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나는 술이 좋다 (둘, 엄마가 내린 소주)

야야선미 2004. 11. 17. 11:30

나는 술이 좋다 (둘, 엄마가 내린 소주)

"이기 와 이렇노?"
행주를 들고 광에 들어간 엄마가 외마디 소리를 질러.
 '쥐란 놈이 또 뭔 짓을 저질러 놓았나?' 싶은데
"이기 이래 벌씨로 넘을 때가 아인데……."
껌껌한 광에서 독아지를 붙잡고 애닯아 하는 소리가 온 마당에 퍼져나와서 우리도 눈이 둥그레졌지.
"와아, 맛이 변했나?"
장독을 닦고 있던 고모도 놀라서 달려가고. 마당에서 땅따먹기를 하던 우리도  땅갑지를 던지고 어둑한 광으로 들어갔어.
엄마는 여전히 깊은 독을 들여다보면서 애를 태우고 있네.
"갱물이 넘었던강?"
"묵던 거를 도로 부었던강?"
고모까지 들여다보고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해.
"이래 마이 남았는데 이거를 우야노?"
보리타작 할 때 쓴다고 담은 술이 맛이 살짝 넘었다는구나.
"작기 남은 것도 아인데 이 거를 우야노?"
엄마는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면서 독을 놓을 줄을 모르고.
"안즉 타작 마당에 북데기도 다 안 치았는데……."
"이기 이래 먼저 가서 우야노?"
듣고 보니 엄마가 저리 낙담을 할만도 해. 타작 마당에 북데기도 덜 치웠으니 큰 일군 들 일이 많다는 얘기거든.
보리 타작을 했다고 일이 끝이 아니야. 북데기 치우고 보리 널어 말리고 그깐 자잘한 일이야 엄마랑 식구들이 밤낮으로 붙어서 조금씩 하면 언젠간 끝나지만, 농사일이란 게 그렇게 두고두고 우리 시간 날 때 조금씩 해도 될 일만 있는 게 아니거든.
남의 일손을 빌어서라도 때를 놓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많아. 어서 타작마당을 치우고 논에 물을 실었다가 갈아엎고 모낼 준비를 하는 거며, 논을 다루고, 모도 내고…….
그런 큰 일이 많이 남았다는 건 술도 그만치 있어야 된다는 말이고. 그런데 벌써 술이 넘어서 맛이 살째기 간 듯하니 그 일이 어디 작은 일이야?
술이 들어갈 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엄마가 그렇게 애닯기도 하겠지만 엄마는 술, 그 술이 정말 아까운 거야. 그 술이 어디 보통 정성으로 되는 일이어야지.
큰 농사일이 다가오면 엄마는 커다란 사구에다 하얀 쌀을 가득 담궈. 할머니 밥에도 아버지 밥에도 푹푹 못 넣던 그 흰쌀을 말이지.
해마다 큰 농사일을 앞두고는 늘 하는 일이라 우리도 벌써 눈치를 챌 수 있어. 쌀을 불려서 조리로 살살 일어서 소쿠리에 건지면 우린 엄마 옆에 달라붙어 앉아. 불린 쌀을 입에 조금씩 넣고 꼭꼭 씹는 그 맛이 얼마나 좋던지. 그것보다 꼬들꼬들하게 쪄놓은 꼬두밥을 생각하면 밖에 나가 노는 것도 심드렁해. 
"엄마, 제가 불 때까예?"
엄마가 솥에다 엉그리를 놓고 베보자기를 깔면 난 벌써 짚을 안아다 놓고 아궁이에 불까지 지펴. 어디 나만 그래? 엄마가 베보자기를 깔고 쌀을 고루 펴놓고 솥뚜껑을 닫으면 우리 동생은 잽싸게 솥전에 늘어진 보자기 귀퉁이를 뚜껑 위로 하나하나 잡아 올려. 우리 둘이 엄마를 졸졸 따라 다니며 그런 간살을 떨면,
"저리 가라 고마. 가서 물어라 카는 쥐나 물어라."
하고 우리를 쫓아내지만 그렇게 무섭게 화를 내시지는 않아.
솥에서 김이 쐬엑 쐬에엑 나면 쌀 익는 구수한 그 내음이 정말 좋았어. 우리 동생은 솥전에 퍼지는 김을 따라 다니며 눈을 살째기 내려 감고 콧구멍을 벌름벌름 "흐음 흐흐음"하며 마구 얼굴을 갖다 대곤 했어. 그러다 김이 화악 얼굴에 덮치면 '앗 뜨거라' 하고 뒤로 물러났다가 얼굴에 서린 물기를 손바닥으로 스윽 닦고는 또 그 짓을 해.
그렇게 우리가 장난을 치면서 고두밥을 찔 동안 고모랑 엄마도 바빠. 고모는 돌돌 말아 세워두었던 돗자리를 꺼내다 마루에 깔고 깨끗한 행주로 몇 번이나 닦아. 갓 쪄낸 고두밥에 한김이 나가도록 자리에 넓게 펴 두어야 하거든. 
엄마는 말려둔 누룩을 방앗고에 넣고 툭툭 쳐서 물에 담궈 놓고. 장독대에 엎어두었던 독을 새밋가로 끌어다가 몇 번이나 씻고 또 씻어서 물기를 가시고 마른 수건으로 닦고 또 닦아. 갱물이 들어가면 술맛이 안 좋대.
그런데 말야 다른 때는 불을 켜 놓고 저녁을 먹게 되면 엄마가 늘 야단을 쳤거든. 밝을 때 저녁 먹고 들앉아야지, 늦도록 떨거덕거리고 설거지한다고 말야. 그렇지만 해마다 철마다 술을 빚는 날은 왜 그렇게 늘 다 늦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시작하는지. 좀 일찌감치 쌀을 담그고 서둘러도 될 텐데. 오후에 느지막히 쌀을 담그고 불을 때서 고두밥을 찌고 나면 꼭 늦은 저녁 시간이 됐거든.
늦은 저녁을 먹고 고모가 설거지를 할 동안 엄마는 물에 불려 놓은 누룩을 주물러.누룩이 물에 잘 풀리도록 바락바락 한참 주물러. 이걸 식혀 놓은 고두밥과 잘 섞어 독에다 퍼 담고 한지를 끊어다 두어겹 덮고 고무줄로 탱탱하게 묶어서 독뚜껑을 덮지. 구들목에 놓고 한이불을 꺼내다 잘 두르고 나면 우리 모두 잠자리에 들 시간이 돼.
아참, 동동주가 되든가 막걸리가 되는가는 바로 이때 결정이 나. 누룩을 잘 주물러 건덕지를 꼭 짜서 맑은 물만 따라서 고두밥에 앉혀서 익히면 밥알이 동동 뜨는 동동주가 된단다. 누룩을 거르지 않고 고두밥이랑 한데 섞어서 익혔다가 다 익은 다음에 짜서 거르면 막걸리가 되는 거야.
그런데 그때 우리 동네 어른들은 동동주는 깨끗한 것이 때깔은 좋은데 근기도 없고 싱겁다고 막걸리를 더 좋아하셨어. 동동주는 뭐 잔치 때나 명절 때 손님상에나 올리는 술로 생각하시더라고.
동동주든 막걸리든 그렇게 쌀 아끼지 않고 한 독 익혀 놓으면 농사일이 다 끝날 때까지 조금씩 내다 썼거든. 그런 술이 넘어서 맛이 변했으니 엄마가 애닯아 할만도 하지?
"이래 많은 거를 다아 초를 담을 수도 없고."
엄마는 종지에 조금 떠내서 맛을 보고 또 보면서 애를 태우셔.
"언니야 그래도 아쉬운따나 아직까지는 먹을 만하겠는데."
고모도 술을 찍었던지 손가락을 빨면서 속이 상하긴 마찬가진 모양이야. 
"오늘 하루에 다 없애면 몰라도……"
엄마는 장독간에 올라가 촛병을 이것저것 흔들어 보면서
"그래 된 거는 하루가 다르기 맛이 빈해서 못 잡는다."
"초도 안즉 많아서 안 되겠다."
"애기는 밀가루 한 사발만 좀 개 봐라."
영 안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 엄마는 장독간에서 나오면서 고모한테 그러네.
속이 상해서 어쩔 줄 모르던 엄마는 인제 무슨 생각을 했던지 바로 정지간을 돌아 뒤꼍으로 가서 안 쓰고 덮어두었던 바깥아궁이를 치우기 시작했어. 엎어두었던 큰솥을 내다 걸고, 물을 퍼다 부어 씻어내고 마른 행주로 닦고, 광으로 가서 술독을 조심조심 끌고 나올 때까지 엄마는 이제 말 한마디 없어. 그저 그렇게 몸만 바쁘게 움직이는 거야.
엄마가 아무 말도 안하고 몸만 움직이니 집안이 갑자기 다 바빠지고 다같이 심각해진 것 같아.
"야야, 바깥마당에 깻대 좀 안고 온나."
"아가, 밀가루는 되직하이 개야 된대이."
이렇게 딱 두 마디만 했는데도 동생도 나를 따라 다니면서 저도 한다고 깻대를 서너꼽쟁이나 되게 안아다 나르면서 쌕쌕거려.
"누부야, 불 때서 뭐 할긴데?"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에 아무 말 않고 그냥 날 따라 깻대를 안고 따라 다니던 우리 동생은 그러면서도 뭔 일을 할건지 궁금한 거지.
"소주 내릴랑 갑다."
그새 고모는 밀가루를 다 개었는지 엄마가 끌고 나오는 술독을 같이 들어다 놓고 있었어.
엄마가 깨끗이 씻은 솥에다 맛이 넘은 술을 앉힐 동안 고모는 정지간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보시기를 들고 나와 술을 떠놓은 솥 안에다 반듯하게 놓았어. 그러는 동안 우리도 불을 지펴서 불을 때기 시작했지.
고모가 놓은 보시기를 엄마가 요리조리 다시 놓아보더니 딱 한가운데를 맞추어 꼭꼭 눌러 앉히는 거야. 보시기가 잘 앉았다 싶은지 엄마는 솥뚜껑을 깨끗하게 닦고 또 닦더니 이번에는 뚜껑을 뒤집어서 덮어.
엄마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도 고모가 되직하게 개어놓은 밀가루 반죽을 들고 오더니 손뚜껑을 뺑 돌아가면서 재빨리 발라. 김이 새지 않게 솥뚜껑을 붙이는 거야. 엄마가 새미에서 막 퍼온 찬물을 솥뚜껑 오목한 데다 한 바가지 부었어.
이제 불을 잘 땔 일만 남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됐다. 인자 불은 애기가 때 봐라. 불땀이 너무 좋아도 안되고 너무 사그라지기 때도 안된대이."
아무래도 엄마는 내가 불 때는 것이 못 미더운 게야. 고모가 불을 땔 동안 엄마는 밀가루 반죽 그릇을 씻어놓고 소주 받을 병도 챙겨다 놓고 그래.
그러면서도 때때로 솥뚜껑 위에 물을 살피면서 김이 서리나 어쩐가 보면서 자리를 못 떠.
행주를 깨끗이 빨아 솥전을 닦다가
"아가, 밑술이 끓어 넘으마 안 된대이."
또 아궁이를 들여다보다가
"다 내릴 때까지 정신들이 해야 되는 일이대이."
솥뚜껑 위에 물을 새로 갈아놓으면서도
"불이 너무 시머 끓어 넘어 안 되고 그렇다고 불이 너무 시들하머 술이 삭아뿐대이."
정말이지 엄마는 혼잣말처럼 끝없이 고모한테 주문을 거는 것 같았어. 그 때 엄마는 정말 온 정신을 거기에 다 쏟아 붓고 있는 듯 했어.
솥뚜껑 위에 물을 몇 번이나 갈았을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고모가 깻대를 더 대지 않고 불이 사그라들자 엄마가 과자처럼 바싹하게 굽힌 밀가루를 떼내었어. 우린 그걸 받아 분질러 입에 넣어 꼭꼭 씹어 먹는 재미도 좋았어. 가끔 사 먹어보던 건빵만큼 고소했거든. 달진 않았지만.
그런데 말야.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 우리 엄마가 '귀신같다' 싶었어.
보이지도 않는 그 솥 안에서 보시기 가득하게 노르스름한 맑은 소주가 내려앉은 걸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솥뚜껑을 거꾸로 놓아 그 오목한 자리에 찬물을 붓고, 솥 안에서 일어난 김이 식어 솥뚜껑 손잡이를 타고 보시기 안으로 똑똑똑 떨어지는 그 방울들을 모아 소주 만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아무래도 신기한 건, 어떻게 그렇게 시간을 딱 맞추어 솥뚜껑을 여느냐 말이지. 끓어 넘치지도 않게, 바닥에 눌어붙어 타지도 않게 때를 맞추어 불을 끄면 보시기 가득하게 소주가 담겨져 있었거든.
노르스름한 빛을 띄는 맑은 소주를 깨끗이 씻어 말린 병에다 따라 붓고 다시 거르지 않은 전주를 솥에 앉혀서 소주를 내리고, 또 내리고. 맛이 넘은 술을 모두 다 할 때까지 몇 번을 하다보면 저녁도 아주 늦은 저녁때가 되곤 했어.
나는 지금 이렇게 커서 술을 마시다 그 때 그 그림이 가끔 떠올라.
그 긴 시간동안 온통 소주를 내리는 데만 마음을 쏟아 붓던 우리 엄마.
그 옆에서 지겨워하지 않고 하라는 대로 잔심부름을 다 하던 우리 막내고모.
솥뚜껑을 열면 솥 한가운데 노르스름한 소주를 찰름찰름 담고 있던 보시기.
그 솥이 걸려있던 우리 집 뒤꼍, 바로 옆에 자라고 있던 접시꽃, 장독간…….
그 때 엄마 옆에서 손가락 푹 담가서 맛을 보던 그 소주 맛, 그 맛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