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몸이 그렇게 실한 편은 아니지만 어릴 때 난 참 병치레를 많이 했다. 그 가운데 가려움증은 참 견디기 어려운 병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만 나면 어떻게나 가렵던지. 밤잠을 제대로 못 자고 긁어 놓으면 온몸 여기저기 손톱자국이 안 난 데가 없었다.
발라놓으면 마르면서 부옇게 가루가 생기는 물약이 있었는데 그걸 바를 때는 정말 팔딱팔딱 뛰었다. 맨날 피가 나도록 박박 긁어 놓은 데다 손톱독까지 올라서 벌겋게 성이 나 있었는데 무슨 약인지 그 약을 바르면 따갑고 아려서 얼마나 팔딱거렸는지. 밤이 되어 약을 바를 때는 고모하고 엄마가 딱 달라붙었다.
먼저 옷을 벗겨 놓고는 고모가 내 두 손을 딱 잡으면 나는 겁에 질려서 엄마의 손끝만 본다. 약솔이 어딜 먼저 가는지 눈은 뗄 수가 없다. 엄마 손이 등뒤로 가는 듯하면 벌써 등짝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차라리 눈을 감자. 그러면 엄마는 약솔을 든 채 왜 그렇게 씨루고만 있는지. 차라리 빨리 바르지,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몸에 조그만 약솔이 닿으면 아주 잠깐 차가운 듯 하다가 금방 화닥거리고 따갑다. 엄마 손을 떼내려 밀어내고 울고불고, 엄마는 끝까지 있는 힘을 다해 바르고, 고모는 옆에서 그 한 겨울에 부채를 부쳐대고, 그렇게 한바탕 난리가 나야 잠잠해 졌다.
어느 날은 조그만 것이 어떻게 그런 말을 했던지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이래 따갑은 거 인자 안 바를란다. 고마 근지럽은 대로 근질다가 콱 죽어뿔란다. 그기 더 낫겠다.”하고 패악을 부려 댔다. 갑자기 엄마가 약솔을 들고 있던 손을 멈추는가 싶더니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갈기기 시작했다. “그래 죽어라 죽어, 죽는 기 그래 맘대로 되는 줄 아나. 그기 그래 쉬우면 나는 벌써 죽었다. 니 죽으면 나도 따라 죽으께 죽자 죽어.” “언니 와 그라노. 이기 뭘 안다고 그라노. 언니가 참아라.” 옆에서 부채질을 하던 고모가 한참을 뜯어 말려서 겨우 마음을 잡은 엄마는 또 약을 발랐다.
그렇게 패악을 부리다가 기운이 빠져서 드러누우면 엄마가 부채를 들고 잠이 들 때까지 부채질을 해 주었다. 겨울을 나고 초여름이 될 때까지 엄마는 그렇게 약을 바르고 고모는 화닥거리는 몸에다 부채질을 해댔다. 가려움증이 시작되면 늘 웃목 문 앞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선선하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곳이 덜 가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우스운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 때 엄마나 고모가 나를 달래던 말이 두어 가지 있다. 따가운 물약을 안 바르려고 떼를 쓰거나 패악을 부리면 엄마는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로 날 달랬다.
“우리 미야, 어서 나아서 빨간 내복 입어 봐야지. 근지럽은 거 다 나으면 젤로 폭딱한 거 사주께.”
그 때 어른이고 아이고 할 거 없이 한참 많이 입던 옷이 있다. 바로 빨간색 엑스란 내복. 고모는 할머니 생신 선물로 빨간 엑스란 내복을 사 오기도 했다. 또 가까운 친척들 예단으로도 엑스란 내복을 사기도 했다. 참 많이들 입었다. 내 동무 중에 하나는 엄마가 장날 그 빨간 내복을 하나 사 주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새 내복을 자랑하고 싶은데 안에다 입었으니 남들이 봐 주겠나. 저녁을 먹고 식구들이 모였는데 이 동무가 왔다. “이 잘 밤에 우얀 일이고? 어여 들어 온나.” 그라고 문을 여는데 내복 바람이다. 저도 쑥스러운지 옆걸음으로 들어오더니 별 이야기도 없이 한참을 웃목에 앉았다. 식구들이 자리를 펴고 불을 꺼라는 둥 마라는둥 해도 꿈쩍을 않고 있다. 어떻게 눈치를 챘던지 엄마가 “아이고 영애 내복 새로 샀네. 빨간 기 참 곱네.” 그랬더니 온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발딱 일어선다. “안녕히 주무시이소.”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나갔다. 지금도 우리 식구들은 영애를 빨간 내복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좋아들 하는 빨간 엑스란 내복을 난 입어 보지 못했다. 목내복을 입어야 빨리 낫고, 덜 간지럽다고 엄마가 절대로 안 사준 것이다. 엄마가 빨간 내복 사준다고 달랠 때쯤이면 좀더 패악을 부리다간 엄마가 울 것 같아서 그냥 못이긴 척 참고 약을 발랐다. 하지만 진짜로 빨간 내복을 입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할머니 내복을 빨아서 개면서 얼굴을 파묻어 보았을 때 얼마나 폭딱하게 기분이 좋았던지.
엄마는 해가 바뀌고 그 물약을 놓아 버렸다. 그 고생을 하고 바르고 나면 그 때는 가려운 데가 꾸덕꾸덕 마르면서 낫는 듯 하다가 사나흘만 안 바르면 언제 나았더냐는 듯 가렵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는 ‘답답은 맘에 묵는 약이 아이고 바르는 기라서 썼더마는 이라다가 독한 약에 아아만 잡겠다.’고 그 약을 놓은 것이다.
엄마는 어딜 가나 사람들을 붙잡고 ‘근지러븐 데 좋은 약이 없냐’고 물었다.
“그런데는 환자약이 젤이다. 저어 저 마흘리 환자촌에 가서 한 옹큼만 사 오면 될끼다. 물이 줄줄 흐르는 빙도 그 약 묵고 낫았다카더라.”
“숭진이 가면 피부병에 용한 약국이 있는데 그 집에서 맨드는 물약이 히안하다 카데.”
그러나 “신약은 속만 베리지 뭐.” “그래 독한 약을 크는 아아들한테 믹이가 우짤라꼬.” 하면서 그런 말은 안 들었다.
그러나 내가 중학교까지 가고 한창 클 때까지 가을이 되어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엄마는 약을 해다 날랐다. 어딜 가서 듣고 오는지 외할머니와 엄마는 해마다 새로운 약을 해 대었다.
“도꼬마리를 푹 삶아서 그 물에다가 아아를 씻기믄 싹 낫는다 카는데”
산골에서 혼자 시시던 외할머니는 낫을 들고 도꼬마릿대를 쪄다 날랐다. 가시가 다닥다닥 달라붙은 도꼬마릿대를 찌느라 부옇게 긁힌 손등이 어린 마음에도 참 미안했다. 가마솥에다 넣고 푹 삶아서 몇 날씩 목욕을 시켜 주시고 떨어질 만하면 또 산에 오르셨다. 나중에 커서 도꼬마리 전설을 읽으면서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나서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얼마나 홀짝거렸던지.
외할머니는 도꼬마릿대를 절대 놓지 못하셨지만 엄마는 또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녔다.“이래 근지러버 쌌는데는 보릿짚 썩은 기 약이라카는데” 그러면 당장에 보리농사가 많은 집을 찾아다니면서 묵은 보릿짚을 바꿔오든지 얻어 왔다. 보릿짚에서 나오는 시커먼 물을 받아서 목욕을 했다. 달리 나무를 할 만한 산이 없는 우리 동네는 보릿짚이 여름을 나는 땔감으로 쓰였다. 장마라도 지면 보릿짚이 썩어 나무로 쓰지 못하니까 집집마다 비를 맞히지 않으려고 잘 쌓아서 덮어두었다. 엄마는 일부러 보릿짚을 썩혀 약을 받는다고 한쪽 귀퉁이를 비를 맞혔다. 그걸로 턱없이 모자라니 늘 이집저집서 얻어다 날랐던 것이다,
이렇게 입소문을 듣고 약을 하기도 했지만 엄마 손을 떠나지 않던 책이 하나 있었다. 엄마 말로 “약책”. ‘내가 너거 맨치로 학교 문 앞에만 가봤으면 하늘에 것도 내라 묵겠다.’던 엄마는 정말로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봤지만 한글은 일찍 깨우쳐서 책을 가끔 읽으셨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지고 계셨던 책이 “약책”이었다. 어느 대학교수가 썼다는데 옛날 어른들이 쓰던 약을 자세히 적어 놓은 것이다. 신약을 좋아하지 않던 엄마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잠들기 전에, 들일이 좀 한가한 때 엉덩이를 잠깐 붙일 틈이라도 있으면 이 책을 펴고 앉았다. 나중에는 거의 외우셔서 누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얼른 그 자리를 착 펴놓고 말을 해 주곤 했다. 그 책은 엄마에게는 의학백과 사전이고 가장 훌륭한 고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엄마가 가장 믿는 것은 옛날 어른들한테 들었던 약인데 마침 이 책에도 적혀 있는 약이다. 원래 내 손으로 만든 것을 젤로 치는 엄마는 ‘어른들에게서도 듣고 이 책에도 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있어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엄마가 믿고 만든 약 중에 내같이 가려움증이 심한 사람에게 딱 맞다는 약이 이 책에도 적혀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두꺼비 찰밥으로 만든 약이었다. 두꺼비 찰밥은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가을에 들국화 산국화가 필 때까지 같이 피었다. 콩알처럼 잔잔한 것이 노랗게 참 앙증스럽게 생긴 꽃인데 꽃은 손가락으로 비비면 찐득찐득해서 두꺼비 찰밥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이 꽃을 훑어다가 엄마가 빚은 막걸리를 품어서 쪘다. 바람이 잘 드는 깨끗한 그늘에다 펴서 잘 마르면 또 막걸리를 품어서 찌고 그렇게 아홉 번을 찌고 말리고 찌고 말렸다.
몇날 며칠을 찌고 말린 이 꽃을 바싹 말려서 이번엔 가루로 만들었다. 아이가 먹을 것이니 고운 체에 내리고 내려서 아주 고운 가루로 만들었다. 불을 땔 때도 아무 나무나 쓰지 않았다. 불땀이 좋아서 제사 때나 큰 일 때만 쓰는 깻대를 가져다 불을 땠다. 약을 만드는데 더러운 것이 붙어 있으면 시커먼 연기가 나서 그슬리는 데다 약에 잡내가 들면 안된다고.
그럴 때 엄마를 보면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보통 때하고는 달라 보였다. 깨끗한 데서 자란 꽃을 훑어다 찌고 말리기를 아홉 번, 방아에 찧어 체에 내리고... 어느 한가지도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 손에서 다 만들어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정성을 쏟아 붓는 모습은 성스럽다는 말로도 모자라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서 약을 만드는 엄마를 생각하면 정말 열심히 먹어서 어서 나아야 했다. 그러나 그 약은 먹기가 얼마나 힘이 들던지. 미숫가루처럼 고소한 맛이라도 있던가 아무 맛도 없는 것이 한 숟가락 입에 털어 넣으면 깔깔한 가루가 목에 턱 달라붙는 것이다. 목에 달라붙어 간질간질한 것이 한참동안이나 잔기침이 나오고 눈물이 고였다. 하도 못 먹어내니까 나중에 엄마는 이 가루에 꿀을 넣고 개어서 조그맣게 알약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공동묘지 귀신도 살아 움직일 만큼 바쁜 가을에 엄마는 낮에 들일로 지친 몸을 잠시 눕지도 못하고 밤늦게까지 그렇게 손가락 끝으로 한 알 두 알 일일이 비벼서 알약을 만들어 먹였다.
어느 약에 나았는지 중학교를 들어가고 언제부턴가 그 피부병이 싹 나았다. 정말 돌팔이 같은 어느 의사 말대로 나을 때가 되어서 나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늘 엄마가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려서 만든 두꺼비 찰밥을 먹고 나았다고 말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다. (200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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