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옆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다가 잠깐 낮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놋재떨이에다 담뱃대를 깡깡깡 두드려대는 소리에
눈을 뜨는데, 내려다 보고 앉았던 할매는 금방 염불아닌 염불을 외어댄다.
"나무우 관쎔 보살. 잠이 보배지 등더리만 붙이마 잠이 들고 눈꺼풀만 붙이마 잠이 들머 얼매나 좋겠노?"
'아이구, 또 저 소리. 내가 우얀다꼬 또 할매 옆에서 낮잠을 잤노.'
선잠을 깨고보니 말동무도 못해 드리고 혼자서 낮잠만 잔 것이 미안한 건 잠깐이고 도리어 할매한테 심술이 끓어 올라
눈을 내리깔고 입을 쑤욱 내밀고 일어나 앉는데, 큰방 벽에 뚫어놓은 창구멍으로 작은방 이야기 소리가 넘어온다.
형광등 하나로 큰방에 작은방에 마루까지 세 방을 한꺼번에 밝힌다고 벽 모서리를 꿰뚫어 놓으니,
이 방 저 방 이야기 소리뿐만 아니라 겨울밤에는 황소바람이 매섭게 드나든다.
'오늘 내 요이불 꾸민다고 했는데 작은집 이듬아지매가 같이 거들어 주나?'
손가락을 세워 머리를 쓱쓱 내려빗으며 창구멍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데 이듬아지매 목소리가 들려온다.
"은산 저어넘(작은 어머니)이 한참 머라 카시더라."
"……"
'또 종조 할매가 뭐라 캤단 말이가?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그래 쌓노?'
"저거 애비 등에 콩이 튀는 줄도 모르고, 미난 가스나꺼정 객지에 내보내 공부시킨다꼬 안 그카시나."
"……"
'뭐시라? 그라마 이번에는 내 공부하러 가는 것 가지고 그란단 말이가? 하이고오, 우리 면내에서는 자랑거리라고
그래 칭찬해쌓더마는 내 없는 데서는 미난 가스나라고 고등학교도 보내지마라 그 말이가?'
"지 오래비들 공부도 다 안 끝나고 주무이(주머니) 열어놓고 살민서, 돈 걱정이 떠날 날 없는 집구석에
딸래미꺼정 방 얻어 공부시키러 보낸다고 안 카시나."
'아아니, 그라면 딸은 공부도 하지 말라는 말이가? 미난 가스나라고? 이래 쪼달리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그 일은 그 일이다 치고 저거들한테 돈 보태달라고 하나? 미난 가스나꺼정 공부시킨다고?'
그런데 엄마는 아무말이 없다.
'형님, 우리는 딸이라고 공부 안시키고 그래는 못합니더. 지가 공부 몬해서 몬 가면 몰라도 저마이 해쌓는데
우예 딸이라고 지 앞길을 막습니꺼? 우리는 딸래미라도 그래 안 키았습니더.'
나는 엄마가 그래 말해 줄줄 알았다. 그러면 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아무 말이 없다.
'엄마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 와 아무 말도 몬하노?'
이 쪽 방에 앉은 내가 더 답답했다. 아니 답답한 것이 아니라 집안 어른들이라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밉고,
갑자기 내가 딸로 태어난 것이 서러웠다. 작은집 아재들이나 아지매들, 종조할매들 모두들 내가 가면 얼매나 이쁘다 해 쌓았노?
"아이구, 엽렵해라."
"우예 저래 연한지. 저거 할매한테 하는 거 쫌 봐라, 연한 배다. 어데 연한 배가 우리 미야만치 연하겠노?"
"야 이넘아, 미야 신 벗어 놓은 데라도 좀 따라 가봐라. 어른들 말을 우예 저래 잘 받드는공. 입에 쌔(혀)겉이 안하나.
입에 쌔보다 낫다, 하모 입에 쌔도 물릴 때가 안 있더나."
"도도한 우리 참산 질부 딸 하나는 얼매나 잘 키아놨는지!"
작은집에 심부름을 가거나 놀러 가면 늘 그래 해서 정말 온 집안 어른들이 다 날 이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뭐? 미난 가스나 공부는 와 시키냐고 그랬단 말이지? 엄마는 와, 아무말도 못하고 있노?'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안하고 듣고만 있던 엄마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엄마 말은 내가 기다리던 그런 말이 아니었다.
"아이구, 형님요. 자슥 이기는 장사 없다꼬, 지가 저래 할라카는데 책을 부수께(아궁이에) 갖다 넣을 수도 없고 우얍니꺼?
암만 미난 가스나라도 지가 저래 명을 띠놓고 시작는데 부모가 져야지 우얍니꺼?"
'아니아니, 저기 무슨 말이고?'
"저거 아바이도 안 캅니꺼. 나가서 광대짓할라카는 것도 아이고, 우리 쬐이는기사 이왕 쬐이는거,
암만 가스나라도 공부할라카는 넘을 우예 막겠노 카네예."
"울미불미 시험이라도 한번 치보자 안 캅니꺼. 차라리 시험 치가 떨어지면 마음 고치묵겠지 싶어서 시험은 치 보라캤더마는
저래 처억 달라붙으이 그거를 우얍니꺼? 도에서 공부 좀 한다카는 아아들은 다 모이가 600명을 뽑는데,
그 중에서도 19등으로 붙었다 카네예. 그 말을 듣고 저기 고마 더 매달립니더."
엄마 말을 들으니 내 속이 더 답답해졌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엄마는 언제 내 공부 못하라 칸 적이 있다고? 엄마는 와 없는 일을 지어내서 저카고 있노?
시험이나 쳐 보라캤다고? 꼭 붙어라꼬 찰밥해 주고, 엿 사묵어라꼬 돈까지 줬으면서.'
큰방 문을 확 열어젖히고 나왔지만 선뜻 작은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문을 열고 나오는 기척을 들었던지 이듬아지매가 작은방 문을 열고 나왔다.
"미야, 자더마는 언제 깼노? 새 살림 채리가 공부하로 가서 좋재? 엄마가 새 이불도 끼미고 있네."
서둘러 축담에 내려서는 이듬아지매한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 전에 처럼 그래 인사가 나오질 않았다.
"머슨 인사가 그래 고개만 까딱하노?"
엄마는 날 한 번 올려다 보며 나무래고는 이불 꿰매는 커다란 바늘을 머리카락에 대고 한번 스윽 문지르더니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이 잡히질 않는지 서너바늘 꿰매다 말고 그냥 척척 접어 구석에 밀어놓고는 일어섰다.
"소죽 낄일 때가 됐나? 여물이 있는강 모르겠다. 보오쌀(보리쌀)도 낄이야 밥을 앉힐끼고……"
엄마 뒤를 따라 정지간으로 들어서면서도 나는 가슴만 답답해 왔다. 일찍 저녁을 먹고 할매 옆에 누우니 잠이 오질 앉는다.
책도 눈에 들어오질 않고, 라디오에 귀를 갖다대고 누웠지만 그렇게 재미있게 듣던 법창야화도 아무 재미가 없다.
방문을 열고 나와 찬장문을 열었다. 나중에 살림 날 때 가져갈 그릇이나 몇 개 챙겨두자. 삼촌 장가갈 때, 고모 시집갈 때나
두어번 쓰고 넣어둔 그릇들이 가지런히 포개져 있다. 물고기 모양으로 생긴 오목한 그릇, 나뭇잎이 두어장 깔끔하게
그려진 접시들이 참 예뻤다. 크고 작은 그릇들을 모양마다 두 개씩 두 개씩 꺼내서 헌 종이를 가져다 한 장씩 깔고 포개놓는데
내다보고 앉았던 할매가 또 시작했다.
"나무우 관쎄엠 보살. 아이구 야야 니가 가믄 나는 인자 우야노? 자다가 오줌은 뉘가 뉘야주고,
너거 엄마 들에 일하로 가고나머 똥은 누가 뉘야주노?"
안 그래도 어지러운 마음에 할매까지 거들어 속이 정말 터질 것 같다. 방문 앞에도 혼자 힘으로 나와 앉지 못하는 할매한테
뭐라 말도 한마디 못하고 혀만 소리나게 "쯧쯧" 차 대면서 그릇만 챙겼다. 오늘은 할매한테 듣기 좋은 말로 달래주기도 싫다.
어린양도 부리기 싫고. 들은 척도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앉았으니 할매 한탄은 더 길게 늘어졌다.
"너거들은 마산도 가고 부산도 가고 가고잡은데 다 가는데, 나는 운제 또 일나서 그래 훠이훠이 댕기보겠노?
아이고 답답은 내 팔자야."
"영감 영감 내 좀 데불고 가소. 아이구 영감, 박광봉이 영감요, 기팔양반 우리 영감아, 미야 저거 없으면 절간 겉은 이 집을 우야능교?"
"미느리 미느리 우리 미느리, 황소겉이 일만하는 우리 미느리, 들일에 밭일에 이 늙은이를 우야겠능교?
이 말이 들리머 고마 오늘 밤에, 자는 잠에 날 좀 데불고 가소. 어이, 이 영감아 구신이라도 있으마 내 말좀 들어주소."
아이구 또, 결국에는 이까지 왔다. 할매 입에서 '박광봉이 영감'까지 나오면 인자 조금 있으면 울고 말텐데.
할매가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입만 크게 벌려 울기 시작하면, 우리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드리다가
팔을 주물러 드리다가 다리를 쭈욱 펴서 눌러 드리다가 어쩔 줄을 몰랐다. 목줄이 빳빳하게 불거지고 이마에 굵은 힘줄이 서고
그렇게 온 힘을 쏟아 울다가는 금방이라도 핏줄이 모두 터져버릴 것 같아서 겁이 더럭 나곤 했다.
할매 한탄이 그렇게 길어지자 엄마가 작은방 문을 열고 나한테로 소리를 질렀다.
"미난 가쓰나 살림나는 기 뭐시 그래 대단타꼬 잠도 안자고 설치노? 고마 안 넣어 놓나?
아무끼나 주는 대로 갖고 갈끼지 잠도 안 자고 챙길 끼 머시 있노? 어서 안 들어가나?"
미난 가쓰나라고? 우리 엄마 같지가 않았다. 그것도 할매가 듣는 데서 저래 있는대로 소리를 지르다니.
휴가 나와있던 작은오빠가 아랫방에서 나와서 엄마를 말렸다.
"아이고, 오매요. 그기 무슨 시근이 있겠능교? 어린 마음에 살림 나가본다꼬 지딴에는 설레는 갑그마는.
고마 머라카소. 이쁜 그륵 챙기는 거 보이 딸래미는 딸래미네. 나는 저기 선머슴아 겉애서 어데 치아묵겠나 싶더마는."
"할매, 작은 손자가 쪼매 있으면 제대한다 아이요. 내 제대하먼 우리 할매 업고 온동네에 훠이훠이 댕기주께.
미야 없어도 쪼매마 참으소. 우리 할매 리아카 티아가 내 저 수산 장에도 갈끼다. 아이다 부산에도 가고 마산에도 가고 구경 다 댕깁시다."
오빠가 나서는 바람에 엄마는 작은방 문을 닫으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고싶은 공부 좀 시키도라꼬 울미불미 그래 씨야싸서, 할 수 없이 보내준다 캤으마 고마 얌전하이 엎디리 있다가
갈 때 되면 살째기 갈끼지. 온 집구석을 들쑤시놓고 식구들 잠도 몬 자구로 지 살림 챙기고 있나 그래."
할매도 담뱃대를 쭈욱 밀어 놋재떨이를 끌어당기며 한마디했다.
"귀경은 머슨 귀경, 넘들한테 중풍든 할마씨 여 있다카고 귀경시키 줄라꼬?"
"미야, 어서 그륵 넣어 놓고 들어가라. 그 그륵 엄마 시집올 때 사온 그륵이라꼬 디기 애끼는 기다.
어떤 거는 엄마 시집와서 부산서 새 살림할 때 하나 둘 사모 은 것도 있고. 엄마가 젤 애끼는 그륵이라서 엄마가 그래 성났는갑다.
고마 잊아뿌고 자라."
작은오빠가 그렇게 다독거려 주었지만 그날 밤에는 정말 잠이 오지 않았다. 할매 옆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엄마가, 우리 엄마가 딸 공부시키는 것 까지 그렇게 온 집안의 눈치를 보면서 시키고 있다는 걸 그 날 처음 알았다.
나는 내가 공부 잘해서 학교에서 칭찬받으면 우리 엄마 힘이 나게 해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남들이 못 가는 좋은 고등학교에 터억 붙으면 그걸로 힘겨운 우리 엄마 얼굴을 좀 펴지게 해주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저 아무 생각 안하고 공부를 했다.
"여자도 지 직장이 실해야 한대이. 여자가 지 일이 번듯하이 있으마 넘들이 시피보지도(깔보지도) 안하고 어데 가도 대접 받고 산다."
"니는 니 일 당당하이 하민서 넘한테 시피보이지 말고 살아라."
"여자 직장으로는 선생이 좋겠더라. 내가 보이 여자직원이라꼬 함부로 안하는 데는 학교가 젤이더라."
"여자 약사도 좋겠더라마는 그래도 선생이 낫겠다. 약사는 지 돈벌이할라카마 지 속을 개리고(속이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할 때도 있을끼다."
엄마가 가끔 이런 말을 하면 속으로 내가 선생이 되면 우리 엄마가 좋아하겠구나 싶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내 공부를 시키면서 그렇게 식구들한테 엄마는 죄짓듯 눈치를 보고 있었다니.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시험을 치기 전에도 막내 고모를 붙잡고 전에 없던 말을 했다.
"미야는 고마 중학교만 졸업 시키고 할매 수발이나 들어라 카고 집에 데리고 있으면 딱 좋겠는데, 저기 공부 욕심이 많아서."
"언니야 머라카노? 아깝지도 안하나? 그래 잘하는 공부를 그냥 썩하면 안된다. 암만 힘들어도 언니야, 미야는 마산여고에 보내야 된다."
"공부가 아깝기는, 애기도 어데 공부가 모지래서 못 갔나 어데?"
"언니야 머라카노? 세월이 다르다 아이가? 우리때는 여자가 중학교만 나와도 마이 핸 기고.
우리 미야는 대학교 꺼정은 나와야 된다. 암말 말고 보내라. 그라다가 아아 가슴에 못 박는다.
영 걱정되면 우리 집 옆에 데리다 놓고 내가 한번썩 챙기주께."
막내 고모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시집갈 때까지 집에서 살림을 거들었다. 엄마는 큰아들은 객지에 내 보내서 더 공부를 시키면서,
아들하고 동갑짜리 시누이는 그냥 눌러 앉힌 것이 늘 마음에 걸려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에 가게 되니
막내 고모한테 제일 먼저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막내 고모가 그렇게 펄쩍 뛰면서
'다시는 그런 말 말고 지 하고 싶은데 꺼정 공부를 시키야 한다'고 말을 해 주자 엄마는 더없이 고마워했다.
다음 날, 엄마는 작은방 구석에 밀쳐 두었던 이불을 끌어당겨 마저 꾸몄다.
솜 펴는 것도 거들고 바늘을 갖다 실을 꿰어 주면서 옆에 앉았는데, 엄마가 그랬다.
"이전에 너거 외할매가 내 시집올 때 이불 끼미민서(꾸미며) 카시더라. 맵다 매운 시집살이 이 오매가 해 준 요이불에
몸 푹 묻고 맘도 풀고 서럼도 달래라꼬."
"자취 하는기 그래 좋은 줄 아나? 탄불 꺼져, 반찬 떨어져 시집 살이보다 덜한 거 하나 없을끼다.
방이 춥으마 요이불이라도 폭딱해야재."
엄마는 내 요이불 한 채를 꾸밀 거라고 헌 이불을 두 채나 뜯었다. 새 솜이 들어가야 따뜻하다고 새로 따 두었던 미영을 이고
가 솜을 타오더니, 헌 이불 솜을 이고 밀양 읍내 솜공장까지 두 번을 더 다녀왔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집안 식구들한테
입에 안 오르내릴라고 얼마나 조심조심 그 먼길을 다녔나 싶으니 가슴이 아파왔다.
고등학교 입학식을 이틀 앞두고 마산으로 살림을 났다. 엄마는 편찮으신 할매를 두고 집을 비우면 안된다고 나만 혼자서 가란다.
요이불에 베개에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서 보따리 하나를 만들었다. 냄비 큰 것 하나 작은 것 하나, 스텐 그릇 두어개,
접시 몇 개, 숟가락 젓가락 두 벌, 된장과 고춧가루 깨소금, 소금 조금씩 싸고 한동안 먹을 쌀을 자루에 조금 담아
보따리를 하나를 더 만드니 그것도 작은 것이 아니다.
하나는 머리에 이고, 하나는 한 손에 들고 집을 나서는데 눈물이 어찌나 그렁거리던지. 큰방 문을 열고 손을 휘휘 내젓는
할매도 잘 안보이고, 뒤따라 나오다가 동네 어구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엄마도 자꾸만 안보였다.
마산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려서는데 같이 자취할 동무 엄마가 내 커다란 보따리 두 개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본다.
"저 우에, 산복도로 우에까지 가야 되는데."
"아까 백산서 수산까지도 잘 갖고 왔는데예. 괜찮습니더. 가입시더."
아저씨 한 분이 리어카를 끌고 와서는 산복도로까지 올라가는데 육백원이란다. 자취방 한 달 월세가 이천 오백원인데.
우리는 그냥 이고 가기로 하고 큰 보따리를 이고 일어서는데 동무 엄마가 또 한마디 하신다.
"엄마가 마이 아푸나?"
대답도 하기 전에 눈물이 쏟아졌다. 선생집 외동딸이라고 들었을테지. 그런데 그 선생집 딸래미가 자취살림이라고 나면서
아무도 없이 지 혼자 보따리 두 개 들고 나선 걸 보면, 엄마가 아파도 얼마나 아프면 이래 혼자 내 보냈겠노 싶었겠지.
한 손으로 머리에 인 보따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 쌀자루까지 한데 묶은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길을 걷는데 눈물이 흘러도
닦을 수도 없다. 길이 흐릿하다가 길바닥이 흔들거리다가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데 눈물은 내 뜻대로 되질 않았다.
"그래, 엄마도 누워 있어도 마음이 얼매나 되겠노? 낼이라도 낫으마 안 오겠나."
동무 엄마는 보따리 하나를 들어 주지 못해 미안해 하면서 앞서서 걸어 갔다. 내가 맨 뒤에 쳐져서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한참을 걷다 보니 목도 아프고 팔도 빠지는 것 같다.
보따리를 몇 번이나 털퍼덕 하고 길바닥에 내려놓고 쉬었더니 나중에는 이불보따리가 추욱 쳐져서 머리에 이면 얼굴까지
푹 덮어서 길을 잘 볼 수도 없다. 그런데 그 이불이 그렇게 얼굴을 가려주어 나중에는 차라리 고마웠다. 이불보따리를 이고
울면서 울면서 가는 모습을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힘들게 자취집을 찾아가 보따리를 내려놓고 나서
한 열흘은 목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무거운 걸 이고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이나 씨름을 했으니 목이 탈이 나도 날 수 밖에.
새로 입학한 고등학교 공부는 중학교 때와 별로 다른 게 없었다. 남학생이 없고 여학생만 있다는 것,
반 동무들이 다들 잘난 척이 대단하다는 것, 그런 것 말고는 특별히 다른 것도 없었다. 뭐 아주 특별한 것이 하나 있다면
우리들 한 달 방세가 이천 오백원인데 그 두 배에 가까운 사천원, 그렇게 큰 돈을 들여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었다. 한 과목에 사천원 한다는 학원을 영어, 수학, 국어, 거기다 레슨비가 몇 만원이나 된다는 피아노,
그런 것까지 다 다니는 아이들이 수두룩한 것이 특별한 일은 특별한 일이었다. 그런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육백원하는 리어카를 마다하고 그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들고 한 시간 가량이나 비탈길을 걸어올라오던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달랐다. 냄비에 쌀 조금 씻어놓고 보글보글 끓여서 해 먹는 냄비밥은 그렇게 구수하고
맛이 있었다. 반찬이 떨어져 간장만 두어 숟가락 넣어 비벼 먹는 때가 많았지만 그것도 꿀맛이었다. 연탄불은 얼마나 잘 꺼지던지.
연탄을 아낀다고 불구멍을 너무 꼭 막아놓아서 불이 채 붙지도 않고 꺼져버리기 일쑤고, 어쩌다 불구멍을 좀 낫게 열어놓은
날은 아예 하얗게 다 타 버려서 언제 불씨가 꺼졌는지 재가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그러나 그렇게 추운 방에서 웅크리고 누웠어도 좋기만 했다. 저녁에, 텔레비전은 커녕 트랜지스터 라디오 하나 없는
고요한 자취방에 배를 깔고 엎드리면 드디어 독립을 했다는 기분, 해방이 되었다는 생각에 날아갈 듯 홀가분했다.
엄마의 무거운 한숨과 할매의 길고 긴 한탄, 누구에겐지 모를 아버지의 원망 그런 것들이 없어진 것 아니,
나한테서 멀리 떨어지게 된 것이 내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날아갈 듯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토요일마다
집에 가는 것도 한번씩 건너 뛰게 되었다. 토요일 일요일에 집에 가지 않고 시내에 나가서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있었다.
쌀이 모자란 듯해도 그냥 조금씩 아껴먹으며 한 주일을 버티곤 했다. 나는 그냥 공부하러 마산에 온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가 독립이 되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두 달을 넘기지 못했다. 사월 말 쯤 어느 토요일, 김치도 떨어지고 간장에 고춧가루, 쌀까지 떨어져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집으로 갔다. 그런데 저녁 먹을 때가 한참 지나 어둑어둑한 마당에서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종종대는 엄마를 보고 왈칵 눈물이 치솟았다. 내가 그동안 어째 이런 엄마를 내몰라라 하고 살았던가.
엄마는 아랫방 소죽솥에 불을 밀어 넣고는 큰방 정지간으로 쫓아 들어가서 달그락거리며 저녁상을 보다가,
걸레를 빨아 마루를 쓱쓱 문지르다가 또 아랫방 소죽솥으로 달려가서 불을 거머 넣었다. 그때까지 빨랫줄에 가득 널린
할매 고쟁이와 오줌걸레들을 휘익 걷어다 작은방 마루에 던져 놓고는 새밋가에 쪼그리고 앉아 낮동안 할매가 적셔 내 놓은
오줌걸레를 흔들어 빨고 있는데 할매가 방에서 부르신다.
"아이구 야야, 니 아무리 바빠도 안 되겠다. 몬 참겠다, 야야."
대문 앞에서 "엄마"하고 부르지도 못하고 눈물만 글썽이고 섰다가, 급하게 부르는 할매 소리에 얼른 마루 끝에 엎어둔
할매 오줌그릇을 들고 올라섰다.
"할매예."
"아이구, 이기 누고? 우리 미야가 왔네, 우리 미야가 왔어. 천지에 무정한 것아 와 그래 안 왔더노?"
눈물이 그렁거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을 외로 꼬고 할매를 오줌그릇에 안아서 앉히는데 팔에 힘이 주어지질 앉는다.
"아이구, 야아가 지 손으로 밥해묵는다 카더마는 굶고 살았나? 야아야, 밖에다가 싸겠다. 와 이카노?"
두 번 세 번 할매를 안고 씨름을 하다가 겨우 그릇에 올려앉히고는
"할매, 내 인자 토욜마다 오께예. 잘못했습니더, 인자 안 그라께예."
그러나 말은 나오지를 않고 눈물만 자꾸 나온다. 엄마는 허리가 한꺼번에 펴지질 않아서 구부정한 채로 축담에 올라섰다가
방걸레를 내 앞으로 툭 던져주고 오줌그릇을 받아들고 돌아섰다.
"밥 묵자. 마리(마루)는 닦았다, 할매 방만 문대면 된다. 어서하고 밥이나 묵자."
내가 집에서 독립해서 해방된 세월을 산 것은 그렇게 딱 두 달. 그 날 뒤로 3학년 졸업할 때까지 토요일 수업을 마치면
바로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내달았다. 방학을 하면 종업식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서 개학 하루 앞날에 마산으로 돌아갔다.
학교 안가는 동안만이라도 할매 수발을 엄마한테서 떼어내 주고 싶어서. 해질 때까지 들일을 하고 들어와서 어둑어둑한 마당을,
정지간을, 새밋가를 오가며 그렇게 종종걸음 치는 엄마를 그냥 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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