 함께 하느님의 형상대로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 따뜻하게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 이처럼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사는 이들이 이 시대의 성인들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199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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