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정말 해 보고 싶지만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야야선미 2004. 8. 3. 11:36

그것이 뭐냐고?
있어. 정말 해 보고 싶었던 일.


해가 많이 짧아진 늦은 가을.
그 날도 나는 해거름이 되어가자 동무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 소죽 끓일 채비를 해야 했어.
두 살 많은 바로 위에 오빠가 중학교에 가고 2학년이 되니까 늦게 오는 일도 많아졌거든.
일찍 오더라도 이젠 제법 일군처럼 도울 수 있으니 집에 오기 바쁘게 들에 나가 엄마 일을 거들었거든.
그 때부터 저녁에 소죽 끓이는 일은 내 몫이 된 거지.
커다란 소죽솥에 쌀뜨물, 귀명물을 낑낑대며 들어다 붓고, 여물을 퍼다 넣고 쌀겨 두어 바가지, 여기저기 못이 박힌 인물 없는 호박도 몇 토막 삐져 넣고, 짚을 한아름 안아다 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그 때부턴 한참 동안 앉아서 불만 때면 돼.
그런데 그놈의 소죽솥은 어찌나 크던지 한참이나 불을 때어도 좀처럼 끓지를 않아.
솥뚜껑에 눈물이 맺히고 솥전을 타고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려야 곧 쌔에쌔에 김이 나고 푹푹 끓어오를텐데, 이건 도통 눈물이 흘러내릴 생각을 않아.
지겹도록 불을 때어도 솥뚜껑 아래로 눈물이 맺힐 생각도 안해. 
솥전이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한참을 때면 겨우 두어방울 눈물이 맺히거든. 
'아이구 됐다, 눈물이 인자사 나네.'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칠 때가 되면 어서 눈물이 흘러내리라고 부지깽이로 쪼록쪼록 눈물길을 그려주는 거야. 
그렇게 쪼로록 그려놓은 길을 따라 눈물이 빨리 흐르고 그래서 어서 아궁이 앞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그것도 지겨워지면 인제 솥뚜껑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러대지. 
처음에는 "엄마가 섬그늘에∼"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뭐어 그런 노래를 부르다가 나중에는 "바다가 육지라면∼" "아아 잃어버린 장∼미여!"까지 온갖 아는 노래는 다 부르지.
그 날도 "저 푸른 초원 위에 니 딸따리 내 딸따리∼" 해 가면서 한참 부르고 있는데, 학교에 교장선생님 사모님이 잰걸음으로 들어오시고 그 뒤에 '진짜로 키 큰' 군인 아저씨가 척척척 들어오는 거라. 
난 그 때 정말 불이 붙었거나 말거나 아궁이 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더라니까. 
생각을 해 봐라. 
아궁이 앞에 엎드려 꺼질라카는 불을 살릴 끼라꼬 몇 번이나 불 앞에 엎드려서 후우후 불어댔으니 앞머리는 부수수하지, 얼굴에는 껌둥이 묻었겠지. 
거기다 등을 한쪽 벽에 떡 기대고 두 다리는 앞쪽 벽에다 처억 걸치고 앉아서는 솥뚜껑을 두드려가며 "니 딸따리 내 딸따리"를 불러대고 있는 꼴이라니.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집에 오는 손님한테 인사고 뭐고 고개를 폭 숙이고 짚만 자꾸 밀어 넣고 있는데, "야야, 소죽 끼리나?" 사모님은 넘 속도 모르고 아는 척을 해서 더 챙피하게 만드는 거라.
마당에서 기척이 나니까 오늘 따라 밭에서 일찍 들어온 엄마가 부엌에서 뛰어 나오데. 
정말로 반가운 얼굴을 하더니 사랑방으로 뛰어가고, 사랑방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급히 나오시네. 
'또 뭔 일이 생긴 기가?' 하고 있는데, 엄마가 또 바쁘게 웃방으로 올라가더니 우리고모를 등 떼밀고 나오는 거라. 
우리 고모는 마루 아래 축담에 내려서서 신 신을 생각도 않는데 엄마가 억지로 신을 끌어다 신기고, 또 팔을 끌고 마당으로 내려가고, 고모는 그때까지도 궁둥이를 뒤로 쑥 빼고 걸음을 떼어놓질 않아. 
엄마가 억지로 사랑방 문 앞에까지 고모를 끌고 가서 나지막하게 "선이 아버지요오∼" 하고 부르자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오시고 대신 고모가 등을 떠밀려 사랑방으로 들어갔어.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교장 선생님 사모님이 "야야, 소죽 끼리나?" 하시는 그 말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다 일어난 일이야. 
"니 딸따리 내 딸따리"하고 솥뚜껑을 두드려 대던 내 꼴이 부끄러워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있는 동안 후다닥 일이 그렇게 된 거지. 
가만 보니까 그러니까 말로만 듣던 "맞선"을, 우리 고모가 그 맞선을 보는 거야.
엄마는 안 들어갈라는 고모를 억지로 밀어 넣더니 사랑방 문 앞에서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나 그대로 딱 서서 숨을 숙이고 선 채로 귀를 기울이고 있어. 
윗채로 올라오신 아버지도 웃방에 들어가시는 것 같더니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루에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시더니, 아예 정지간 앞에 서 있는 사모님 옆에 가서 아예 말동무나 하기로 했는지 사모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섰고. 
엄마는 사랑방에서 하는 이야기가 잘 안 들리는지 조금씩조금씩 문 앞으로 끌려가고 있어. 
아버지가 손짓으로 이리 오라고 하지만 엄마는 가만 있으라는 듯 손사래만 젓고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라.
온 집 안이 숨을 죽인 듯 조용하고 나도 온통 사랑방 쪽으로 신경이 쏠려서 소죽솥에서 눈물이 나든 말든 김이 나서 쌔에쌔에 소리를 지르던 말든 짚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는데, 사모님만 아버지한테 뭐라뭐라 얘길 하셔.
"전교장이 (사모님은 맨날 남편을 그렇게 불렀다) 생질 중에서도 저 생질을 참 미덥어 합니더."
"……"
"큰 부자는 아이라도 넘한테 뭐 하나 빌리로는 안 가고 삽니더. 맏이는 마산에서 따시게 살고예, 지차라서 둘이서 야물기 살머 누구하나 시집에서 뜯어갈 사람은 없습니더. 저거 둘이 마음 맞차 살머 금방 자리잡고 따시기 살깁니더."
"……"
"사람이 얼매나 건실하고 야문지. 군대가기 전에 고물 장사하는 거 보고 놀랬습니더. 요새 젊은 사람이 그런 거 할 생각을 합니꺼, 어데."
"……"
"몸 좋지, 사람 올차지, 그기 잴 아입니꺼?"
아버지는 고개만 주억거리고 아무 대꾸도 없는데도 사모님은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를 했어.
"아이구, 야야. 니 머리 다 꼬실라 묵겠다. 어여 불이나 밀어 넣어라."
사랑방 앞에 선 엄마 보랴, 사모님 이야기 주워 들으랴 불이 너풀너풀 밖으로 춤을 추는 지도 모르고 짚만 자꾸 대고 있는데 사모님은 어느새 그것까지 보고 소리를 치고는 또 금세 아버지 쪽으로 돌아다보면서 또 이야기를 이었어,
"둘 이 좋다카머 설 아래 혼인시키고, 두어달은 시집에서 같이 델꼬 있다가 이월 달에 제대하면 살림 내놓을라 카데예."
"……"
"혼인하자마자 떨어지는 기 안됐습니더마는 한 두어 달이야, 어떻겠습니꺼. 이전에 우리 때는 신행 전에 일년썩도 지둘릿는데."
그렇게 온 집안에 정말 사모님 혼자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랑방 문이 열리자 꼼짝도 않고 섰던 엄마는 놀랜 듯이 정지간으로 뛰어들어가고, 조금 있으니 군인 아저씨가 나와서 허리를 구부려 신발끈을 끼우고 졸라매면서 한참을 엎드리고 앉았더라. 그 등너머 열린 문 안으로 고모가 보이는데 손가락으로 방바닥만 쭈욱쭈욱 그으면서 고개를 폭 숙이고 있는데, 나는 우리 고모가 그래 부끄러워하는 걸 처음 본 것 같았어. 
일어서야 할지 나와야 할지 모르겠는지 아주 조금 엉덩이를 떼는 듯 하더니 사모님과 아버지가 사랑방 쪽으로 다가가자 구들목 쪽으로 쏙 들어가서 아예 보이질 않아.
양쪽 신발끈을 다 졸라매고 일어서자 아까 처럼 사모님이 앞장서고 군인 아저씨는 뒤따라나가면서 아버지한테 몇 번이고 인사를 했어. 
엄마는 대문까지 따라나가면서
"저녁 때가 지났는데, 우야노?"
"선보로 와서 밥 묵고 가머 성사가 안된다캐서......"
"아이구 그래도 때 대접도 몬하고 그냥 보낼라카이 영 맴이 무겁네예." 하면서 혼자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사모님은 소사래만 젓고 군인 아저씨와 함께 골목으로 사라졌어. 
아버지도 뒤따라 나가시고 집에는 엄마랑 나만 남았는데도 고모는 사랑방에서 나올 줄을 몰라. 불때고 남은 짚단을 치우고 아궁이 앞을 대강 쓸어놓고 사랑방으로 달려갔어. 
"고모야~" 하고 들어가는데 엄마가 
"됐다, 마. 니는 저녁이나 챙기라."
하고 말려서 할 수 없이 부엌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고모가 얼마나 보고 싶던지.
한참 뒤에 아버지가 들어오시고, 중학교에 다니는 넷째 오빠가 들어오고, 골목에서 얼굴이 꾀죄죄한 채로 막내까지 들어오고 나서야 우리는 저녁을 먹었어. 
해는 벌써 지고 어느새 깜깜해져 다른 날보다 훨씬 늦은 저녁을 먹는데 그때까지 고모는 얼굴도 안 내보여. 
늘 저녁밥을 해 놓고 기다렸다가 식구들이 다 들어오기가 무섭게 저녁상을 차려내던 고모인데, 그날은 엄마도 아버지도 고모를 찾지 않고 그냥 엄마가 차려온 저녁상 앞에 둘러앉은 거야.
"고모도 밥 묵어야지, 고모 오라 카께." 하고 일어서는데 
"됐다, 너거 고모는 나중에 묵구로 해라. 따로 챙기놨다." 엄마는 고모를 기다리지도 부르지도 않고 밥숟가락을 들었어. 아무 소리 안하고 있던 막내가
"고모 어데 아푸나?" 오빠도 밥 숟가락을 들다가 말고
"와? 진짜네. 고모는 와 안 오노? 고모 저 방에 있나?" 소리를 죽여 물어 보는거야.
"있다 아이가, 오늘 고모 선 봤데이."
"진짜가? 니도 봤나?"
"어어. 있다 아이가, 키가 진짜로 크더라. 근데 있다 아이가 머리는 또 디기 작더라."
"키가 그래 크더나? 그런데 머리가 작으면 이상하겠다, 그쟈?"
"그래도 머리가 디기 큰 거 보다는 낫겠다."
" 에이 나도 좀 부르지. 내가 딱 봐야되는데."
"순하게 생깄더나?"
"얼굴은 잘 못 봤다."
"니는 딱 보면 모르나? 그거부터 봐야 되는데. 순한 사람이라야 되는데."
우리가 소리를 죽여 그러고 있는 사이 엄마는 또 걱정이 늘어졌다.
"저 짝에서는 둘이 마음만 맞으면 설 아래 하자 칸다는데. 또 어데서 돈을 둘러대겠능교?"
"한해 둘이 하는 기 아이라카는데 봄에 제대한다카이 그 때 하자 카지 뭐."
"봄에 한다꼬 지금 없는 돈이 어데 나오겠능교? 가실에 저거 삼촌 장개 들인 거 아이까 쫌 몬 해도 이해는 안 해주겠나마는."
"……"
"그래도 시어른 될 양반들이 점잖은 자리라 카고, 살림도 그래 쬐이는 집이 아이라 캐서...... 자리는 탐이 나구마는."
"그거는 그렇고 사람은 어떻던공? 아까 뭐 좀 들어봤나?"
아버지는 엄마가 사랑방 문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점잖지 몬하기 그란다꼬 그래 말렸으면서도 궁금하긴 했는 모양이야.
"자시 들리야 말이지요. 띄엄띄엄 듣긴 들었는데, 사람은 양글어 보입디더."
"머라 캐쌓던데?"
"애기 손을 보고, 손이 일을 참 마이 한 손 겉다고, 그 손이 참 좋다고 하데요."
그 말끝에 아버지는 혼잣말로
"처자 손이, 일 마이 한 손이 머시 좋다꼬." 하더니
"그라고 또?" 하고 자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시는데,
"아이구 밖에 있는 내가 우예 더 듣능교? 고마 도란도란 해쌓는 거 보이까 둘이다 싫지는 안한 갑더메."하고 말을 딱 잘라버려. 그러고는
"내싸 마 하자고 해도 걱정이고, 안 한다해도 걱정이구마는." 하고 한숨을 푸욱 쉬는 거야.
"애기를 이래 크도록 데리고 있으민서 시집갈 때는 넘한테 안 빠지구로 해 보낼라캤는데, 언제 한번 피일 날이 있어야지. 또 이래 쫄라 붙이가 보낼라카이 참……"
엄마 마음을 아는 아버지는 아무 말도 더 못 붙이고 밥만 드시고, 우리도 그만 밥이나 폭폭 떠 먹었어. 고
모가 선을 보고, 곧 시집을 갈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설레이던 우리도 엄마 아버지의 걱정을 알만했거든.
저녁상을 치우고 엄마를 거들어 설거지를 끝내고 방에 들어갔더니 사랑방에 있던 고모가 어느새 웃방에 올라와 있어.
"고모야, 배 고푸제? 밥 갖고 오까?"
"아이다. 됐다."
"배 고풀 낀데."
밥을 한끼도 거르는 일이 없는 고몬데, 저녁을 안 먹고 우예, 배가 안 고프겠노. 
그런데 그날은 정말로 배가 안 고파 보였어.
"고모야, 내가 이불 깔가?'하고 말을 붙여도 쳐다보지도 않고 엎드려서 라디오 꼭지만 이래 돌렸다 저래 돌렸다 하고 있길래,
"법창야화 안 하나?" 하고 나도 옆에 엎드리니까 또 저리 떨어져 누우면서
"야아는 지금이 몇 신데 벌써 하노? 아직 한 참 있어야 하지. 그런데 오늘은 와 이래 주파수가 잘 안 맞차지노?"
하면서 받침 쪼가리를 끼운 라디오 꼭지를 돌려 대는 거라. 
둘이서 그렇게 어색하게 누웠는데,
"야야, 자나?"하고 고모 친구들이 들이닥쳤어. 
고모 친구들은 저녁 마실을 오면서 꼭 내 이름을 부르면서 들어왔거든. 현지 아지매, 점이 아지매, 정자, 봉숙이, 수자 저거 고모도 왔어. 저녁마다 모여서 수도 놓기도 하고, 겨울에는 새끼도 꼬고, 여름에는 오비도 짜고 그러는 고모 동무들이야. 
그 무렵에는 한참 가아제 손수건에다 구정뜨개실로 가장자리를 예쁘게 뜨개질하는 걸 하고 있었어. 
그날도 손에는 모두들 하얀 손수건과 예쁜 구정뜨개실을 챙겨들고 왔는데, 오자마자 방바닥에 턱 던져놓고는 모두들 고모 옆에 달라붙었어.
"니이, 오늘 선 봤다미?"
"소문도 빠르다."
"어떻더노? 점호 각시가 봤는데, 총각 좋더라 카데"
"점호 각시는 또 어데서 봤는공?"
"안새미 살 씻다가 봤겠지. 키도 억수로 크더래미?"
"몰라. 앉아 있는 거만 봤는데 키가 큰지 작은지 우예 아노?"
"눈 크더나? 니는 눈 작은 남자 파이다카미."
"몰라 눈이 큰지 작은지 못 봤다."
"그것도 못 보고 뭐 했노?"
"처음 보민서 얼굴을 우예 치다 보노?"
"야아, 선 보민서 얼굴을 몬 보면 머 보노?"
"몰라야."
동무들이 달라붙어 물어대니 고모는 정말로 부끄러운 얼굴이 되었어. 
고모가 그렇게 부끄러운 얼굴을 하다니. 고모는 그 이야기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어서, 그기나 만자 떠라. 현지 니는 야, 안죽 그거빼끼 몬 했나?"
하고 다들 내팽개쳐 놓은 손수건을 끌어다가 안겨 줬어. 
고모들은 손수건을 펴들고 코바늘을 찾아 잡고 뜨개질을 하는가 싶더니,
"언제 또 만나자 카더노?"
"낼"
고모는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코바늘만 빠르게 넣었다 뺐다 넣었다 뺐다 하고 있어.
"읍에서 만나나?"
"어."
갑자기 현지 아지매가 손수건을 옆에 탁 놓더니 고모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어.
"니이, 낼 다방에서 만나서 머 마실 끼고?"
뜬금없이 그렇게 물으니까 고모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아지매들도 다 손을 놓고 쳐다봤지. 
옆에서 짜투리 실 하나 얻어서 헌 손수건을 펴 들고 앉았던 나도 '이기 뭔 말이고?' 싶을 정도였거든.
"커피를 묵을 때는 한 입에 후루룩 먹으면 큰 일 난대이. 그거 보기보다 억수로 뜨겁거덩."
"……"
모두들 아무 말도 않고 다음 말만 기다렸지.
"쪼께이썩 천천히 마시야 된대이. 또 커피잔을 딱 내려 놨는데 베니가 뻘겋게 묻어 있거덩. 그것도 안 보이게 살째기 잘 딱아 놔라."
고모나 동무들이나 다들 너무나 놀랍다는 듯이 현지 아지매를 쳐다보는데, 현지 아지매가 또 입을 열었어.
"어떤 남자들은 여자가 커피 마시는 거 안 좋아한다 카더라. 젤 좋은 거는 목장이다. 니는 목장 시키라."
"목장은 머시고?"
"우유. 뜨신 거는 밀크라카고, 찹은 거는 목장이라 카는데, 목장이 시원하고 좋다. 뜨겁은 거 묵다가 잘 몬하머 입천장 벗겨지거덩."
"……"
고모랑 동무들은 또 고개만 끄덕거리지 완전히 할 말을 잃었어.
"그런데 그것도 베니 자죽이 생겨서 신경이 좀 쓰이더라."
"오렌지 쥬스도 괜찮은데."
"……"
"그거는 스트롱 가지고 빨아 묵으니까 베니 자국이 안 생기거덩."
"……"
"그런데 그거로 묵을 때는 한번에 쭈욱 빨아 먹으면 안 된대이. 내가 전에 거어 명례 사에이치 회장, 그 사람 만났을 때 덥다고 한번에 주욱 마셨다가 망신시러버 죽겠는 거라."
"와?"
"쭈욱 빨아땡기는데 뿌루룩 소리가 어찌나 크기 나는지. 얼매나 부끄럽겠노?"
"……"
"그거 빨아 땡길 때는 스트롱이 쥬스 안에 푸욱 잠깄을 때 조금씩 빨아먹으면 소리 안난다. 끄트머리가 밖에 좀 나왔을 때 빨면 시끄러븐 소리가 나거덩."
역시 연애박사 현지 아지매는 다르더라. 
그런 거를 우예 다 아는지. 
고모도 다른 동무들도 고개만 끄덕끄덕 할 뿐 아무도 대꾸도 못하고 있었지. 
현지 아지매. 
그 시골 구석에서 연애 박사라고 소문 날만 하데. 
숙자라는 이름도 촌스럽다고 혼자서 그냥 "현지"라고 바꾸어 불렀거든. 
고모 동무들이나 현지라고 불러줬지 동네에서는 여전히 숙자라고 부르는데도 현지 아지매는 어딜 가나 자기를 현지라고 소개한다네. 
머리도 긴 생머리를 풀고 다녀서 동네 할매들 입에 그리 오르내리는데도 절대로 안 묶으고 땋지도 않고 꿋꿋하게 그냥 풀고 다녔거든. 
선도 많이 보고 연애도 많이 해봐서 모르는 것이 없다더니 그날 보니까 진짜로 모르는 것이 없더라니까.
"그런데 현숙이가 와 안 왔노?"
혼자만 이야기한 것이 머쓱했던지 현지 아지매가 불쑥 현숙이 아지매를 찾는데, 현숙이 아지매하고 앞뒷집으로 사는 점이 아지매가 정말로 놀라운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아아참, 야아 선 본 거 이약한다꼬 깜박 했네. 현숙이 인자 밖에 몬 나온다. 저거 엄마가 머리를 짤랐다 아이가." 
"와아? 그 사람 만난다꼬?"
"저거 엄마가 알고 엊저녁부터 난리가 났다 아이가. 가서나가 연애한다꼬. 동네 우사시럽어서 몬 나가겠다고 소리소리 질러쌓더마는 고마 그랬다카네."
"빙시겉이 머리를 깎이고 앉아 있노? 밖으로 내빼야지." 현지 아지매가 나섰어.
"현숙이 그기 또 안 그란다 아이가. 그냥 앉아서 눈물만 빼고 홀짝거리고 있으이 저거 엄마가 더 그라지."
"어제 밤에는 운다꼬, 우는 소리 들리는 것도 우사시럽다꼬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아 놓고 문도 걸어 잠가 뿠다 안 카나."
"오늘 아침에도 잘못 했다 안 카고, 안 만나끼제 카는데 대답도 안하고 홀짝거린다꼬 고마 머리를 확 짤랐다 카더라."
"모녀간에 똑 같다, 그자."
현숙이 아지매나 그 집 할매는 두 사람 다 참 말이 적고 얌전했거든. 
그런데 두 사람이 그랬다는 것이 나는 잘 안 믿겼어. 
전에 고모랑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둘이 참 좋아한다 카던데. 와 연애를 하면 안 되는지, 그래 입까지 틀어막아 방문까지 잠궈 놓고 가둬 두어야 하는 건지, 머리를 깎아버리고 동네 나다니지도 못하게 해야되는 건지 나는 참 모르겠더라.
현숙이 아지매 이야기를 하다가 고모들은 한참 말없이 뜨개질만 했어. 그
때 동네 처자들은 너도나도 하얀 손수건을 뺑 돌려가며 예쁘게 뜨개질을 해서 하나하나 모았거든. 
다들 시집갈 때 가져갈 거라고. 
연분홍색, 옥색, 노란색, 또 하얀색 구정뜨개실로 색색이 떠서 반듯하게 착착 접어놓으면 그냥 보기만 해도 참 고왔어.
저녁에 모여서 뜨개질을 하면서 현지 아지매 선 본 이야기, 먼저 시집간 아지매들 이야기, 사에이치 클럽에서 만난 다른 동네 총각들 이야기들이 끝이 없었지. 
나도 그 틈에 끼여 안 듣는 척 하면서 주워 듣는 재미도 쏠쏠했가든. 
한참을 그렇게 무겁게 뜨개질을 하더니 역시나 현지 아지매가 또 먼저 얘길 꺼냈어. 
우리 고모한테
"야, 니는 인자 거기 손수건에 이름자 새겨도 되겠네."
"벌씨로 무슨……"
고모가 수줍게 말을 흐리는데
"머어 읍에서 또 만나자미? 그라면 맘에 있다는 긴데 머. 그 사람 이름은 머라카데?"
"이 집 중 이라 카던가……"
"이집중?"
갑자기 고모들이 다 웃기 시작했어. 나도. 
이름이 집중! 정말 웃기는 이름이잖아? 다들 한참을 웃다가
"니는 그라마 Lee"를 새기면 되겠네." 마치 모두 결정난 듯이 말했어. 
"몰라야." 고모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너무 안 늦었나?. 인자 집에 가라 고마." 하고 눈을 흘기는데 아무도 집에 갈 생각을 않아.
"……"
"하아, 또 하나가 가고."
"……"
"그라머 인자 맻이 남노?"
"……"
"점이도 날이 잡힌다 카고, 봉숙이년도 저거 집에서 설 아래 우야든지 보낼라꼬 난리라 카고......" 
연애 박사 현지 아지매답지 않게 현지 아지매가 한숨 섞인 소리를 하자 방안이 갑자기 또 무거워졌어.
고모가 좀 미안했던지
"니, 전에 말했던 그 사람 와 안 만나노?"
"내보다 작아서 치았뿠다."
"키 뜯어 묵고 사나? 키 크고 안 싱거븐 사람 없다 카는데, 작으면 다부지고 안 좋나?"
"야아, 첨에 볼 때는 몰랐는데 자꾸 보니까 저래 팔도 짧은 기 내를 안아 줄 수나 있겠나 싶어서 고마 시죽해지더라."
역시나 연애 박사는 달랐어. 
그 말에 다른 아지매들 모두 입을 다물었잖아. 그
렇게 조용해졌다가 또 까르륵거리다가 재잘거리다가 밤이 깊어갔어. 
밖에서 아버지가 "어험"하고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몇 번이나 더 들리고서야, 그때 처음 들었다는 듯이
"너거 큰 오빠 오싰다야, 가자."하고 방문을 열고 나섰어. 
우리 아버지는 밤마다 고모들이 다 나갈 때까지 아버지는 소마굿간도 둘러보고 아궁이에 잿불이 꺼졌는지, 돼지는 어쩐지 돼지우리를 들여다보시면서 여기저기 서성대시거든. 
밤이 늦었으니 어서 가라고 말대신 그렇게 재촉을 하시는 거야. 
재잘거리던 고모들은 날마다 날마다 만나면서도 일어설 때는 얼마나 아쉬운지 헛기침 소리를 못들은 척 하다가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서야 억지로 나가곤 했거든.
고모들이 다 가고 아버지가 마루 끝에서
"어여 자거라." 하시면 우리도 불을 끄고 누웠는데, 그 날, 고모가 선을 보던 그 날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한참을 잠을 못 들이고 뒤척이는 거야. 모로 누웠다가, 천정을 보고 반듯하게 누웠다가, 방문을 보고 돌아누웠다가 등지고 누웠다가…… 
그런데 그 날 본 우리 고모가 참 다르게 느껴졌거든.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잠을 못 드는 고모를 보면서 '나도 고모만큼 크면 선을 보겠지.' 설레임 같기도 하고, 부끄러운 일을 혼자 상상하는 것 같아 몰래 민망하기도 하고 그런 밤이었어.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나는 그 "선"을 보지도 못하고 그냥 시집을 가버렸잖아. 
아무리 하고 싶어도 이제는 하지 못할 그 "맞선", 아니 천만다행으로 그 비슷한 기회가 생긴다해도 그 날밤 우리 고모처럼 잠 못 이루며 설레이며 두근두근하며 가슴 떨리는 그걸 할 수 있을까 그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