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 저집에서 밀가마를 실어내 오고, 대소쿠리를 도랑물에 담가놓고 밀을 퍼부어 씻으면 도랑가는 잔치집 안마당같다.
"아따 그 집 밀 좋네. 참 실하데이!"
"형님은 국시를 그 마이나 합니꺼? 식구도 안 많은데."
"우리야 싸주는 데가 안많나. 집에 식구야 얼매나 묵어서"
"그래, 싸 나가는 기 축이 많이 난데이."
"아이구 야야, 밀 다 넘는다. 소쿠리 쪼매 들고 해라."
"아이구 안되겠다. 너거는 저리 올라가서 저어 저 달구새기나 좀 쫓아라. 밀 덕석 다 까래비 낸다."
모내기 끝날 때까지 고요하던 도랑가가 시끌벅적해지면서 아지매들이나 할매들이 도랑가로 이렇게 다 나오니 우리 아이들도 무슨 잔치나 열리는 것처럼 신나고 재밌다. 도랑을 따라 큰길에 덕석이 쭉 깔리고, 깨끗이 씻은 밀을 펴 말리면 길가가 바알갛다. 우리는 이 덕석, 저 덕석을 다니며 닭도 쫓고 고루 마르도록 당그래를 들고 다니며 한번씩 뒤섞어 주기도 하며 온종일 거기서 살았다.
밀덕석을 지키는 일이야 심심하고 지겨운 일이지만 도랑가를 오르락 내리락거리며 아지매들이 까르륵거리며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참 재미있었다. 어쩐지 아이들이 들으면 부끄러울 것 같은 이야기라 안듣는 척 하지만 멀찌감치서 한쪽 귀를 쫑긋 세우고 주워듣는 그런 이야기들이 재미가 있었다.
"너거는 새 살림에 뭔 국시를 그래 많이 하노?"
"저 집이는 신랑이 국시를 그래 좋아한다네."
"국시 묵고도 그래 힘이 좋나?"
"아이구 국시 그거는 묵을 때 뿐이지. 돌아서면 배가 고파지는데 힘은 무슨 힘."
"신랑 힘이 좋으이 새댁이 맨날 저래 빵실빵실하다 아이가."
"아이구, 형님은 무슨."
점호 아제집 새댁이 얼굴이 빨개지면 도랑가가 또 한번 까르륵거리고 넘어간다.
"아이고, 그라마 우리 영감도 맨날 국시나 믹이보까?"
"아무나 국시묵고 힘 쓸라꼬예? 그것도 이 짝이 좋아야 힘을 쓰고 싶지."
"저넘으 여편네 봐라. 그라마 내 인물이 빠져서 우리 영감이 힘 못쓴다말이가?"
"모르지, 그거야. 그 집 영감만 알재."
"아이고, 밤일이야 인물 갖고는 모르지. 그라머. 아무도 모르지."
"하기는. 저어저 숭실띠기 아랫방에 후만이 각시봐라. 그기 인물이가? 그래도 싸나 몇놈을 후려잡고 사노? 인물이야 어데 내놓을 인물이가 어데. 그 각시야 밤일 하나로 산다 안카나."
무슨 말들인지 알아듣을 것 같기도 하고 못알아듣기도 했지만 그 언저리를 돌면서 귀동냥을 하는 재미에 우리는 아지매들이 시끌벅적한 곳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밀덕석을 지키다 씻어논 밀을 한 입 넣고 꼭꼭 씹어서 껌을 만들면서 쨍쨍 내리쬐는 볕이 더운 줄도 몰랐다.
그 때는 밀만 보면 입 안 가득 밀을 넣고 씹다가 밀기울이 고이면 여러번 뱉어내면서 껍을 만들었다. 입안에 고이는 밀기울을 뱉어내고 뱉어내다 보면 어느새 하얀 검이 되어있었다. 나중에 커서야 그것이 밀가루에 탄수화물이란 것과 입안의 침이 섞여서 그렇게 된다는 걸 알았지만, 그 때는 밀을 씹어서 껌이 되는 것이 참 희안했다. 그런데 그 밀껌은 입을 잠시라도 놀리면 안되었다. 쉬지않고 씹어야 쫄깃거리는 껌이 되지, 이야기라도 한다고 씹는 걸 잠시라도 쉬면 그만 흐물흐물 풀려서 아기들 암죽같이 되어서 목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망치고 나면 다시 밀을 한웅쿰 쓸어넣고 껌을 만들곤 했다.
그렇게 집집이 밀을 씻어말리고 나면 장마가 오기 전에 국수를 뽑는다. 먼저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방앗간에서 음력날짜며, 밤하늘에 달을 보면서 손가락을 짚어가며 국수 뽑는 날을 정했다. 국수를 말리는데 비라도 오면 큰 일이었다. 또 며칠 내리 볕이 좋을 때 국수를 말리고 갈무리를 해 넣어야 곰팡내도 나지 않고 꺼내 먹을 때마다 까실까실 잘 마른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해마다 날을 잘 잡아 국수를 뽑는 것도 큰 일이었다.
그렇게 국수뽑는 날이 되면 아침부터 분주하다. 엄마는 물에 적셔놓은 짚을 곱게 추려서 한 웅큼 묶어두고, 모아두었던 돌가루 종이도 알맞게 잘라서 국수 쌀 준비를 했다.
새벽부터 방앗간에는 밀가루를 빻느라 요란하게 기계가 돌아가고, 방앗간 집 둘째 아들 차근 아제가 물을 길어다 소금을 바가지로 퍼서 녹였다. 나중에 그집 아지매가 나와서 간을 보았다. 간 맞추는 것이 잴 중요하다 했다. 아지매가 뭐라뭐하면서 소금을 더 집어넣든가 물을 더 퍼넣으면서 간이 다 맞추어지면 먼저 온 집 밀가루를 반죽했다. 반죽을 잘 해야 국수가 쫀득쫀득하게 면발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국수 반죽은 아무나 하지 않았다. 국수 반죽이 다 되어 국수 가락을 뽑는 기계에 닦아 넣고나서 여러번 아래로 뽑아 내는데 참 희안했다. 우리들은 그 옆에서 넓적하게 나오는 반죽을 한쪽 떼어먹느라 손을 찰싹찰싹 맞아 가면서도 여기 저기서 손을 쑥쑥 내밀었다.
"생가리 마이 묵고 배알이할라꼬 그라나 저리 안가나 고마."
"절마들 저래 쌓다가 손가락 딸리들어간대이. 아아들 저리 쫓아라."
기계소리 때문에 다들 목소리는 있는대로 높이지만 그렇게 짜증을 내거나 야단을 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이들도 그런 어른들을 아니까 손을 한 대씩 맞아도 그저 손을 불쑥불쑥 내밀어 한쪽씩 떼어 달아나곤했다. 짭조름한 밀가루 반죽이 어쩌면 그렇게 맛있던지.
그렇게 몇 번을 더 넣어서 국수 가락을 뽑아내었다. 난 그 때 커서 국수 뽑는 기술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얀 국수를 길다랗게 뽑아서 어른 팔뚝길이만한 꼬챙이에 착 받아서 자르는데 그 솜씨에 나는 늘 놀랬다. 방앗간 바깥 마당에 국수 꼬챙이를 착착 갖다 너는데 어쩌면 그렇게 길이가 고르든지.
굳이 자기 국수를 지키지 않아도 어데서 어데까지인지 모를리도 없건만 우리는 국수가 다 마를 때까지 그 마당을 떠나지 않았다. 어른들이 누구네 집꺼 몇 꼬챙이, 누구네는 몇 꼬챙이라 다 세어놓았건만 우리는 늘 '우리 국수' 곁을 지키고 놀았다. 아침부터 그렇게 분주하면서도 시끌벅적한 마당이 우리한테는 좋은 놀이터였다. 점심 때 방앗간집 며느리가 미꾸래이 국에다 국수를 한그릇씩 말아 주었는데 그걸 얻어먹는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어른들만 한그릇씩 주었는데, 엄마들이 아이들을 옆에 두고 그저 먹을 수가 있겠나. 엄마 옆에서 한 젓가락씩 받아먹다가
"자아. 인자 니 다묵어라."하고 그릇째 넘겨 주면 남은 국물까지 싹 비우던 그 때 그 국수맛이 일품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엄마는 배가 고팠을 텐데 나중에 생각하면 엄마는 몇 젓가락 먹지도 못했던 것 같다.
점심도 그렇게 떼우고 국수 뽑는 일이 끝이나면 이제 국수가 바싹 마를 때까지 한참은 마당이 고요했다. 나는 우리 국수발 아래 신문지를 깔고 누웠는 걸 좋아했다. 하얀 국수발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거며, 촘촘하게 고르게 드리워진 하얀 국수발 너머로 보이는 하늘빛도 참 고왔다. 파랗게 팔락거리는 감나무 잎도 하얀 국수발 사이로 볼 때는 또 새로웠다. 옆에 따라 누운 동생 얼굴에 실오라기 같은 그림자가 촘촘히 드리운 것도 재미있었다. 잠깐 누웠다가 바닥을 보면 어쩌다 끊어진 국수발이 쪼르륵 흘러내려 동그랗게 또아리처럼 말려 있었다. 그것들을 주워다 신문지 한쪽에다 펴서 말리기도 하고, 고걸 한가락씩 입안에 넣고 씹으면서 눈을 감고 누우면 그 조용한 시간이 참 좋았다. 하얀 너울을 드리운 신부가 된 것 같기도 하고, 하얗게 펼쳐진 꿈길을 거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간이 잠깐 지나면 다시 국수 마당은 시끄러워진다. 이제 해가 지기 전에 국수를 썰어 갈무리를 해야 눅눅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방앗간집 아제와 아지매의 기막힌 실력이 또 나왔다. 아지매가 곱게 추려놓은 짚을 한오라기씩 척척척 놓고 길쭉하게 잘라다 놓은 돌가루 종이를 그 위에다 착착 놓는데 정말 손이 귀신같이 빨랐다. 아제가 국수 꼬챙이를 대강 슬슬 걷어다 판 위에다 처억 갖다 놓은 것 같은데 어쩌면 국수 다발이 그렇게 고른지. 거기다 종이를 위로 걷어올리면서 짚오라기를 뺑 틀어묶는데 그 또한 어찌나 빠르고 단단하게 묶던지. 아제가 크고 넓적한 칼을 올려놓고 한번 쓰륵하고 힘을 주면 국수 다발이 하나씩 생겼는데 두 분의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그걸보고 집에서 흉내도 내보고 짚으로 빨리 묶는 걸 따라해보느라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도 커서 국수 기술자가 되어서 국수집 한다고 했다가 오빠들한테 쥐어박히고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 국수를 하는 철이면 나는 또 그렇게 국수 기술자가 된다고 그랬다.
국수를 다해서 소쿠리에, 더러는 포대에 차곡차곡 담아 집으로 이다 날랐다. 머리마다 무겁게 국수를 이고 가는 어른들 얼굴은 조심스러웠지만 가을 추수를 했을 때 만큼이나 푸근하고 넉넉해 보였다. 국수를 마른 독에다 차곡차곡 넣고, 엄마는 두세 다발씩 심부름을 보냈다. 자식도 없이 혼자 어렵게 사는 앞집 청도할매는 이웃에서 그렇게 보내주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청석골 함목할매댁에도 두어다발 갖다 드렸다. 머리카락이 귀 뒤에만 몇 올 남아서 하얗게 센 함목할배가 문만 열고 내다보면서
"벌씨로 국시할 때가?"
"에에. 햇끼라꼬 할배 한 그릇 드시보라꼬예."
"그래, 니가 누고?"
"......"
"저 영감쟁이. 올 때마다 묻는다아이가. 기팔띠기 손녀 아이가."
갈 때마다 니가 누고? 하고 묻는 할배지만 나는 어쩐지 그 댁에 심부름 가는 것이 참 좋았다. 할배, 할매만 사시는 집이지만 그 댁은 어쩐지 참 따뜻했다. 큰 바위가 비스듬하게 언덕을 이루고 그 언저리를 따라 어렵게 올라다니는 길이었지만 그 댁에 제삿밥을 이고 가는 것이나, 국수 심부름을 가는 것이 힘이 들지가 않았다. 볼 때마다
"아이구 참산띠기 양님딸. 어데서 이런기 늦게 하나 나왔던공?"
"지 오매를 닮아서 이래 손끝도 야물지."
"나이도 어린 기 얼매나 엽렵한지." 하고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주시던 함목 할매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서너집을 돌고 나면 국수 한포대는 금방 쑤욱 내려갔다.
마른 독에 가득 채워놓은 국수는 여름을 나고 다음해까지 이어 먹었다. 우리들이야 국수가 질린다고 타박도 하고 어깃장도 놓아보지만 엄마는 정말 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국수를 드셨다. 한 끼라도 쌀을 늘려먹어야하는 사정을 모르던 나는 그저 엄마가 국수를 참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중학생이 되고 좀 커서야 엄마가 한 끼라도 늘려먹겠다고 그 긴 여름 한나절을 국수로 떼우신다는 걸 알았다.
땅거미가 지고 어둑할 때까지 밭을 매고 들어오셔서도 말로야
"밥이 어중간해서." "이래 될 때는 국시가 더 잘 넘어가서." 그러시면서 장물만 한 술 풀어넣고 신김치를 올려가며 국수 한 그릇을 치우셨다. 식구들 밥을 다 챙겨주고 나니 내 먹겠다고 또 밥을 못하고 그냥 국수 한 그릇으로 넘기셨다는 걸 그때는 생각도 못했다.
내가 차츰 크면서 우리가 먹기 싫다 남긴 국수가 하룻밤을 자면서 어찌나 퍼졌던지 젓가락으로 도저히 집을 수가 없어 숟가락으로 겨우 떠 넣으시는 걸 보면서, 식구들이 말아먹다 남은 국수가 쉬어버린 걸 찬물에 한 번 더 헹궈서 또 말아드시는 것을 한 번 두 번 보면서 난 차츰 엄마앞에서 국수 맛없단 말을 하지 못했다. 엄마는 그냥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면서 엄마 앞에서 난 참 많이 부끄러웠다. 가끔 밥맛 없다고 타박이라도 하면 "누가 밥을 맛으로 묵나?"하시던 말씀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시집을 와서 내 손으로 살림을 하면서 가끔 국수를 끓여 먹을 때가 있다. 아이들이 잘 먹으라고 가지가지 고명을 만들어 올려주다 울컥 눈물이 치솟을 때가 있다. 부뚜막에 앉은 채로 장물만 한 숟가락 타서 국수를 말아드시던 엄마가 눈에 밟혀서 차마 그 요란한 고명을 다 올리지 못하고 그냥 먹인다. 하룻밤을 재운 국수만큼 맛없는 것도 없을 거다. 정말 푹 퍼져서 밀가루 냄새까지 나는 그 퍼진 국수를, 국수 한다발 몇 푼한다고 그러면서 버릴려다가, 쉬어빠진 국수를 찬물에 헹궈내고 다시 드시던 엄마가 떠 오르면 정말 나는 죄를 받아도 천벌을 받을 거란 생각이 들어 엄마한테 죄송하다.
친정엘 가면 엄마는 가끔씩 "야야, 오늘은 국수 한번 해봐라."하신다. 나는 정말 있는 솜씨 없는 솜씨를 다 부려서 맛있는 별미국수를 대접하고 싶어 애를 쓰다가는 결국은 뜻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국수'를 해 드리고 만다. 그러면서 이번에 집에 가면 요리책을 보든지 누구한테라도 배우든지 꼭 맛있는 별미 국수를 하나 배워야지 하고 마음만 먹는다.
그렇다. 나는 정말 엄마가 그저 끼니 한끼를 이어먹는 그런 국수가 아니라 정말로 맛이 있어서, 맛나게 한 그릇 후루룩 드시는 그런 국수를 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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