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야, 잘 지내고 있겠지? 한동안 연락이 뜸해서 걱정했어. 중국에서고 필리핀에서고 지구촌 여기저기 사고가 좀 많아야지.
서인이는 요새 미처 따지 못한 봉사활동 점수 3점 때문에 바빠. 겨울방학까지 느긋하게 하면 걱정이 없는데 올해는 3학년이라 시월 중순까지는 10점을 다 채워야 한대. 지가 가고 싶어 하는 대안학교 원서를 그때부터 쓰기 시작하거든.
지난해에는 무슨무슨 의료재단에 가서 봉사활동 신청해서 잘 했거든. 홀로 계신 어르신들을 찾아가 말동무도 하고 방청소나 목욕하시는 것도 좀 거들고 도시락도 가져다 드리고. 그런데 올해는 그 의료재단에서 다른 곳에다 위탁을 했기 때문에 어린 저거들이 할 일이 없다는 거야. 올해는 어디 가서 어떻게 하나 고민만 하다가 방학을 거의 다 보냈어.
개학이 다가오니까 마음이 급해져서 시청, 구청 누리집을 온 데 헤집고 다녀. 봉사활동할 거리가 어데 없나 하고. 그거 하느라 하룻저녁을 다 보내더라고. “그냥 내일 날 밝으면 찾아가 보지?” 했더니 누리집 가입하고 신청해야 인증을 해준다나?
다음날, “와우! 이런 거 있는 줄을 몰랐네.” 무슨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낯빛이 확 살아나. 선플 운동이라고, 지가 아는 사람들에게 선플 스무 개를 보내면 봉사활동 점수 1점을 준다는 거야. 7점은 이미 채웠으니 3점만 하면 된다고 펄펄 나는 거야.
“그게 무슨 봉사활동이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서 하는 거이....”
“뭐어 어때, 좋은 일이니까 주겠지 뭐.”
그러더니 깊이 생각도 않고 동무들 휴대폰 번호를 찍고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려. 도대체 어떤 선플을 보낸다는 것인지. 옆에서 슬그머니 구경을 했지^^
“의정아, 함께 도서부하면서 참 좋았어. 앞으로도 우리 마음을 나누는 좋은 친구가 되자^^”
“이슬아, 방학 알차게 보내고 있지? 늘 열심히 노력하는 네게 응원을 보낸다.”
“현정아, 지난번에 아픈 거는 나았니? 어서 나아서 밝고 씩씩한 네 모습 보고 싶다.”
문자를 하나씩 보내다가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그란다.
“그런데 엄마, 안하다가 이런 거 할라니까 진짜 오글거리네요.”
“뭐가?”
“손가락이 오글오글 흐흐”
조금 있으니 지 동무들한테서 답장이 오기 시작해.
“와? 무슨 일 있나?”
“아 뭔데”
“니이 전학가나?”
“뭐 잘못 먹었나 ㅋㅋ”
“흐흐 니도?”
“그래, 나도 서인이 니를 알게 돼서 행복해. 우리 서로 힘주는 친구 되자.”
흐음, 아마 이 녀석은 선플 운동을 아는 것 같고.
다른 애들은 거의 “뭐 잘못 먹었나?” “니이 열나나?” 그런 것들이야.
서인이하고 한참 웃었지.
“아아, 서인이아! 니는 도대체 너거 동무들한테 어떤 아이고?”
“그러게요. 내가 요렇게 살았는갑지 뭐.”
“근데 엄마 한 번씩 좋은 말 하고 사는 것도 괜찮겠는데요. 온몸이 좀 오글거리는 거 같아도요.”
“그래?”
“점마들도 진지한 말을 안 들어보니까 내 말에 적응이 안 되는 가 봐요...”
“그러게. 보통 때 좀 잘하고 살지.”
“에이, 다 그런데요 뭐.”
“며칠 있다가 또 스무 통 날려야지 히히.”
멋쩍은 듯 웃는 서인이를 보면서 떨떠름하던 내 맘이 조금 풀렸어. 땀 흘려 일하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 자판 타닥타닥 두드려서 봉사활동 점수를 얻는다는 것이 좀 마뜩찮았는데, 의외로 얻은 것도 있다 싶어. 요즘 아이들이 언제 제 마음을 담아 문자 한 번 보내겠나 싶기도 하고. 동무들하고 주고받는 마음이랑 말투도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도 되겠고. 비록 봉사활동 점수를 얻으려고 시작한 거지만 스무 명, 마흔 명 이렇게 제 마음을 한번이라도 주고받으면서 잔잔한 물결처럼 번져나가면 더 좋고. 컴퓨터실 가면 우리 반 아이들하고도 한 번 해볼까 싶다.
그럼 이만. 무더운 날씨, 뒤숭숭한 지구촌, 걱정하려 들면 끝이 없다만 그래도 기운내고 살자. 참, 아주 짧아도 좋으니 연락 좀 자주 해라. 메일을 한참 안 읽었다고 나오면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걱정스럽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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