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권정생 선생님

사람다운 사람으로 / 권정생

야야선미 2010. 8. 24. 21:07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민을 하며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내어 보았지만 아직도 정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죄악이 가득찬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기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겠습니까?
   온 세상이 환경오염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생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라진다면 환경은 더 이상 손상받지 않고 죽어가던 자연은 자시 회복될 것입니다.
   죄를 저지르는 것은 인간들이며 그 인간들이 바로 악마입니다. 인간이 자연속에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았을 땐 인간에게도 악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소수의 인간이지만 그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초가집을 헐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갈고 그 다음엔 벽돌양옥집으로 바꿔가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전이라 했던 모든 문명이야말로 파괴의 원인이며 인류의 멸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인간이 문명의 혜택으로 편리와 행복을 누리고 있을 때 수많은 동식물이 고통스럽게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선진산업국이 부를 누리기 위해서는 약소국가와 약소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 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걸프전쟁으로 지금 쿠르드민족들의 수난이 시작되었고, 그곳 바다에 살고 있던 물고기와 새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정의로운 전쟁이란 절대 없습니다. 하나의 힘이 작은 약자를 집어삼키는 악마가 바로 전쟁인 것입니다. 자연계의 먹이사슬에서 절대강자는 없습니다. 내가 하나 잡아 먹으면 대신 하나를 희생하는 것이 자연입니다.
   인간들이 이 자연을 이탈하여 마구잡이로 집어삼키며 지상의 왕자로 군림하면서 우리는 결국 우주의 악마가 된 것입니다. 이 정도에서 우리가 다시 제자리로 찾아들지 않으면 지구의 종말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분들은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시골에서는 자연이 얼마나 망가져가고 있는지 잘 압니다. 무척 오래전부터 여름에 소낙비가 없어지고 무지개가 없어졌습니다. 해질녘에 보이던 붉은 노을도 없어지고 기후변화가 순조롭지가 않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안동지방은 댐을 두 군데 막는 바람에 안개가 끼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무척 추워졌습니다.
   초가지붕을 뜯고 나니 참새가 없어지고, 지붕 속에 살던 능구렁이와 족제비가 없어지고, 그러다보니 쥐가 많아져서 쥐약을 살포해서 고양이가 죽고 다른 가축들이 죽었습니다. 자연은 어느 한 군데가 망가지면 연쇄반응을 일으킵니다. 화학비료를 사용하다보니 땅이 죽고 땅이 죽으니 그 속에 살던 곤충이 죽어 상대적으로 해충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농약을 살포하니 그것이 개울로 흘러들어 많은 물고기가 죽어버렸습니다. 물고기가 죽으니 새들이 죽고 새들이 죽으니 산의 나무들이 또 병이 들고…….
   이렇게 세상이 뒤죽박죽이 되다보니 이젠 착하게 살아서는 안되고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절대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육은 힘을 가르치고 힘만이 최상의 평가기준이 되었습니다. 착하게 살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은 선악의분별을 모르는 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일들을 해야만 돈과 권력을 잡고 행복해진다는 논리는 이 사회 구석구석마다 스며들었습니다. 종교도 그렇게 타락을 했고 정치도 모든 게 장사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농민도 상인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씨앗 하나 심어 열매를 얻는 바람보다 먼저 돈계산부터 하는 것이 요즘 농민들의 비참한 처지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나만이 잘살자는 이기심은 극을 치닫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돌려줘야 하는 것이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평등의 원칙이며 그게 평화로 이어지는 자연의 질서입니다. 구태여 돈을 잔뜩 벌어 남을 구제한다는 믿음보다 내가 좀더 가난하게 덜 차지하기만 해도 그게 바로 이웃을 위하는 일인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이런 물질의 평등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함께 있는 사회구조로서는 절대 민주주의가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부자는 그 부를 지키기 위해 권력과 결탁을 할 테고 가난한 사람은 굶어죽을 수없으니 자연히 권력에 맞서 싸워야 하니까요. 가난한 사람들의 목숨도 목숨입니다. 살기 위하여서는 누군들 자기 몫을 찾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자연과 더불어 필요한 만큼 하루하루 성스럽도록 착하게 살았던 인디언들은 무자비한 백인들의 총칼에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습니다. 인디언들은 국경도 없고 땅을 사고 파는 그런 유치한 욕심도 없는 짐승처럼 착한, 이 땅위에서의 마지막 아담과 이브였습니다.
   지난번 어느 대학에서는 승용차를 탄 대학생과 교수님이 서로 싸움이 붙어 치고 박고 하다가 경찰에 소고까지 했던 모양입니다. 군사부(君師父)일체라는 말도 좋은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나는 교육은 가르치기보다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머리로만 가르치고 머리로만 배우는 교육은 돈받고 돈주고 맞바꾸는 물건이지 교육은 아닙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가 하는 일은 똑같이 아랫사람을다스리고, 아랫사람은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는 부자연스런 권위라는 배경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단 두분 잊혀지지 않는 어른이 계셨습니다. 두분 모두 세상을 떠나셨는데, 살아계실 때 그분들이 아랫사람을 대하던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먼저 길가에서 인사를 드리면 꼭 걸음을 멈추고 서서 마주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를 받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나보다 나이 30살 이상씩 더 높았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기만 하고 받기만 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닙니다. 스승다운 스승 밑에는 반드시 제자다운 제자가 있습니다. 보는 대로 따라하는 것이 어린이입니다.
   지금 그 어느 곳에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도덕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가는 곳마다 닿는 곳마다 살벌한 폭력만이 널려있습니다. 어린이날을 제정한지 60년이 지났지만 진정한 어린이날은 없었습니다. 몇몇 선택받은 아이들을 내세워 야단스런 잔치로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어린이날이었습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푸른 하늘 푸른 냇물 푸른 들판은 이젠 아무데도 없습니다. 나라는 반으로 동강나 있고 우리들의 목숨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서운 핵무기가 널려있고 전쟁의 위협은 우리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집이 없는 아이들이 방안에 갇혀 질식해 죽고 시험공부 때문에 자살해 죽어야 하는 가엾은 목숨이 어린이들입니다. 촌지를 받고 그 돈 만큼 제자를 사랑하는 선생님, 뇌물을 받아 수준미달의 학생을 합격시키는 교수님, 독재정치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교장선생님들, 이 땅의 스승과 어른들이 과연 존경받을 일을 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입니다.
   어른들의 권력다툼에 어린이들의 정신과 육체가 망가졌는데도 아무도 간섭도 비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이데올로기는 교육이데올로기, 종교이데올로기까지로 둔갑해갔고, 반공교육은 동족까지 원수가 되도록 길들였습니다.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가르치고 읽히고 따르게 한 것이 이 땅의 교육이며 아동문학이었습니다. 일찍 일어나고, 공부 잘하고, 부모님 말씀 잘듣고, 반공정신이 투철하고, 새마을운동에 앞장서고, 이웃돕기 성금을 내고, 이런 규격화된 모범어린이가 등장하는 동화만이 아동문학이었습니다.
   일제 36년의 어두웠던 시대, 6·25의 비극과4·19, 5·16, 그리고 광주사태, 끊임없이 이어져오는 민주화운동과 반민주독재가 맞닥뜨려져 혼란이 가시지 않는 지금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통일된 조국을 갖고 싶습니다. 자유로운 생각,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일등하는 아이보다 건강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목숨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어린이날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목숨이 있는 것은 만들어진 인형과는 다릅니다. 인형은 조종사에 의해 움직이지만 목숨있는 인간이나 동물은 스스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199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