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선생 교실 엿보기 (동시마중 창간호에서)
새 눈
눈길을 걸어 학교에 간다. 온통 하얗다. 다음번 끼니를 기약할 수 없는 새들은 목청 높여 비탈로 나무로 자유롭다. 고속도로 찻길 잇는다고 끊어낸 자락도, 양수발전 송전탑 지날 자리마다 앓고 있는 산도 모조리 푹푹 덮었다. 묻어 감춘 자리는 아름답고 편하게 보인다. 하얗게 푹 덮어서 겉꾸미고 있다. 눈부신 평화다.
속지 말자. 친절을 약속하는 것으로, 두근거림만으로 지난날을 덮을 수 있는 것 아니다. 작년에 만났던 한 아이는 끝내 자기 열등감을 털지 못하고 졸업식장에 섰지. 중학교 가면 우리 아이가 좀 나아질까요 묻는 아이네 엄마 곁에서 졸업식 내내 얼마나 죄스러웠던가. 한 아이가 훨훨 날지 못하는 한 아무리 새 눈이 내려 덮여도 새 세상 아니다. 되풀이 말아야지. 도무지 어찌할 줄 모르는 아이가 있다면 나도 도무지 어찌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고 말겠다. 그 아이 손을 꼭 잡고 가겠다. 앞에서 잡아끌지 않겠다. 차라리 그 손에 끌려가고 말겠다.
새로 맡은 5학년 교실로 들어갔다. 내가 지들 담임 되었다고 얼굴 찌푸리는 아이는 아직 안 보인다. 몇 아이는 웃어주기까지 한다. 고맙고 부끄럽다. 올해 뭘 해보자고, 그럴 듯한 계획 말할 용기가 안 난다. 아이들 얼굴 하염없이 보고 있는 지금이 좋다.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빨리 공부하자고 재촉한다.
“처음 만났을 땐 뭘 하는 거야?”
장승리에 사는 남자아이는 체육해요 체육해요, 여섯 번 같은 말 되풀이 한다. 밖에 나갈 거라고, 좀 기다려달라고 달랬다. 학교 앞에 사는 여자아이가
“아, 아무거나 빨리 해요. 좀 무섭게 해요. 딱딱 끊어서.”
그래, 뭔 말이라도 해보자.
“나는 공부를 잘 못 가르치니까 니네가 나한테 가르쳐야 해. 내일부터 니네는 가르치러 학교에 와.”
"그럼 수학 같은 어려운 건 어떻게 해요?"
어려운 건 같이 공부해서 서로 가르쳐주자고 했다.
“니네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나도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네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한 것이 우리 공부의 시작, 이 교실의 시작, 이 세상의 시작.”
여자아이가 공부는 안 할 거냐고 묻는다. 받아쓰기를 하자고 했다.
“받아쓰기? 헐!”
하면서도 연필을 꺼낸다.
“아침에 학교에 오면서 본 것 들은 것 있으면 말해 봐. 문제 부른 사람이 검사하기.”
여자아이가 손들었다.
“아침에 오는데 새가 나무에 앉아있어요.”
“어디에 있는 새?”
“면사무소 앞에 있는 나문데, 모과나무요.”
“어떻게 생겼어?”
“갈색이랑 꺼먼색이랑 하얀색이 섞인 새에요. 선생님 잠바 어깨에 있는 색이랑 비슷해요.”
그렇다면 직박구리다. 오늘 아침 무리지어 쏘다니며 떠드는 것 나도 봤다.
내가 직박구리 생김새를 설명하자 어떻게 알았냐고, 바로 그 새라며 나를 칭찬한다.
“그 새가 뭘 하고 있었어?”
“둘이 앉아서 눈을 걷어내고 있어요.”
말을 더 줄여서 받아쓰기 문제를 불러주게 했다. 아이가 불렀다.
“모과나무에 직박구리 두 마리 눈을 막 걷어내고 있다.”
아이들은 여자아이가 불러준 말을 공책에 받아 적었다. 나도 적었다.
‘모과나무에 직박구리 두 마리, 눈을 막 걷어내고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안경 쓴 작은 남자아이가 불렀고, 우리는 받아 적었다.
‘밭에 주황색 깃털 새가 목이 날아갔다. 몸이 딱딱했다.’
문제를 부른 두 아이가 일어서서 다른 사람이 받아쓰기 잘 했는지 확인을 했고, 나는 두 문제 다 동그라미를 받아서 100점이다.
체육하자고 여섯 번 말한 남자아이가 자기도 하겠다고 문제를 불렀다.
“오늘 아침에 시내버스를 봤다.”
이미 머릿속에 있는 건 본 게 아니다. 눈에 찍힌 버스 발자국이라도, 눈 밟으며 바퀴 구르는 소리라도, 운전사 아저씨 얼굴 표정이라도 보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잘 말하지 못 해 실망한 네가 오늘 우리들 중에서 하느님이다.
저절로 본 것 말고 거기서 멈춘 것 말고 더 들어간 것. 뜻을 담아 마음을 담아, 눈까풀을 열어서 본 것, 귀를 기울여 들은 것.
“보려고 하면 개미 눈에 고이는 눈물이 보인다. 개 이빨 사이에 낀 고춧가루가 보인다.
들으려 하면 거미 눈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눈 녹는 소리가 들린다.”
네가 본 것, 들은 것, 말한 것이 우리 공부의 시작, 이 교실의 시작, 이 세상의 시작.
‘들으려 하면 들린다.’
연극놀이를 했다. 둘씩 짝을 지어 눈 가린 뒤 소리 신호를 내어서 자기 짝을 찾는 놀이다. 아이들이 마구 소리를 질러 교실에 온갖 소리들이 섞였지만 들으려고 하는 소리만 들리는 것, 아이들은 순식간에 자기 짝을 찾아냈다. 물건을 두드려서 짝을 찾고, 촉감으로 짝을 찾았다.
‘보려고 하면 보인다.’
칠판에 ‘새 눈’이라 적었다. 어떤 눈일까.
예진 : 솔방울 사이로 꾀꼬리새 눈이 보였다.
준규 : 오늘 새 눈이 내려서 길을 걷고 있는데 눈이 환하게 부셔서 눈을 찡그렸다.
재성 : 눈이 왔는데 또 새로 눈이 내려서 고속도로가 막혔다.
희연 : 나무에 돋는 눈.
예진이가 갑자기 두 눈알을 안 쪽으로 당겨서 사팔뜨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 그건 새 방법으로 보는 눈. 새 눈 맞네.
말한 것 모두 맞네. 말하지 않은 것 중에 한 가지, 사물을 새롭게 보는 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새롭게 보는 눈’
이 안이 쓴 ‘모과’라는 동시를 읽었다.
모두들 못생겼다고 하지만
모과는 얼굴이 아니고
주먹이다
돌덩이만큼 단단한
주먹이다
시를 읽고 나면 모과를 보는 새로운 눈이 하나 생기는 것이다. 이제부터 모과는 주먹이 되었다.
모과는 단단한 것, 단단하기 때문에 세상에 향기를 내는 어떤 것이다.
김환영이 쓴 ‘감 한 쪽’을 읽었다.
겨울비 오고 어두운데
까마귀 한 마리
입에 불을 달고 날아간다
찬비를 맞으며
감 한 쪽 물고 가는
어미 까마귀 부리 끝이
숯불처럼 뜨겁다
재성 : 새빨간 홍시, 빨가니까 불을 물고 간다고 했다.
예진 : 자기 안 먹고 새끼 주려는 마음이 뜨거워서 감이 뜨겁다.
준규 : 새끼들 주니까 찬 겨울이 따뜻한 겨울.
희연 : 무거운 감 물고 가는 마음이 아이들 먹이니까 힘들어도 좋다.
성래 : 까치도 감 물고 가는 거 봤다.
시인과 시를 읽은 아이들은 겨울 감홍시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감나무에 겨울까지 달려있는 감홍시는 그냥 쭈글쭈글 감홍시가 아니다. 불이다. 어미의 뜨거운 사랑이다.
역사의 현장을 가보기로 했다. 목 잘린 새를 보았다는 밭에 갔다.
남자아이가 바로 요기라고, 조기서 동생이랑 놀고 있는데 갑자기 강아지가 킁킁거려서 따라가 보니 요기에 새가 죽어있더라고, 피가 안 말랐더라고, 목이 없더라고, 죽어있는 걸 저 큰 개가 갑자기 와서 두 손으로 휙 가져가서 뜯어먹었다고, 개가 먹는 걸 뺏어서 엄마가 버렸다고 한다.
직박구리 두 마리가 눈 털어내며 앉아있었다는 모과나무한테도 가 보았다. 여자아이가 새 앉았던 자리를 손으로 쓰다듬는다.
새는 이미 떠나갔지만 새가 앉았던 자리와 새를 본 눈과 새를 보았다는 말은 여전히 남아서 한 아이와 우리들을 키우고 있다.
보려고 하면 보인다. 들으려 하면 들린다. 움튼 것은 자란다. 오늘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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