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얻어먹은 생일밥
사철 가운데 언제가 가장 좋은지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난 가을을 제일 기다린다. 남들이 천고마비의 계절이니, 결실의 계절이니, 가을을 타느니 어쩌느니 해도 나한테는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가을에는 내 생일이 있기 때문에 나는 가을을 기다린다. 가끔 누가 들으면 "어린 아이같이 뭔 생일을 기다리노?"하지만 나는 내 생일이 돌아오면 그저 기분이 좋다.
사실 가을이 시작되면 어른들은 끝도 없는 일속에 파묻혀 그 고된 얼굴을 한 번 펼 날이 없었다. 큰 일꾼 없이 엄마가 집안팎 일을 꾸려나가는 우리집은 더 말할 것도 없지.
"큰일은 장골이가 한 번썩 확 추리주면 일이 얼매나 줄낀데. 혼자서 아무리 동동거리도 일이 어데 줄어야 말이재."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고 들어와서 또 정지간으로 들어가면서 엄마는 가끔 그렇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아버지는 농사일을 모르는 분이고, 집에는 따로 일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엄마는 늘 들에서 살았다. 봄부터 추운 겨울이 올 때까지 들이고 밭에는 언제나 일거리가 널려있었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엄마는 더 바빴다. 논에 베어 눕혀 논 나락을 뒤집다가, 고추를 말리다가, 깻대를 쪄서 묶어 세우다가, 또 나락논에 앉아 깻단을 묶다가 가으내 그렇게 밭으로 논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밭에 심은 고추니, 깨니, 콩이니 이런 것들은 때를 놓치면 안 되는 것들이라서 일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때를 놓치면 꼬투리가 딱딱 벌어져 콩이고 깨고 만질 때마다 밭고랑으로 다 튀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때를 놓쳐 일이 밀리면 다른 것들도 다 늦어지니, 하루라도 편히 쉴 날이 없었다.
온 여름내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달라붙어 풀을 매고 공들여 키워 온 걸, 한 톨이라도 그저 흘릴라치면 아까운 것도 아까운 것이지만 동네 사람들한테 욕 들을까 먼저 걱정했다.
"안즉도 저래 장승겉이 시야(세워) 놨다, 봐라 저어저. 저 아까븐 알곡들을 그저 내삐리고 있노? 죄받구로. 영 몬하겠으면 없는 사람들이라도 털어묵으라 카든가"
어쩌다 때를 놓치고 늦게까지 밭을 지키고 서 있는 콩이니 들깨니 그런 것들을 보면 동네 할매 할배들이 지나가시다가 혀를 쯧쯧 차며 그렇게 나무래곤 했다. 그러다가 깨끗하게 치워 놓은 밭머리를 지나거나 깻대를 가지런히 묶어 세워 놓은 앞이라도 지나갈 때는
"아이구, 이기 뉘집 밭이고? 참하기도 해놨재? 갖고 놀고짚기 해놨구마는. 밭설거지를 우예 저래 야물게 했는지, 꼭 공단겉이 해놨네. 이집 미느리 손끝이 우예 저래 야무노?"
하면서 또 그냥 지나치질 않으니 일이 바쁜 가운데도 동네 아지매들은 그렇게 동네 어르신들까지 맘을 써야했다.
끝도 없는 밭일을 마치고 어둑해질 때야 들어오면서도 엄마는 고춧대를 묶어 이고 들어오기도 하고, 고구마 줄을 넝쿨째 확 걷어서 둘둘 묶어 이고 들어왔다. 느긋하게 고구마 밭에 앉아 줄기를 하나하나 딸 시간이 있을 리 없는 엄마는 늘 그렇게 고구마 줄을 넝쿨째 걷어와서 밤이 늦도록 꾸벅꾸벅 졸면서 줄기를 따 모았다. 논일에 밭일에 늦도록 바깥일을 하고 돌아와도 엄마가 할 일은 그렇게 밤늦도록 엄마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침마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언제 일어났는지, 엄마는 밤마다 훑어 모은 히나리 고추를 쪄서 자리에 펴 널고 있거나 고구마 줄기를 가마솥에 쪄서 김이 오르는 솥에서 꺼내고 있었다. 또 어느 틈에 깎아 달았는지 빨랫줄에는 감 꼬챙이가 몇 개나 뱅글뱅글 돌면서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가 출근하시기 무섭게 밭으로 나가서 어두워야 들어오는 엄마는 늘 그렇게 아침이 부옇게 밝아올 때부터 밤이 늦도록 집에서도 일을 해내었다.
'밭 많은 집에 딸 안 치운다.'고 할만큼 밭일은 거진 다 아낙들이 할 일이었다. 봄에 씨를 넣는 일부터 온 여름내 달라붙어 풀을 매고, 다 여물어서 거둬들일 때까지 모두가 아낙네들이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달라붙어야 했다.
그렇게 바쁘고 고된 가을이 되면 우리는 점심 때 엄마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 그때 우리는 학교에서 네째 시간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갔지만 집에서 엄마나 고모가 기다렸다가 밥을 차려주는 날은 거의 없었다.
손에 일이 붙은 김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보면 밥 때를 놓치는 날이 더 많기도 했고, 들밥을 내다 먹는 집에 붙들려서 한 숟가락 얻어먹고 바로 일을 하는 날도 많았기 때문이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큰 농사를 짓는 집은 나락을 벨 때도 일꾼을 하고, 깻단을 묶을 때도 일꾼을 해서 밥을 날라다 먹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그냥 아무데서나 한 숟가락 같이 먹자' 고 논배미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앉히곤 했다.
동생과 나는 썰렁한 정지 부뚜막에 걸터앉아 가마솥에 넣어놓은 밥을 양푼이째 꺼내서 김치를 얹어가며 달게 먹었다. 아침밥을 하고 그때까지도 차갑게 식지 않은 가마솥이라 밥도 그리 차갑지는 않았다. 그렇게 점심을 챙겨먹고 나면 우리는 빈집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학교로 달려갔다. 보리알이 입안에서 떼굴떼굴 따로 굴러다니는 식은 보리밥이라도 든든히 먹고 나올 수 있는 우리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점심으로 삶은 고구마만 먹고 지내는 동무들도 더러 있었다. 시골에서 살아도 농사도 제대로 없는 집은 가을이라 해도 언제나 끼니를 늘려먹어야 했으니.
내 생일날, 아니 점심때까지 내 생일인지도 몰랐지. 그날도 점심을 먹으러 마당을 들어서는데 엄마가 담벼락 밑에 세워둔 깻단을 만지고 있었다. 점심 먹을 시간에, 그런 한낮에 집에 있을 엄마가 아닌데.
"엄마아아"
몇 날만에 보는 것처럼 반갑게 부르며 달려드는데, 엄마는 얼굴을 한 번 들어 보지도 않고 깻단을 하나씩 들어 자리를 바꾸어 놓으면서
"어여 올라가서 밥 묵어라."
정지에서 막내고모도 나왔다.
"오늘은 새 밥 해놨대이. 어서 밥 묵어라."
"인자 밭에 일 다 했어예?"
"다하기는. 벌씨로 일 다 하면 우야라꼬."
일도 다 안 끝났는데 엄마도, 고모도 이래 다 들어와 있노? 멀뚱하게 섰는데
"국 식는다, 어서 올라온나."
고모가 상을 들고 나왔다. 밥그릇이 넘어질 만큼 고봉으로 가득 담은 팥밥을 보는데 입에 침이 가득 고여왔다.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새 밥이다. 고모가 상을 내려놓는데, 이게 보통 상이 아니다. 굵은 멸치 몇 마리와 기름이 동동 뜨는 미역국, 손님 올 때만 가끔 내 놓던 감 장아찌도 송송 썰어놓고, 언제 샀던지 간갈치도 한 토막 노릇하게 구워 놓았다. 김도 몇장 구워 놓았네.
"고무야, 오늘은 아버지도 집에서 드시나?"
"아이다, 니 먼저 묵어라."
"내 묵어라꼬?"
아무래도 아버지 밥상인 것 같은데 내 앞으로 상을 밀어놓고 고모는 숟가락까지 들고 쥐여줄 참이다.
"와아? 내만 묵나?"
"우리는 난재(나중에) 묵으마 된다. 니 먼저 묵고 학교 가라."
"고무야, 오늘 머슨 날이가?"
"머슨 날은. 오늘 니 생일이다."
"내 생일이라꼬?"
내 생일.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생일상을 받았다. 엄마가 그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 일부러 들어와서 새 밥을 해 주다니. 나는 숟가락을 쉬이 들지 못했다.
"딸래미들도 생일을 챙기 줘야 난재 커서 인덕이 있다카네."
엄마는 고모 들으란 듯이 고모를 한번 돌아보며 말했다.
"애기도 인자 생일 채리주께. 진작에 들었으마 봄에 애기 생일부터 채리줄낀데. 애기도 같이 묵어라."
엄마는 고모한테 미안했던지 고모 밥과 국을 떠오겠다면서 정지로 들어갔다.
"아이다, 나는 난재 언니하고 같이 묵으께."
"고무야, 같이 묵자. 이거 너무 많다. 고무야 밥은 안 가아 와도 되겠다. 숟가락만 있으면 되겠다. 엄마도 오이소."
"생일밥그륵은 갈라묵는 기 아이다 카더라. 한 그륵 다 니가 묵어라."
"이거를 우예 다 묵노? 반도 못 묵겠다."
"생일밥은 때를 이야(끼니를 이어서) 묵어야 밍도 질고(명도 길고) 살림 늘려가미 산단다. 난재 저녁에도 묵고 낼 아침에도 묵어라."
"그라마 호선이 오면 묵으께예."
"막내이는 벌써 묵고 내뺐다."
"고무야, 같이 묵자아. 내 혼자 몬 묵겠다."
혼자서 이 많은 밥을 다 못 먹겠는 것이 아니라, 왠지 숟가락이 쉬이 가지 않았다.
"아아도 참. 밥을 동무해서 묵나? 고마 묵으면 되지."
고모가 밥그릇을 들고 앉는데 내 밥하고는 많이 다르다. 팥이 드문드문 얹히긴 했지만 여전히 보리쌀이 훨씬 더 많은 보리밥이다.
"고무야, 이거 갈라묵고 그거 난재 내하고 또 묵자."
"아이다, 나는 콩밥 묵으마 속이 따가바서(따가워서) 파이다."
"나는 맛있던데."
옆에서 엄마가 웃는 얼굴인지 미안한 얼굴인지 모를 웃음을 머금고 앉아 간갈치 토막에 붙은 재를 털고 살을 발라 얹어주었다. 가을볕이 따뜻하게 퍼지는 마루 끝에 앉아 엄마가 올려주는 반찬을 받아먹다가 까딱하면 눈물을 짜낼 뻔했다. 눈에 그렁그렁 고이려는 눈물을 들킬까 고개를 폭 숙이고 밥만 폭폭 떠먹고 있는데 이번엔 목에 걸려 잘 내려가지 않는다. 고모도 말없이 밥만 먹고 있다. 엄마도 아무말 없이 갈치살을 바르다가 잿불에 타서 바삭바삭거리는 지느러미를 입에 넣었다. 아무 말없이 밥만 먹으려니 도저히 밥이 넘어가질 않고 목이 자꾸 매인다.
"엄마, 인덕이 뭔데예?"
"인덕?"
"아까 생일밥을 잘 챙기주면 인덕이 있다캤잖아예."
"그래, 그렇다카데."
"사람 덕을 마이 본다는 말이가?"
같이 밥을 먹던 막내 고모가 말했다.
"그것도 맞기는 맞다."
엄마는 조금 있다가 다시 말을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핸 만치 본치가 있으마 된다. 이짝이 생각해 주는 거 만치 저짝도 내를 서운키 안하고, 쪼께이라도 이짝을 생각해주먼. 그런 기 인덕있는 거 아이겠나?"
엄마는 갈치 뜯어주던 손가락을 쭈욱 한번 빨고
"아가, 내는 밭에 나가보께. 애기는 인자 나오지 말고 집에 있다가 저녁이나 일찍 해 묵자."
하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밭에 갈 채비를 하는 엄마 뒷모습을 보면서 자꾸 엄마 말이 걸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핸 만치 본치가 있으마 된다."
남들보다 힘든 일들이 유난히 많아서 앉으면 늘 걱정을 하게 하는 시집간 고모들, 장가를 갔는데도 별 일자리가 없는 삼촌과 교도소에 있는 학이아재 생각이 났다. 그리고 한 번씩 친정엘 오면 꼭 애맨 소리를 해서 엄마 속을 아프게 해 놓고 가는 종고모들과 '아이고 도도한 우리 참산 질부' 하면서 칭찬인지 나무라는 것인지 모르게 엄마를 부르는 종조 할매들이 한꺼번에 생각이 났다. 어린 나이지만 그 말이 꼭 고되고 힘겹게 살아온 엄마의 깊은 한숨으로 들렸다.
밭으로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무겁기는 했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생일밥을 먹던 때를 잊지 못한다. 지금도 누군가 옆에서 생일이야기를 하면, 옛날 우리집 마루와 늘 일에 파묻혀 있던 엄마와 그 옆에는 함께 웃고 있는 우리 막내 고모 모습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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