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재불 야야 이야기

내 맘속에 피는 봄꽃들 1 <무꽃과 사월 무시>

야야선미 2002. 3. 6. 12:47

아이들이(좀 큰 아이들) 봄 이야기 하나 하라고 해서 해 주고는 여기다 옮겼는데, 너무 빽빽해서 읽기가 힘들겠네요.

죄송합니다. 안 읽어도 됩니다.

내 맘속에 피는 봄꽃들 1 <무꽃과 사월 무시>

벌써 봄이지? 내가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선생이 되어서 너거들 같은 아이들하고 만나면서부터야 봄! 하면 늘 새로 만나게 될 아이들을 떠올리지. 그렇지만 그보다 젤 먼저 봄! 하면 떠오르는 건, 겨우내 묻어두었다 꺼낸 무야. 그것도 노란 새순이 나있는 짧고 통통한 무.
가실을 끝내고 나면 우리 동네 어른들은 볕이 잘 드는 마당 한 켠에 무를 두둑하게 묻어두었어. 구덩이를 커다랗게 파고 짚단을 빙 둘러 깔아놓고는 무를 차곡차곡 쌓았지. 아니 차곡차곡 세웠다고 해야할까? 무를 한쪽에서부터 차곡차곡 세우면서 한 층을 놓고 그 위에다 짚단을 풀어서 한 켜 깔고 흙을 뿌려. 그 위에다 또 무를 하나하나 세우면서 한 층을 쌓아 올리지. 그렇게 구덩이가 찰 때까지 쌓아서 위에다 흙을 넉넉하게 덮고 헌 가마떼기를 깔아.  마지막으로 흙을 푹 덮고는 바람이 못 들어가게 꼭꼭 밟아 잘 묻어 두었어. 그렇게 정성 들여 묻어 논 무를 겨우내 하나씩 꺼내 먹었거든.
송송송 채를 곱게 썰어서 무생채를 해서 밥을 비벼 먹으면 달큰하고 시원한 맛이 그만이야. 어떤 때는 쌀은 조금 넣고 보리쌀과 무채를 섞어서 밥을 해서 양식을 늘려 먹기도 했어. 우리 엄마랑 고모가 가끔 무를 한 소쿠리 씻어다가 밤이 이슥해질 때가지 무채를 썰었어. 우리는 그 옆에서 무 대가리, 그러니까 무청이 달린 파릇한 데 있지? 그걸 달래서 아삭아삭 베어먹어. 그게 달큰한 것이 맛이 있어. 머리맡에서 나는 도마소리에 소곤소곤 이야기 소리에 잠이 오지 않겠지? 하나 더, 하나 더 그러면서 우리도 눈이 따가운 걸 참으면서 늦은 밤까지 같이 놀아. 가끔 엄마가 "생무시 마이 무면(생 무 많이 먹으면) 속 따갑데이" 해도 손은 어느새 낼름낼름 도마 위로 나가지 뭐. 엄마가 손등을 탁 치면 슬며시 당겼다가 또 슬그머니 무를 집어다 먹어. 그러다가 타닥타닥 날래게 움직이는 칼을 피하면서 손을 싹 밀어 넣는데, "손 비인다!" 엄마가 외마디 소리를 쳐. 방안 식구들이 깜짝 놀랐지. 놀란 엄마가 넓적한 손바닥으로 등짝을 세게 쳐. 그렇게 등짝을 맞고는 입을 쑥 내밀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가 또 엄마 옆으로 슬며시 파고들지.
그렇게 밤이 이슥하도록 썬 무채는 무나불을 볶아먹기도 하고 넓적한 대소쿠리에 펴놓고 꾸덕하게 말리면서 밥에 넣어먹었어. 큰 솥에다 참기름을 조금 두르고 한 솥 볶아. 무나물을 건건하게(조금 싱겁게) 볶아 놓으면 달큰한 것이 먹기가 참 좋아. 시원한 장독간에 내다 두고 며칠씩 먹는데 얼음같이 차가우면 또 차가운 대로 맛이 있었어. 밥을 짠 반찬 먹듯이 조금 떠 넣고 건건한 무나물은 입안 가득 밥처럼 넣고 먹던 우리 엄마 생각이 나네. 아이고 엄마 말하니까 또 갑자기 눈물이 삐죽 나올라하네.
그때 해먹은 무 반찬 중에 우리 식구들이 맛나게 먹었던 게 또 있어. 파릇하게 말려 논 무 시래기를 푹 삶아서 비닐같이 하얀 줄기 껍질을 까. 거기다 무를 채 썰어 넣고 된장에다 조물조물 무친 시래기 나물. 엄마는 시래기 나물을 무치면 어른들 상에 한 접시 덜어 놓고 그 나물 무친 양푼에 그대로 밥을 떠 넣어서 비볐어. 그게 얼마나 맛있던지 엄마가 비비기 무섭게 우르르 달라 들어 달달 긁어먹곤 했어. 지금도 입에서 침이 사르르 도네. 요즘도 난 그 시래기 나물을 잘 해 먹어. 아직도 여전히 맛이 좋아.
아이구, 무 더미 이야기하다가 무 반찬 이야기로 빠졌네. 우린 그 무 더미 위에 올라가서 잘 놀았어. 아침부터 해가 넘어갈 때까지 온종일 해가 드는 자리니까 늘 따뜻했거든. 오르기 내리기 놀이도 하고, 묏등 놀이도 하고, 아아 또 있어 신발 숨기기 놀이를 할 때면 무 더미는 신발을 숨겨놓기에 딱 좋은 곳이었어.
봄이 가까워오면 두둑하던 무 더미는 점점 꺼져서 나중엔 마당하고 같이 평평해져. 첨엔 구멍을 막아놓은 짚단만 뽑아내고 팔을 넣으면 커다란 무가 손에 만져졌거든. 그런데 겨우내 하나씩 하나씩 꺼내 먹다보니 어깨죽지까지 다 밀어 넣어야 겨우 손가락 끝에 무가 걸리기만 해. 그때쯤이면 우리 어린 아이들은 무를 꺼낼 수가 없어. 한번은 나도 엄마한테 무 하나 꺼내 드리고 칭찬을 듣고싶은 욕심이 생겨. 그래서 어른들 안 보는 틈에 혼자서 팔을 밀어 넣었는데 아무리 손을 휘저어 보아도 무가 잡히지 않아. 팔을 점점 더 깊숙이 밀어 넣는데 나중에는 어깨, 목까지 끌려 들어가 거꾸로 끌어 박혀 버린 거야. 아무리 발을 휘휘 내 저어봐도 땅바닥이 닿지를 않아. 그런데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몸통은 점점 안으로 빠져 들어가. 나중엔 몸통이 반도 넘게 거꾸로 박혀서 컴컴한 무 더미 안에 박혀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엄마가 달려와서 빼내 주지 않았으면 아주 고생께나 했을 거야.
어른들이 팔을 밀어 넣어도 무가 잡히지 않을 때쯤, 그러니까 봄이 오면 이제 무 더미를 헐어. 우리들이 올라가 노는 바람에 흙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처음에는 좀 힘들게 삽으로 파내야 해. 안에 덮어놓은 가마떼기를 벗기고, 흙을 살살 파내.
구석구석에 그 때까지 끌려나오지 않고 살아남은 무들이 하얗게 얼굴을 내밀지. 그런 무에는 꼭 무 꼬리에서부터 몸통까지 하얀 실뿌리가 가느다란 거미줄처럼 엉겨 붙어 있었어. 안개가 무를 감싸고 있는 것 같기도 했어. 아아 지금 생각하니까 솜사탕 만들 때, 너거들 옆에서 본 적 있지? 솜사탕 기계를 빙빙 돌리면 솜사탕이 생기면서 나무젓가락에 엉겨 붙잖아? 그 때 처음에 안개처럼 피어나는 그 모습이야. 그때는 내가 솜사탕을 본 적이 없었으니 그 생각은 못했네. 난 그걸 얼른 손을 내밀어 만지기가 아까웠단다. 신비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손으로 만지면 그 실같은 것이 그것이 내 손바닥에서 뭉개져 버릴 걸 생각하니까 손이 앞으로 선뜻 나가질 않는 거야.
그 중에서도 정말 내 눈을 부시게 한 건 노오란 무 새순이야. 밭에서 보는 검푸르고 빡빡한 무청이 아니야. 까실까실한 털이 붙어서 팔을 따갑게 하던 그런 무청이 아니라 보드랍고 야들야들한 노란 새순 말이야. 난 어릴 때부터 그 노란 새순이 참 좋았어.
엄마가 반찬 한다고 무를 정지로 들고 들어가면 뒤쫓아가서 언제나 그 무 대가리를 얻어 나와. 물론 새순을 다치게 자르면 절대 안 돼. 접시에 자작하게 물을 떠놓고 노란 새순이 달린 무 대가리를 담아 두는 거야. 볕이 잘 드는 마루 끝에다 두고 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져. 하루하루 볕을 쬐면서 무순은 점점 연둣빛이 되었다가 짙푸른 색이 되겠지? 힘도 제법 빡빡하게 올라. 가운데서 꽃대가 나기 시작하면 이젠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 봐. 조그맣게 잘라서 접시에 담아둔 무순. 거기서. 그 조그만 데서. 빳빳한 꽃대가 쑥 나와서 연보랏빛 꽃을 피울 때면 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내가 어렸을 때, 그 시골에서 어디 화분이라고 집에서 키우기나 했겠니? 그때 내가 온 정성을 들여서 꽃을 피운 것, 그게 바로 그 무꽃이거든. 아주 연한 보랏빛 무꽃 말야. 내가 어른이 되어 살림을 하는 지금도 나는 무 반찬을 할 때면 무 대가리는 잘라서 접시에 담아두고 길러.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금도 우리 집 부엌 창가에는 무 꽃대가 쑥 올라와서 봉오리를 올망졸망 달고 있단다. 아마 내일쯤이면 고운 무꽃이 수줍은 듯이 피어날 거야.
봄 이야기에, 무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 엄마 말이 생각나네. 그런데 말야. 이렇게 예쁜 무순이 자라기 시작하면 무는 바람이 들어서 맛이 없어지거든. 무채나물을 볶아놓아도 싱겁고, 생채를 해 놓아도 나무토막을 씹는 것처럼 뻣뻣하고 물기라고는 없어. 꺽꺽 씹히는 것이 정말 아무 '맛대가리'도 없는 거야. 씹을 때마다 물이 찰방찰방 나와야 시원한 생채 맛이 나지. 볶아놓으면 달큰한 맛이 나야 무채나물이지. 이걸 해 놓아도 저걸 해놓아도 봄 무는 싱겁기만 해. 그래서 그런 말이 나왔을까. 우리 엄마는 오빠들이 가끔 웃기는 소릴 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그래. "사월 무시겉이 싱겁기는!"
사월 무시. 참 싱겁고 맛이 없는 것이 싹 나고 바람든 봄 무야. 그때가 사월쯤이었던지 사월무시라고 그러시데. 그렇게 무가 싱거워지면 버릴 수는 없고, 그때부터는 우리 식구들이랑 소랑 나눠 먹어. 소죽에다 무를 어슷어슷 삐져 넣어서 끓여. 겨우내 마른 짚여물 죽만 먹었으니 겨우내 잊고 있었던 채소 맛을 소도 제대로 아는 건지, 소는 잘도 먹어 줘. 아주 여물통을 싹싹 핥아먹어. 한참 맛나게 먹어대고는 되새김질까지 해대거든. 참 글마들은 사월 무시도 안 싱겁은 갑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