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팔월을 기다리며

야야선미 2003. 9. 9. 11:58

팔월을 기다리며


팔월이 되어가면 우리 집 뿐 아니라 온 동네가 술렁이거든. 난 그런 동네가 참 좋았어. 있는 집은 있는 집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팔월 맞이를 하거든. 아아, 웬 팔월이냐고? 요새야 다들 추석이라고들 하데? 그런데 우리는 클 때 다들 팔월이라고 했거든. 팔월 한가위를 그냥 줄여서 그렇게 불렀나봐.
우리 엄마도 팔월이 되어가면 들일하랴 집안 일하랴 쉴 틈이 없었어. 안으로 밖으로 종종 걸음을 치면서도 즐겁고 기뻐 보였어. 그러면 나도 엄마가 시키는대로 이것저것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마음은 즐거웠지.
한 번은 엄마가 하도 바빠 보여서
"엄마 너무 힘들지예? 혼자서 할 거는 많고 우야겠노?" '그랬더니
"아이다. 다아 정신으로 하는 기이지. 그래 힘든다 되다 캐쌓는기 아이다." 하시는 거라.
어른들은 그랬어. 그게 그냥 힘들고 고달픈 일이 아니었나 봐. 온 마음을 다해서 정신을 드리는 일이었던거야. 그러고 보니 엄마 얼굴이나 방앗간에서 떡가루를 내리는 아지매들이나 다들 들뜬 듯 기뻐 보이면서도 어딘지 경건해 보이는 거 같았어.
팔월이 되어가면 먼저, 콩나물 콩을 골라서 담가놓고는 이불 홑청을 죄다 삶아서 빨아. 하얗게 빨아서 빨랫줄에 널고 바지랑대를 들어서 높이 세우면 온 마당에 이불 홑청이 나부끼는 것이 정말 큰 잔치집 같았지. 빨래 널어논 틈으로 숨었다가 쏙 나왔다가 하면서 동생하고 숨마꼭질도 하고, 그러다가 얼굴을 포옥 파묻으면 참 기분이 좋아. 빨래를 방금 끝낸 그 냄새. 아주 기분 좋은 냄새였는데. 물냄새였을까? 요즘같이 진한 냄새가 나는 비누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잿물 내려서 쌀등겨 넣어서 만든 비누로 빨았으니 그냥 물냄새만 났겠다. 그런데 그 날듯말듯한 연한 냄새가 참 좋았어.
요리조리 빠져 달아나다 그만 바지랑대가 미끄러져 넘어지면 빨랫줄이 추욱 늘어지고 빨랫감이 땅바닥에 끌리거든. 엄마한테 혼날새라 둘이서 바지랑대를 다시 세우느라 낑낑대기도 하고 그랬네. 풀을 먹여서 널어 논 걸 모르고 그러구 도망다니다가 얼굴에 팔에 풀이 묻어나서 끈적거리기도 하고. "이넘들이 일을 번다 벌어."하고 엄마가 소리치면 대문밖으로 도망을 가면서도 즐겁기만 했어. 그 때 도망을 가다가 뒤로 돌아다본 우리 마당에 나부끼던 하얀 빨래가 참 그림처럼 보기 좋았어. 아아~ 이 말하니까 우리집 이불도 죄다 뜯어서 하얗게 빨고 싶다야. 그런데 요새 이불들은 빳빳하게 풀을 먹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널어 말릴 마당도 없다 그지?
풀먹인 빨래가 어지간히 마르면 마루에 걷어다 놓고 손질을 해. 그런데 엄마는 보통 기술이 아니야. 입안에 물을 가득 머금고 홑청에다 푸우 하고 물을 풍기는데 어찌나 고르게 풍기는지. 뽀얀 안개처럼 흩어지는 물방울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엄마도 참 아름답게 보였어. 나도 엄마처럼 한 번 해 볼라고 입에 물을 머금기는 했는데, 조금만 혀를 꼬물딱하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다 넘어가 버려. 겨우 입에다 물을 물고 풍긴다고 푸우 하면 물이 그냥 왈칵 다 쏟아져버리고. 그것도 입으로만 나오면 다행이지. 물이 그만 코로 들어가서 따갑다고 켁켁거리면 엄마고 고모고 옆에서 막 웃어대고 그랬어. 한번은 마루 끝에 앉아서 축담에다 대고 엄마처럼 물 풍기는 연습을 해 보는데,

"너거 컸을 때는 이런 거 하는 사람이나 있겠나 어데. 부산겉은 데는 요새도 카시미롱 이불 쓰는 집이 더 많다카던데." 그러시더라.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까, 이불이 죄다 바뀌기도 했지만 물을 풍겨내는 스프레이라는 것이 생겨서 입에 물을 머금고 엄마처럼 풍겨내는 사람은 보질 못했네.
그렇게 물을 고루 먹여서 촉촉하게 되면 그 때부턴 나도 엄마랑 같이 할 일이 생겨. 넓고 기인 이불 홑청을 엄마 혼자 만지기 어렵거든. 그렇게 물을 골고루 풍긴 이불 홑청을 들고 마주 앉아 끝을 두 손에 잡고 반 접고 팽팽하게 잡아 당겨서 반듯하게 펴. 또 반 접고 잡아 당겨 팽팽하게 힘을 주고, 또 반 접고. 그러면 길게 착착 접어 지겠지? 한번 접을 때마다 엄마랑 둘이서 네 귀퉁이를 번갈아가며 힘을 주어 팽팽하게 당기는데, 이 때는 나도 힘을 바짝 주고 잘 앉아서 버텨야 돼. 엄마가 마음이 바빠서 확 잡아당기기라도 하면 바로 끌려가서 쾅 엎어지거든. 한 두어번 그렇게 엎어졌는데, 콧등이 내려 앉는 줄 알았어. 어찌나 아프던지.
다음엔 내가 잡은 끝을 모두 모아 엄마한테 넘겨주고, 가운데를 잡아 끌어다가 또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 팽팽하게 당겨 엄마한테 넘겨주고 또 접힌 가운데를 끌어오고. 여러번 하다보면 다듬잇돌 만하게 접히거든.
그걸 마른 수건으로 싸서 한참을 꼭꼭 골고루 밟아. 그건 내가 할 일이야. 구석구석 골고루 한참을 밟는데, 다리가 아프도록 힘을 주어 꼭꼭 밟을 때는 노래 서너 자리만 부르면 다 끝나. 그런데 노래에 취해서 몸을 흔들어대면서 숟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날은 노래를 여남은 가지나 불러도 다 안됐다는 거야.
한 번은 누래를 부르다가 들판으로 훤하게 열린 신작로를 내려다 보는데, 사람들이 꾸역꾸역 내려오는 거야. 팔월 대목장을 보고 오는 사람들이었는지 몰라. 나는 빨래를 밟다 말고 그 사람들 틈에 부산서 할머니가 오시는 건 아닌가, 숙모가 올라나 그러면서 목을 쭈욱 빼고 멀리멀리 내려다 보다가 아쉬워 하던 일도 있었네.
그렇게 놀다가 밟다가 꼭꼭 눌러 밟아놓으면 엄마가 저녁먹고 다듬이질을 시작해. 방망이를 잡고 타닥따닥 타닥따닥 참 잘도 쳐. 그 때부터 엄마의 기술이 또 나와. 꼭 박자를 세어서 하는 사람처럼 손 놀리는 것이 한번도 어긋나지 않고 고르게 내려치는 걸. 엄마하고 고모가 둘이 마주앉아 번갈아치는데 그게 또 예술이야. 커서 텔레비전에서 오고무 추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 엄마하고 고모가 마주앉아 치던 방망이가 떠올랐어. 그 좁은 다듬잇돌 위에서 방망이 네 개가 한번도 부딪히지 않고 타닥따닥 타닥따닥 소리맞추어 치던 그 모습이 신비롭기까지 했거든. 엄마 하는 게 하도 재미나게 보여서 떼를 써서 방망이질을 한번 해 보면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방망이 가운데로 쳐야 발래가 판판하게 주름이 펴지는데, 잘못쳐서 방망이 끝으로 때리지? 손이 엄청 아픈데다 빨랫감은 빨랫감대로 구멍이 날려구 해. 한 서너번만 같은 데 그렇게 잘못 맞으면 구멍이 뜷릴 걸?
그렇게 빳빳하게 다듬어서 또 볕에다 내다말려. 다음날 저녁에는 큰방을 깨끗이 치우고 이불을 넓게 펴놓고 꾸미거든. 우린 그 위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놀기도 하고, 엄마가 바늘에 실 꿰어 달라고 하면 바늘을 있는대로 갖다놓고 실을 쭈루룩 꿰어서 반짇고리에 척척 걸쳐 놓고는 또 데굴데굴 구르고 놀아. 엄마가 이불 말려서 바느질 못한다고 타박을 해도 잠깐 나왔다가 또 올라가 드러눕곤 했어. 열나흗날 저녁이면 오빠들도 오고 삼촌도 오고 식구들이 모일텐데, 이 이불 펴놓고 나란히 누웠을 걸 생각하면 엄마한테 야단을 들어도 그저 기분이 좋았어. 다 꾸민 이불을 반듯하게 개어 큰방 벽장 안에다 넣고 엄마는 손바닥을 펴서 아래위를 탁탁 두들기고 여기 한번 눌러보고 저기 한번 만져보고는 큰숨을 한 번 쉬고 벽장 문을 닫고 돌아서. 그러면 팔월 준비 한가지가 끝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