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꾸는 글쓰기

탈퇴는 참 쉽다

야야선미 2004. 4. 26. 13:10

지난해 노광훈네서 사온 통밀 가루
한 해 동안 참 잘 먹었다.

당근즙 넣어 반죽하고
시금치즙 넣고 칼국수 해먹으면서
"이거 노광훈이 농사 지은 거다."

생선포 떠놓고
밀가루 옷 입혀 기름에 자글자글 부치면서
"정남이는 잘 있는강?"

감자 썰어 넣고 
수제비 끓여 먹으면서
감자를 더 골라 먹는 아이들한테
"이거 시커매도 무너미 꺼다. 이기 진짜배기 우리밀이다."

무너미표 밀가루,
봉지를 열면서 노광훈네 집 떠올리고
봉지 닫아 냉장고에 넣으면서
무너미 생각나게 하던
그 노광훈네 밀가루를
고마 다 먹고 말았다.

밀가루 봉지를 탈탈 털어
묵은 김치를 썰어 지짐을 부치면서
내내
가슴 어디 한 구석이 텅 비어온다.

잘 있는강?
아아들은 안 아푸고 잘 있겠지?
인자 이 집 밀가루 우예 사 먹지?
정남이는 인자 속이 덜 상하는강?
새로 시작한 흙살림인지 그 일은 재미있는강?

그라다가 고마
'아이, 씨바.'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욕이 치민다.

설겆이를 하고
인천카페엘 들어갔다.

"샛길" 어깨에는
여전히 빨간색 new가 붙어있는데
대문은 닫힌 채 깜깜하다.

'아이, 씨바.'
또 그냥 울컥 치민다.

밀가루 잘 먹었다
올해 밀농사는 어떠냐
잘 있느냐, 보고 싶다
안부나 전해 줘,
그런 맘은 갑자기 어데를 갔는지

금방 다시 들어가
"탈퇴"를 누지르고
내친 김에 속초방에도 "탈퇴"를 누질렀다.

탈퇴는 참 쉽다.

오늘도 우리 카페에는
빨간색 new가 떴다.

이상석 선생님이 모셔다 놓은
'살고 싶다'를 본다.
먹먹한 가슴

그런데.
내가 가입한 카페 목록에
맨날 맨날 떠 있던
인천글쓰기회가 없다.
속초글쓰기회도 없다.

차가운 바람이 인다.
아니
울컥 속울음이 치민다.

참 멀고멀던 중부고속도로가 휑하니 나타난다.
참 친절한 기사 아저씨 황금성,
휴게소에서 한잔씩 마시던 커피
후후 불면서 먹던 호떡
휴게소 풀밭에서 나눠먹던 김밥
창밖으로 지나가던 안흥 찐빵, 농다리, 음성꽃동네,
버즘나무 주욱 늘어섰던 한적한 길
은주가 그려 놓았던 '무너미여지도'
'야야, 오늘밤에 우리 둘이 저어 가자.'
이상석 선생님이 큭큭 웃으며 가리키던 러브호텔

이 장면에서,
이렇게 가슴이 녹아내리는 지금
왜 그것들이 한꺼번에 다 밀려오는지

인자, 그런 거는 없다.

그래, 없다.

들릴락말락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얘기해 주시던
우리 이오덕 선생님도 없고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숨소리마저 죽이던 글쓰기회, 그 사람들도 없다.
푹푹 빠지는 눈 속에서 하룻밤을 더 새던 그 사람들도 없고,
눈길을 헤치고 즐거이 보급투쟁하던 그 이들도 없다.

보리문둥이 모둠 깃발을 앞세우고
꾕과리 치면서 한마당 놀던 부여의 한여름밤도,
웃통 벗어 제치고 춤을 추어대던 송정의 바닷가도
양귀비 혓바닥 보다 맛있던 사잇골의 가리비 구이도
의정부,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팔장 끼고 걸어주던 김명길 선생님도
이젠 모두 전설이다.

몇 달이 지나도 털고 나올 생각을 않는 꽉 틀어막은 "굴"을
애닯아하지나 말든가
얄밉게 떠오르는 "샛길"의 new를
그리워나 말든가

빠지는데 일초도 안 걸리는
탈퇴를 해 놓고

인천글쓰기회가 안 보인다고
속초글쓰기회가 안보인다고


나는 이렇게 오래도록
서러워하는지.
그리워하는지.

아, 시바. (2004. 4. 26. 부산글쓰기회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